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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호][칼럼] 내 불필요한 경험들 #9 : 커밍아웃이란 원죄
2023-11-02 오후 13: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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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0월 

 

[칼럼]

내 불필요한 경험들 #9

: 커밍아웃이란 원죄

 

그냥 비유일 뿐인데도. 커밍아웃을 죄라 하는 게, 이래도 되는 걸까, 마음이 불편하다. 근데 본가라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로 줄곧, 커밍아웃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박권사님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던 걸 떠올리면, 이 글에서쯤은 괜찮겠단 생각이다. (서른이 돼서야 집을 나오면서 쫓겨났다고 얘기하는 것도 어차피 이치에 맞는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커밍아웃하지 않고 살아왔을 삶도 어땠을진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박권사님에게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해버린 후로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는 거다. 집을 나온 선택이 그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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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애인과 사귈 땐 아직 본가에 살고 있었다. 커밍아웃 이후 외박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던 엄마와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외박을 하려했던 전 애인 사이, 그 난처한 입장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서리친다. 내가 외박을 하던 밤마다 박권사님은 악몽에 시달렸다. 치워도 치워도 오물과 벌레가 쏟아지는 방을 치우고 또 치우는 꿈이라고 했다. 결벽증이 심한 박권사님은 “정말 같이 살 수가 없다”며 눈물로 하소연했다. “내가 나가 살면 되겠네!”라고 맞서면, 엄만 “그럼 평생 안 보고 살 수 있냐”고 필살기를 썼다. “지금 이런 꼬라지인 널 맘 놓고 밖에 내보낼 수도 없다”고도 했는데, 여기서 이런 꼬라지라는 건 내가 게이인 꼬라지다.

 

사귄 지 일 년 반 정도가 되었을 때, 나와 전 애인은 헤어졌다. 속상하면 연락이 두절되거나 집으로 가버리기도 했던 전 애인에게, 이번 주엔 또 어찌 외박을 미루자는 얘기를 꺼내야 할지, 이젠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외박을 하던 밤마다 받던, 저주에 가깝던 박권사님의 카톡도 끝이었다. 숙박비에 애먼 돈 쓰지 않아도 됐고, 무엇보다 더 이상 모텔에서 주기적으로 자지 않아도 된다는 게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차오르는 해방감도 잠시, 머리에 아주 또렷한 영상이 스치자, 속이 꽉 막혔다. 기도실에 달려가 오랜 기도가 응답받았다며 감사기도를 드릴 박권사님, 안 될 일이었다. 혼자서라도 일주일에 한 번씩 꾸준히 외박을 해야 하나, 엉뚱한 고민을 했다. 

 

결국 박권사님의 기도가 응답받은 걸로 됐다. 그때 엄마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았을까? 당분간 엄마 집에서 좀 더 일상다운 일상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박권사님은 조건부로 나와의 동거를 견딜 수 있었다. 나는 사랑하는 아들이었다가도, 동성연애를 하고 외박을 할 때면 더러운 아들인 대충 그런 거였다. 나한테 게이란 건 띠부띠부씰 같은 게 아닌데. (차라리 그런 거면 얼마나 편할까) 박권사님집에선 언제나 그게 협상의 대상이었다. 그래도 별다른 수가 없었고, 내가 사는 이 집은 “엄마 집”이라는 게 점점 더 본격적인 사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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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더러운 아들이 된 김에, 어떻게 덜 불결한 게이 아들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언제 커밍아웃을 해야 할지 모르니, 부지런히 돈 벌어 빠르게 독립을 준비하자! 천천히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커밍아웃하는 전략도 참 좋겠지만. 한 지붕 아래서라면, 나의 독립 준비보다 부모님의 의심이 확신이 되는 게 더 빠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끼라곤 먼지 한 톨만치도 없어서 커밍아웃을 미루고 미룬대도, 여자친구는 왜 없는지, 주말마다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어울리는 친구들은 대체 누군지, 설명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경제적 자립은 아직인데, 부모와의 동거가 불편해지기 시작하면, 박권사님의 악몽이 현실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부모 집에 얹혀사는 신세였던 나와 전 애인이 고를 수 있는 옵션은 사실상 모텔이 유일했다. 모텔은 대실로 다 알 수 없다. 숙박을 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끝이 헤진 수건이라든지, 창틀과 침대 뒤편에 쌓인 먼지라든지. 계단 통로에 그대로 쌓아놓은 이불이며 베개며…. 위생적이지 않은 것은 물론, 새하얀 옷을 입고 앉아보면 알게 되는 누렇게 바랜 이불 시트, 리모컨 틈에 눌어붙은 알 수 없는 음식물 찌꺼기, 머리카락 + 구불구불한 털들. 방에 남은 흔적들은 꼭 알고 싶지 않은 것투성이였다. 궁금하지 않은 민낯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걸 꼽아보면 욕조 바닥에 남은 담배 자국을 꼽겠다.

 

박권사님은 게이라면 그런 악몽에 가까운 방도 기꺼이 택할 줄로 알 테지만, 내가 박권사님에게 물려받은 건 빼닮은 외양뿐이 아니었다. 우린 해외여행을 가 비싼 호텔 방에 묵어도 카펫 바닥을 밟기 싫어 나란히 까치발을 들고 다니던 모자다. 외박을 하며 대충 거짓말로 둘러댈 수도 있었는데, 진작 포기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가급적 잠과 화장실은 집에서, 였던 날 박권사님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날 그렇게 잘 알면서도 게이 아들이란 걸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해 오해할 수 있던 걸 생각하면, 박권사님이 참 미워지지만, 그래… 부모에게 커밍아웃이란 정말이지 내 자식이 내 자식이 아닌 게 돼버리는 일이니까. 크리스마스엔 모텔, 그조차도 잡지 못해, 전 애인 친구가 사정상 몇 달째 비워둔 원룸엘 갔다. 수도가 꽁꽁 얼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밖에서 입던 옷 그대로 껴입고 잠들려 애쓰던 걸 생각하면, 성냥팔이 소녀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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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가 끝나고, 얼추 삶을 재정비했다 싶었을 때, 다시 남자를 만나볼 요량으로 앱을 다운받았다. 연애할 때가 아니라서요, 라는 말을 들으면 콧방귀부터 뀌던 나였는데, 그땐 그 말을 심심찮게 하고 다녔다. 근데 정말 그랬다. 연애 좀 하겠다고 엄마 집에서 또 전쟁 같은 일상을 보낼 순 없었다. 모텔서 먹고 자는 건 말할 것도 없었고. 그런데 큰 기대 없이 사람을 만나는 동안에도, 나는 모텔남보다는 자취남에게 더 끌렸다. 모텔보다는 자취방에서 하는 게 언제나 더 재밌다. 책장이나 옷장, 진열대 같은 걸 구경할 수도 있고, 자취방을 찾아가면서 동네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자취방에선 고개만 한 번 휙 돌려도 어색한 침묵을 깰 만한 소재를 여럿 찾을 수가 있다. 그런데 제가 연애 생각은 별로 없어서요… 라고 재수 없는 소리하는 인간에게 자취방 문을 활짝 열어 환영해 줄 바보는 별로 없었다. 별수 없이 다시 모텔 대실행이었다.

 

사람은 이래서 말을 아낄 줄 알아야 한다. 연애할 때가 아니라고 떠든 지 얼마 되지 않아, 관심 가는 사람이 생겼다.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아닌데…”라고 운을 떼면, 딱 짝사랑 전조증상으로 보인다는 것도 아는데, 잘 모르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어색해서 그랬다. (그건 아직도 그렇다) 친구는 반쯤 놀리는 투로 “뭐, 연애할 때가 아니라며~ 연애 못 해도 상관없다며~” 하고 맞받아쳤는데, 나도 질세라 “그래, 상관없거든!” 우겨댔다. 

 

집에 오며, 무슨 수가 없을까, 머리를 굴려봤다. 그래, 어차피 연애할 상황도 아니고. 그쪽도 적당히 섹스하고 싶은 것 같은데, 오히려 좋지. 그래도 어떤 사람인지 궁금은 한데, 섹스파트너여도 가끔 밖에서 밥 먹고 이런 저런 얘기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그런 걸 fwb라고 하나? 근데 아무나 뒹굴고 다니는 건 싫은데, 위험하기도 하고. 사귀는 건 아닌데, 다른 사람하고 자고 다니지는 말자고 해볼까? 그래… 이건 내가 생각해도 좀 이상하다. 그럼 그냥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다 보면, 눈치껏 딴 사람 만나고 다니는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친구를 만나 나의 야심 찬 계획을 늘어놓았더니, 친구 가라사대. 그래, 달호야 우린 그걸 연애라고 한단다. 니가 할 상황이 아닌 그거!

 

외박을 안 한다고 내가 게이가 아닌 것도 아닌데, 박권사님은 왜 그렇게 외박에 집착했을까.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외박을 못해서 연애랄게 사치가 되니, 쉽게 게이일 수 없었다. 남자랑 자고 다니는 것쯤은 스트레잇도 할 수 있다. (알고 보니 스트레잇이어서, 어린 시절의 날 눈물 흘리게 한 GV 배우들만 해도 손발 가락으로 다 못 센다) 모텔에서 남자를 만나는 건 쉬웠지만, 거기엔 그 남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뭘 알아야 좋아하든 말든 할 텐데. 게이들 커밍아웃 단골 대사가, 나 남자 좋아해, 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게이이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엄마 집이었지만, 집 밖으로 나와 모텔에 간다고 충분히 게이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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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박권사님이 왜 외박에 집착했던 것인지 알고 있다. 같이 사는 한 상대의 부재는 사건이다. 어릴 땐 엄마가 외출하면 그때가 야동을 볼 유일한 기회였고, 그러다가 연락 없이 엄마의 귀가가 늦어지면 슬슬 불안해져 동네방네 전화를 걸어 엄마의 행방을 수소문하기도 했다. 가끔 산에 간다고 해놓고 해가 다 저물도록 연락이 없으면, 온갖 상상을 했다. 외박을 한다고 비어있던 내 방도, 내일 들어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묵묵부답이었던 카톡도…. 지금 생각하면 박권사님이 더 한 악몽을 꿨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어디 가? 언제 와? 어디 갔다 와? 같이 살면 별 내용 없이 인사말처럼 건네는 말들을 박권사님과 나는 더 이상 별 생각 없이 할 수 없게 됐다.

 

커밍아웃은 절대 한 차례로 끝나지 않았고, 함께 사는 동안 “너 여기 좀 앉아보라”는 박권사님의 호출은 주기적으로 있었다. 커밍아웃 후 게이라는 건 오히려 금기어였으므로, 박권사님은 언제 (주님의 아들로) 돌아올 것인지 따져 물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박권사님은 번번이 울었고, 그러다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가끔은 스스로 멱살을 쥐어뜯고 가슴팍을 내려치기도 했다. 아들이 게이라고 박권사님 스스로 주변에 말할 일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없었으므로, 엄마가 갑자기 밥을 굶어 야위고, 좀처럼 웃지도 않던 게 주변 사람들에겐 더욱 영문 모를 일이었을 거다. 가족·친지들과 다 함께 있다가 뉴스나 드라마에 동성 어쩌구가 나오기라도 하면, 나와 엄만 합죽이가 되어 온갖 신경을 서로에게만 집중했다. 의미 없는 농담이 오가는 동안 우리 둘만 다른 시공간에 동떨어져 있었다. 난 옷장 밖으로 나온 게 아니라, 엄마와 나 둘만이 있는 옷장에 도로 갇힌 것 같았다.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에겐 연애할 때가 따로 있지 않다는 걸 깨우쳤고, 결국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반년쯤 되었을 때, 달에 한 번 외박하는 걸 적당히 넘어가 주면, 나도 월세 낼 돈으로 생활비 보태며 엄마 집에 얌전히 살겠다고 제안했었다. 박권사님은 그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일이라고 했다. 커밍아웃을 한 지도 이삼 년쯤 되어갔는데, 박권사님은 한결같이 당장 어제 커밍아웃을 한 것처럼 반응했다. 내가 날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엄마에게도 시간이 필요한 걸 거야, 생각하며 버텨왔는데. 이쯤 되니, 아예 잘못 생각한 건 아닐까, 의심되기 시작했다.

 

일찍 돌아가신 아빠에 대한 기억은 특별히 없다. 아빠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게 있다면, 죽음이란 건 아무리 노력해도 바뀔 수 없는 상태란 거였다. 커밍아웃 후, 가끔 엄마의 일상이 완전히 무너진 걸 볼 때, 꼭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하물며 일이 년을 사귄 애인과도 이젠 서로 견뎌줄 수 없음을 인정하고 헤어지는 게 참 어려운 일인데, 평생을 함께 살아온 엄마와 내가 더 이상 한 공간에서 서롤 견뎌줄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건 더 가슴이 뻥 뚫리는 일이었다. 다음 날부터 바로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이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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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한 후로, 오히려 빈번하게 외박을 하는 일은 없다. 이 년 가까이 연애하며 모텔은 가본 적도 없고, 서로를 위해 퀸사이즈 침댈 들여놓았지만, 애인도 나도 각자 제 집에서 잘 때 제일 잘 잔다. 애인 집에 가면 두꺼운 암막 커튼이 있고, 본인이 좋아하는 아기자기한 일러스트가 곳곳에 붙어있다. 우리 집엔 독립할 때 애인이 선물해 준 조명이 있고, 퀴어서적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있다. 애인은 가끔 우리 집에 와서 왜 젤 같은 걸 다 보이는데 꺼내놓냐고 잔소리도 하는데, 그조차 귀여울 일상이다. 그런 일상은 당연히 모텔에도, 이젠 “본가”가 된 엄마 집에도 없는 것들이다. “장소유”란 건 번개보다 연애 상대를 찾는 게이들에게 중요한 게 아닐까. 자신을 숨기기 위한 노동이 필요 없는 편한 공간을 장소라고 할 때, 온갖 곳이 그들의 장소인 스트레잇들과 달리 어떤 퀴어(보통 부모와 함께 사는)에겐 집조차 자신의 장소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편하게 놓아둘 수 있는 공간은, 날 알아가는 것이 즐거울 관계라야 비로소 가치 있는 공간이다.

 

엄마 집엔 온갖 곳에 성경 구절이 붙어있고, 아직도 본가에 가면 엄만 날 교회에 못 데리고 나가 안달이다. 그런 공간에서 게이 아들 탓에 박권사님은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억지로 많이도 알았다. 엄마와 난 이제 다른 집에 살지만, 전과 다름없이 한 가족 안에 살고 있고, 박권사님을 둘러싼 사람 중 날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나를 더 드러내고 행복해질수록 엄마의 입장은 난처해지는 게임이란 건 유효하고, 그걸 생각하면 죄책감과 억울함이 앞다투어 밀어닥친다. 그래도 독립하고 바뀐 게 있다면, 적어도 집이란 공간에서만큼은 난 내가 게이란 걸 1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고, 숨기기 위한 수고로움은 더욱이 필요가 없다.

 

독립을 한 지 이제 일 년이 조금 넘었고, 엄마에게 커밍아웃한 지는 사 년이 넘었다. 사실 여태껏 난 독립(after 커밍아웃)이라면 흐린 눈 뜨기로 일관해 왔다. 엄마 집에서 독립한 지금도 카톡을 제때 읽지 않는 습관이 남아있다. 어느 순간부턴 폭언이 담긴 엄마의 카톡을 아예 읽지 않았고, 엄마한테 들었던 못 들을 말들도 의식적으로 잊었다. 집도 나왔다. 회피한 거라고 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피하는 것도 전투의 기술이고, 삶의 파도를 정면으로 맞서는 것도 정도껏이다. 독립한 지금 엄마와 내 관계가 더 나아진 것인지, 어떤 가능성을 찾아가고 있는 건지는 여태 잘 모르겠다. 다음 생이 있고, 그래서 엄마에게 두 번째 커밍아웃을 할 수 있고, 두 번째 독립을 할 수 있다면 분명 서로에게 덜 상처 주는 방식으로 해낼 자신은 있다. 그래, 원래 처음부터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그림_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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