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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호][커버스토리 "레즈비언 가시화의 날" #2] 경상도, 레즈비언 정치도전기 그리고 임아현
2026-05-08 오후 17: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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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4월 

 

 

[190호]

[커버스토리 "레즈비언 가시화의 날" #2]

경상도, 레즈비언 정치도전기

그리고 임아현

 

 

 

4월 26일 레즈비언 가시화의 날을 맞아 RUN/OUT은 세 개의 자리에서 성소수자 정치의 가능성을 물었습니다. 일본의 오츠지 가나코 의원에게서는 먼저 길을 걸어간 당사자 정치인의 시간과 생존을 물었고, 부산의 〈레즈비언 정치도전기〉 상영회에서는 지역에서 정치인을 키워내기 위한 공동체의 조건을 마주했습니다. 심미섭 작가와의 북토크에서는 정치가 거창한 결심만이 아니라 이별, 분노, 농담, 일상의 감각에서도 시작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결국 세 편의 이야기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입니다.

"성소수자 정치인은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함께 만들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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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도시로만 막연히 불리던 부산. 사람 사는 어느 곳이 그렇듯, 그곳에도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분명히 숨 쉬며 존재해 왔습니다. 하지만 범일동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커뮤니티 공간들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주변으로 옮겨가는 현실을 보며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마주했습니다. 공간적 생존을 넘어, 우리 삶의 요구를 사회에 직접 전달하는 강력한 ‘정치’의 언어를 가질 수는 없을까?


RUN/OUT은 이러한 고민을 안고 작년 서울에서의 첫 시작과 동일하게, 다큐멘터리 <레즈비언 정치도전기>의 부산 상영회를 기획했습니다. 퀴어문화협동조합 홍예당, 영남지역 성소수자 지지모임 영남퀴어, 부산퀴어행동 등 척박한 지역에서 분투하는 동료 단체들과 연대하며 우리가 얻은 해답은 분명했습니다. 정치를 뒷받침할 완벽한 커뮤니티가 아직 없다면, 일단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부딪히며 그 기반을 함께 다져나가는 것 역시 RUN/OUT의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비수도권이라는 막막함을 딛고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틔우기 위해 기꺼이 자리를 빛내주신 소중한 참가자분들이 생생한 후기를 이곳에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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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사이 RUN/OUT
조직화 리드 
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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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런아웃 행사가 열리게 되었다고 했을 때, 정말 기쁜 마음이었다. 수도권 중심의 행사가 아닌 지역의 가능성을 열어내는 차원이기도 했고, 대구에 사는 내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이동할 수 있는 영남권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커밍아웃 성소수자 정치인. 이 세가지가 교차될 수 있는 사람도 적은데 거기다 지역이라는 단어가 하나 더 붙는다. 우리는 과연 그런 사람을 발견해내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성장할 수 있을까? 사실 지금 내가 그렇게 성장하고 있지 않기에 서울에서의 행사를 처음 제안받았을 땐 부담스러움이 앞섰다. 한번 경험해서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그 때 보다는 부산이었기에 나의 이야기를 더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지역이 주는 안정감 그 포근함 덕분에 나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는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느끼셨을까?

 

레즈비언 정치도전기의 최현숙의 선거 캠프는 난다긴다하는 성소수자 활동가들의 투쟁 현장이 되고 운동을 이끄는 정치 영역의 변화를 만들고자 했는데, 지역 출신의 사람이 보기엔 영 다른 세계 이야기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가 여전히 우리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생산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성소수자 정치인이 등장하고, 그 속에서의 존재 투쟁을 만들어가야하는 것. 부산에서 우리가 만난 이유는 그 기반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이 세계를 흔드는 사람들과 연결되고 우리가 해 온 일들이 의미있음을 이야기하기 위함이지 않을까. 나도 행사 덕분에 오래전 부산에서 함께한 동료를 만나 지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쨌거나 만나야 한다.

 

어떤 곳이든 지역 정치인이 단번에 등장하지는 않으니, 오늘을 기점으로 또 다른 행사들이 이어지는 바탕이 되길 바란다. 곳곳에서 성소수자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 관점을 비틀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정치의 출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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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지방선거
대구 동구 기초의회 출마자 
임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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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정치도전기>를 거의 10년 만에 다시 봤다. 친구사이의 런아웃 사업을 SNS를 통해 지켜보기도 하고 지역 사업 공동주최 제안도 받으면서 여러 고민을 하게 됐던 차에, 레정기는 그 고민들을 나눌 좋은 매개체가 될 것 같았다. 

 

이전의 상영회에서도 여러 참여자들이 최현숙 당시 후보가 시장에서 상인들을 만나며 스스로를 성소수자가 아닌 여성으로 소개하는 장면을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으로 꼽았다고 하던데, 나도 그랬다. 아마도 동성애니 트랜스젠더니 하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을 가능성이 높은 무작위의 시민들을, 악수를 건네고 표를 부탁하며 몸으로 만나는 시장 유세. 나라도 성소수자가 아닌 여성으로 소개했을 거라고, 아니 사실 나는 몸으로 부딪히는 그런 역할은 용기가 안 나서 할 수조차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시장 유세에서 성소수자가 아닌 여성으로 소개하는 일은 비판 받아야 할 일일까? 그것은 인권 운동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일까? 그렇다면 그 비판을 받아들이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성소수자 후보라고 소개하며 악수를 건넬 때 받게 될 냉대와 거절, ‘별 게 다 정치한다고 나오네’라는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는 그 시선을 감당하는 것은 누구일까? 스스로를 성소수자 후보가 아닌 여성 후보라고 소개하는 결정을 후보 한 명이 감당하게 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부산시가 발표한 ‘제3차 인권정책 기본계획’에는 성소수자 관련 정책이 없다. 2025년부터 2029년까지 부산시가 하게 될 인권 정책과 사업의 토대가 되는 계획인데, 계획 수립을 위한 조사에서 성소수자가 ‘가장 인권이 존중되지 못하는 취약집단’으로 뽑혔지만 정작 사업 계획에는 성소수자 관련 사업이 없다. 여성, 아동·청소년, 장애인, 노인, 이주민과 북한이탈주민, 국가폭력 피해자 등 집단별로 구체적인 사업 계획의 목록이 나와있는 것과 달리 성소수자 관련 사업은 시민 대상 인권실태조사와 1년에 한 번 하는 인권문화행사에 주제로 포함하겠다는 것이 전부다. 

 

이 계획이 만들어질 때 부산의 유일한 유급 퀴어 활동가로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만들어지고 있는 줄도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나는 그때 무엇인가를 했어야 했던 걸까? 그것을 하지 않은 것은 비판 받아야 할 일일까? 이 계획에 성소수자가 포함됐으면 살릴 수 있었을 누군가를 못 살리게 돼버린 건 아닐까? 홍예당을 소개할 때마다 “저희는 인권단체는 아니에요”라는 말을 꼭 붙이곤 했다. 인권단체라고 소개했을 때 짊어지게 될 수많은 책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부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QIP도 그 책임들을 다 지려고 하다가 결국 활동가들도 다 소진되고 서로 감정 상하게 싸우면서 공동체가 아예 와해됐다. 단체가 없어지면 운동은 누가 하는가? 반상근 월급 135만원 받고 있는 내가 단체 내부 사업과 운영 일도 다 하고 그 일들까지 다 맡으려고 하면 결국 우리도 단체 문 닫게 될까봐 두려움부터 앞섰다. “우리 그거 못 해요~ 그거 다 하면 망해요~” 하면서 뻔뻔한 척도 했지만, 수많은 책임들을 외면하고 있다는 부끄러움에서 나도 자유롭지는 않았다.

 

같이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다. 한정된 자원(돈과 시간)을 나누는 일(그것이 정치 아닐까)을 맡게 되면, 인권의 원칙만 따졌을 땐 절대 포기하면 안 될 무언가를 포기하는 결정도 하게 된다. 홍예당은 사무실에 휠체어 접근성도 없고 성중립 화장실도 없다. 지역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연대활동도 안 한다. 물론 언젠가는 다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은 못 한다. “나중에”라는 말을 내 입으로 하게 된다는 게 정말 너무 싫지만 그렇게 된다. 활동가가 소진되지 않고 단체가 문 닫지 않는 게 더 우선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권의 원칙을 지킬 기회조차 없어진다. 그것이 너무 어렵다. 인권은 원칙이고 정치는 협상인데, 원칙을 지키지 않는 인권은 정당성을 잃고 협상하지 않는 정치는 변화를 만들기 어려운데, 애매한 나는 반인권적인데다 변화도 못 만드는 한심한 활동가가 된다. 동료는 무엇이고 동지는 무엇인가. 함께 나쁜 일을 할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 필요한데, 지역에서 그런 사람들을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부산시 인권정책 기본계획에 대응할 운동 역량도 없는 지역에서 퀴어 정치인 하겠다고 누군가 나서봐야 그가 무슨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정치인도 활동가도 어디선가 나타나는 게 아니다. 사람을 키우는 것은 공동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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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문화협동조합 홍예당
상근활동가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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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런아웃 행사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소수자 정치인의 가능성을 찾는다는 취지 아래 다큐멘터리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를 상영하고, 대구 지방선거에 출마했던 임아현 님이 패널로 참여한다고 했다.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는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퀴어 대선배(?)들의 삶이 궁금했고, 지금보다 성소수자들이 덜 가시화되었던 시기에 레즈비언으로 정치 유세를 했다니, 너무 궁금했다. OTT나 영상 자료실을 찾아봐도 접근할 수 없었기에 이번 상영 소식은 무척 반가웠다. 영화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재밌었고 감동적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았던 두 가지 장면을 공유하고 싶다.

 

첫 번째 장면. 종로 한복판에서 최현숙 후보는 대면 유세를 한다. 카메라는 줌 인으로 유세 현장을 꽉 채운다. 어색함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가운데 캠프 동료들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어딘가 거대하고 떠들썩한 축제를 담은 것 같다. 그러다 갑자기 카메라는 줌 아웃을 단행한다. 유세 차량 옆을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시민들, 힐끗 시선을 주었다가 이내 제 갈 길을 재촉하는 행인들의 모습이 원거리에 포착된다. 떠들썩하던 유세 소리도 멀어진다. 하지만 그 선명한 온도차에서 나는 즐거움을 느꼈다. 질서정연한 거리가 흐트러졌고,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거리가 변했다. 선거 유세를 하면서 종로 한복판에서 개똥벌레를 부르는 순간에도, 드랙을 한 채로 버스를 타고 광장에 나설 때도, 일상적인 공간이 이상하게 재밌어 보였다. 신난 사람들과 무관심한 사람들이 한 프레임 안에 잡혀 있을 때, 이곳의 맥락을 모르고 지나치는 쪽이 오히려 낯선 존재처럼 보였다.

 

두 번째 장면. 최현숙 후보가 선거 유세를 위해 길거리에서 상인들과 행인들을 만난다. 그때 그는 자신을 레즈비언 후보가 아닌 여성 후보로 소개한다. 선본 회의에서 만들어졌던 정체성 스토리텔링을 현장에서는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때 나의 경험이 떠올랐다. 영남퀴어 플로깅 모임에 나갔을 때의 일이다. 성당 주차장 근처에서 쓰레기를 줍고 있던 내게 아저씨가 다가와 어느 단체에서 왔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인 뒤 개인적으로 플로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권 단체라고 얼버무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자리를 떠난 뒤에 나는 부끄러워졌다. 일상의 순간에도 나는 나를 숨기고 있었고, 그걸 오랫동안 알아채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나를 숨기거나 드러내는 그 순간들이 이미 정치적인 상황이었다.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 영화 제목을 되뇌어 본다. 정치란 무엇인가? 최현숙 후보는 유세 내내 시민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아마 그 말은 진심일 것이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산다는 건 낯선 자리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부근을 만들고, 동료를 만들고, 상식을 만드는 것일 테다. 이념보다 먼저, 주변의 사람들을 알고 싶고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마음. 정치적 삶은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다. 정치는 쪽수 싸움이 아니라 각각 고유한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는 일이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 모여 평등한 관계를 이루려는 실천이다. 여기서 '우리'는 나와 동일한 사람들끼리 모여 연대하는 것이 아니다. 젠더도 계급도 나이도 다른, 심지어 지향과 속도가 다른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 서는 것. 불화를 피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걸으려고 하는 것이 정치일 것이다.

 

최현숙 후보가 레즈비언 정치인으로서 대한민국에 커밍아웃하기 위해 유세에 나온 지 18년이 흘렀다. 그 사이 성소수자들은 더 많이 거리에 나왔고, 제도적인 변화도 생겼지만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정치인은 여전히 드물다. 이번 부산에서의 행사에는 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부원부터 정당의 당원, 활동가, 그리고 마음이 이끌려 온 이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잎으로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오고 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지칠 만큼 대화를 하는 것. 그게 동료 만들기로서 정치의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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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역 성소수자 지지모임
회원(사진 촬영 협력) 
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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