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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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서울퀴어영화제 20주년” #2]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사무국장 박기호님 인터뷰
: 2. 친구사이와 <종로의 기적>, <위켄즈>
(1부에서 계속)
▲ 左 : 한국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10주년 기념행사 '두번째 커밍아웃' (2004.4.8-4.11)
右 : 친구사이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이송희일 감독의 <동백꽃 프로젝트>(2004)
친구사이에서의 영화 관련 활동
터울 : 2004년이 친구사이 10주년이었잖아요. 이 때 영화제가 개최됐더라고요.
박기호 : 처음에 나왔던 얘기는 '간단히 하자'였어요. 그러면 국내 작품 몇 편 모아보자- 했는데, 그러다보면 사람이 욕심이 나잖아요. 처음에는 사무실에서 하자 그러다가, 아트선재센터에서 하기로 결정됐고 대관이 승인됐어요. 그러면 영화제만 하기엔 뭐하지 않냐, 포럼도 하자, 그래서 포럼도 하게 되고, (웃음) 그러면 포럼도 하는데 개막식은 빵빵하게 해야 되지 않냐고 해서 꽃다지 부르고 그랬어요. 이렇게 굴러가다보니까 규모가 점점 커진 거죠. 이게 사람의 욕망이거든요. 친구사이 20주년 행사 때도 사실 비슷했어요. (웃음) 운영위에서 회의를 하면 할수록 행사가 점점 커지는 거예요. 그래서 10주년 행사 치르고 빚을 엄청 져서 나중에 빚 청산 파티도 하고 그랬었죠.
그래도 그런 규모의 행사는 처음이었어요. 서울퀴어영화제 때에도 별로 생각하지 못했던 시도들이 많았죠. 천정남씨가 그 때 아트선재센터 주변에서 일하고 있어서, 센터 측과 되게 친했었어요. 그래서 대관이 수월했었고, 아트선재센터 외벽에 영화제 플래카드를 걸고, 그게 제가 알기로는 성소수자 행사 중에 가장 큰 플래카드였어요.
터울 : 친구사이에는 몇 년도부터 참여하게 되신 건가요?
박기호 : 되게 애매모호한데, 퀴어문화축제 일이랑 같이 하다보니 어느새 슥 넘어오게 된 거라서, 언제부터인지는 애매한 것 같아요. 하여튼 친구사이가 막 커질 때고, 상근자가 필요할 시기였었어요. 그래서 저보고 상근을 할 생각이 있냐고 해서, 월급받으면서 상근자로 일했었죠.
터울 : 친구사이 사무국장을 2009-2011년 하셨었는데, 그 전에도 상근자로 일하셨군요.
박기호 : 그렇죠. 상근자로 먼저 출발했어요. 처음에는 반상근, 그 다음엔 상근, 이렇게 된 거죠.
▲ 파고다 퀴어영화제(2003.3.13-3.15). 2002년 파고다극장 폐관을 기념해 개최되었다.
터울 : 이 시절 얘기를 조금 더 하면, 앞에서도 봤지만 2002-2004년에 영화 관련 행사들이 많이 열렸더라고요. 자료에 보니까 '파고다영화제'라는 것도 열렸더라고요.
박기호 : 네, 있었어요. 그건 이송희일 감독이랑 저랑 둘이서 했었고, 아트큐브에서 개최했었어요. 간단하게 한국 영화 몇 개 모아놓고, 단편부터 장편까지 모아놓고 해보자 해서 했던 적이 있었어요.
터울 : 뭔가 이 시절이 영화제의 대중화? 이런 느낌이 좀 있어요. 단체들이 한번씩은 다 해보는 느낌으로, (웃음)
박기호 : 영화학교에서 졸업작품들이 나오는데, 퀴어 관련 작품이 한두 편씩 끼어있는 거예요. 그런 것들만 모아서 해도 좋겠다고 해서 해봤었어요. 이송희일 감독과는 이상한 것도 많이 했었어요. 퀴어영화를 제작해보는 아카데미도 했었어요. 그 때는 운좋게 게이, 레즈비언이 다 와서 수업을 진행했는데, 정말 싸움이 많았어요. 4개의 팀을 가동시켰는데, 2개의 팀은 만들다 엎어졌고, 1개 팀은 끝내 이 작품은 자기 작품이 아니라고 해서 없어지고, 한 작품은 한 명이 끝까지 남아서 완성하고 그랬었어요. 그 때 문화학교 서울의 장비도 빌리고, 미디액트에도 장비 빌리고.
터울 : 그럼 2007년에 대구에 쉬러 내려가셨다가, 언제 종로로 다시 복귀하셨나요? (웃음)
박기호 : 친구사이 상근자로 오게 되면서 종로로 다시 오게 됐죠. 거기에 살던 친구가 너무 외로움을 많이 타는 거예요. 각자 외로움은 각자가 해결해야 되잖아요. (웃음) 밤마다 같이 술을 먹으러가다보니, 전 다음 날에 일을 나가야 되잖아요. 그러다보니 몸이 너무 피곤해지고. (웃음)
터울 : (웃음) 그래서 2007년에 올라오셨는데, 사무국장 하시기 전까지 계속 상근활동하신 건가요?
박기호 : 그렇죠.
터울 : 그럼 상근 하시면서도 영화 관련 활동을 계속 하신 건가요?
박기호 : 알음알음 도와줬죠. 서울독립영화제(서독제)도 도와주고, 인디포럼 영화제도 도와주고. 미쟝센단편영화제도 요청이 오면 도와줬죠.
터울 : 주로 어떤 일을 도우셨나요? 영화 섭외나,
박기호 : 섭외는 제가 안하고요, 저는 영화관 관련 실무 쪽을 많이 했어요. 스케쥴 조절하고, 일정 조정해주는 작업을 주로 했죠.
터울 : 친구사이가 2000년대 초중반에 단체의 색깔이 많이 바뀌는 것 같아요. 문화운동의 흐름이 활발해지면서, 거기에 영화가 굉장히 중요한 구심점이 되는 것 같아요.
박기호 : 딱히 영화가 중요했다기보다는, 그 당시에 회원들의 어떤 폭발적인 욕구가 있었어요. 그 때 친구사이에서 별의별 걸 다 했어요. 뜨개질, 수화, 금속공예 등등. 회원들의 욕구가 막 발현되기 시작해서, 그 전에는 친구사이에서 하는 일은 운동적으로 당연히 좋은 일이야-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거기에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의사를 투영하기 시작했던 시점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 <종로의 기적>(2011)
<종로의 기적>(2011) 제작
터울 : 그래도 그 문화활동 가운데에서 영화 관련 활동이 꾸준한 흐름을 갖고 있더라고요. 김조광수 감독의 영화들도 그렇고, 친구사이에서 2011년에 <종로의 기적>도 제작하게 되잖아요.
박기호 : 그 전에는 이송희일 감독, 소준문 감독도 있었죠. 그 친구들이 영화를 찾는다고 하면, 공식적으로 친구사이가 관여하지는 않지만, 알음알음으로 다 도와주는 거죠. 그래서 이송희일 감독 영화 중에서 엔딩 스크롤에 친구사이의 이름이 몇 번 올라갔을 거예요. 그러다가 <종로의 기적>은, 처음에는 영화까지 갈 생각은 없었어요.
터울 : 어떻게 제작이 기획되게 된 건가요.
박기호 : 처음에는 커밍아웃 인터뷰를 찍어보자고 해서 시작된 거예요. 이젠 우리에게도 영상이 중요하게 될 것 같다고 해서, <종로의 기적>에 나오는 티나(故 최영수님)의 스파게티 가게가 있잖아요. 그건 실은 <종로의 기적>을 찍으려고 한 게 아니고, 커밍아웃 인터뷰를 하면서 보존용으로 찍어 남겨뒀던 거였어요. 그렇게 찍기 시작했는데, 그러다보니까 영화로도 제작해보자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 거죠.
터울 : 그럼 처음부터 연분홍치마 측이랑 함께 제작하신 건가요?
박기호 : 처음부터는 아니었고, 어느 집단에게 맡길 것이냐, 알음알음 알아봤죠. 그러다 연분홍치마와 하면 어떨까 해서 얘기해보고, 그쪽에서도 좋다고 했고, 그러면 섭외는 친구사이에서 할 테니 촬영은 연분홍치마에서 하라고 해서 성사가 된 거죠.
터울 : 그럼 어쨌든 사무국장 재직 시절에 <종로의 기적> 제작이 된 거잖아요. 그래서 그게 우연처럼 보이진 않더라고요.
박기호 : 사실 전 정말 하기 싫었어요. (웃음)
터울 : 왜요? (웃음)
박기호 : 영화를 만들고, 편집하고, 개봉까지 이르는 그 지난한 과정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웃음) 그리고 친구사이 멤버들은 당시에 <종로의 기적>이 굉장히 큰 흥행을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게 아닌 걸 뻔히 아니까. 관객이 10만 들 거다, 그런 꿈을 꾸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아니 이송희일 감독 영화가 만 명 들었다고 대단하다고 하는 판국에, 그것도 그건 극영화인데.
그래서 저는 사실 진행하기 싫었고, 하면서 이혁상 감독과도 많이 싸웠어요. 운영위 안에서 제작 측 입장에서 감독에게 쓴소리를 하는 역할을 주로 제가 했거든요. (웃음)
터울 : 제작을 친구사이가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박기호 : 그래서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됐을 때도 가슴이 조마조마했죠. 물론 부국제에 간 건 이혁상 감독과 연분홍치마의 힘 때문에 갈 수 있었던 거긴 하지만요. 가서 행사를 하더라도 거기에 딸린 실무가 스트레스가 됐었죠.
터울 : 어쨌든 하기 싫으셨다곤 하셨지만 (웃음)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인 것 같아요.
박기호 : 제가 한 건 아니고 당시 박재경 대표가 다 했어요. (웃음)
▲ <친구사이?>(2009).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아, 이 결정에 대한 행정취소 처분을 위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위 포스터는 15세 이상 청소년 관람가 등급으로 조정된 후 2014년 재개봉했을 때의 것이다.
김조광수 감독
터울 : 2000년대 친구사이 영화 관련 활동 중에 김조광수 감독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맘때쯤 친구사이에 다시 들어오셔서 활동하셨던 것 같거든요.
박기호 : 김조광수 감독은 저한테는 친구사이 회원 중의 한명이었고, 그 전엔 영화판에서 몇번 본 사람이었어요. 한국독립영화협회(한독협) 행사 때 두세 번 마주쳤는데, 사실 영화가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웃음) 그 때 당시에 <왕의 남자>(2005)가 천만을 넘겼는데, 영화가 500만 정도를 넘긴 게 아니라 첫 천만 영화였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여러 군데 불려가게 돼요. 한독협에 불려가기도 하고, 문화연대에 불려가기도 하고. 그럴 때 김조광수 감독과 마주쳤는데, <왕의 남자> 관련 토론회를 하면서 2002년에 한국영상미디어교육협회에서 개관한 '미디액트'를 알게 됐고, 친구사이의 게이컬쳐스쿨을 할 때 미디액트에서 몇 개를 진행했었거든요. 어느 날 거기에 김조광수 감독이 보러 오셨더라고요. 그 때부터 친구사이에 활동했던 걸로 기억해요.
터울 : 그 이후로 <소년, 소년을 만나다>(2008), <친구사이?>(2009) 같은 영화가 개봉했었고, <친구사이?>의 경우에는 청소년관람불가 등급판정에 대한 저항활동도 있었는데요.
박기호 : 그 영화들은 김조광수 감독이 친구사이에 들어오면서, 친구사이에서 경험했던 것들이 녹아든 영화였죠. 친구사이 안에서 막 떠들던 이야기들이 종합되어있어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2012)도 우리끼리 농담처럼 주고받던 이야기가 거기에 많이 들어가 있어요.
터울 : 단체 이름과 똑같은 영화가 나온 것도 재밌는데요.
박기호 : 그건 단체 입장에선 이득보단 손해죠. (일동 웃음)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게, 그 전에는 '친구사이' 치면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가 제일 먼저 떴거든요. 이제는 완전 밀렸기 때문에, (웃음) 돈은 좀 벌었을 지는 몰라도 되게 손해같은 느낌이에요. (웃음) 물론 <친구사이?> 영화 때문에 사람들이 친구사이를 많이 알게 된 건 사실이죠. 역전됐잖아요, 전에는 친구사이 때문에 이 영화를 알았다면, 영화를 개봉하고 나니 영화를 보고 친구사이를 알게 된 셈이죠.
▲ 2006년 지보이스 뮤직콘서트 'Santa cums to G-Voice Town' (2006.12.16)
지보이스 정기공연 촬영
터울 : <종로의 기적> 관련해서, 영화에 지보이스가 나오잖아요. 형의 커밍아웃 인터뷰 중에서 "지보이스 단원들은 2009년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진정한 혁명가"라고 언급하셨고, "혁명은 곧 춤"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요.
박기호 : 지보이스가 첫 정기공연을 할 때만 해도 사람들이 다 미쳤다고 했어요, 주변에서. 제1회 공연할 때 50석이었거든요. 다들 50석을 어떻게 채우냐고, 노래를 잘하지도 않아, 맨날 보던 애야, 너네가 하는데 이 돈을 들여서 공연까지 해야해? 욕먹고. (웃음)
그 당시에는 지보이스가 외부 공연을 한 적이 인권콘서트에서 딱 한번밖에 없었어요. 거기서 홍석천, 하리수씨의 코러스로 처리되는 무대였고. 이런 문화공연은 영화제와는 달랐어요. 영화제는 보통 다른 영화제들도 있어서 지지세력도 좀 있었고 했는데, 지보이스가 처음 공연했을 때 자기 시간을 내서 관객이 와줄까 생각했어요. 저는 그래서 친구사이 멤버만 올 줄 알았어요. 그걸 준비하면서, 저도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해줘야 하니까 대관된 공연장에 갔는데, 전 그 50석이 다 차게 될 줄은 몰랐어요.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할 줄도 몰랐고.
저는 그 때 공연을 제대로 못 봤거든요. 영상을 보시면 알겠지만 그 때 스피커 넘어져, 마이크 넘어져, (웃음) 저는 준비하는 스탭이었기 때문에, 더군다나 그 때 공연에 음향 잘 보는 친구를 제가 데려왔어요. 그러다보니 공연 내내 신경이 곤두서있었어요. 재경이가 한번 틀릴 때마다 짜증나, 뭐 하나 엎어질 때마다 짜증나, 나미푸 혼자 잘난 척할 때마다 짜증나, (웃음) 공연 전전날에 나미푸가 바이올린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빌려왔는데, 조율도 잘 안돼있고 소리도 안좋았어요. 끼깅 끼깅 소리나고. (웃음)
그런데 공연 딱 끝나고 나서 종로까지 걸어왔거든요. 그 때 크리스마스 시즌이었고, 걸어오는데 눈이 오는 거예요. 나는 어쨌든 큰 사고 없이 공연을 했으니까 다행이다 생각하고 그 주변에서 술을 먹고 사무실까지 왔거든요. 거기 참여했던 사람 대부분이 따라오고, 1회 공연하면서 했던 노래들을 다같이 부르면서 오는 거예요. 술먹고 정신없으니까. 그게 저는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이런 공연을 제대로 성공시킬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성공시켰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지보이스를 되게 높게 평가했죠.
이 친구들은 그 때, 누가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거든요. 저희가 오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무대에 섰을 때도 당당하게, 첫 무대부터 성공할 지 몰랐기 때문에, 외려 저는 2회 때부터 무대에서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얘기가 나와서 놀라기도 했는데, 1회 때는 정말 그런 게 없었어요. 진짜 용감했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보이스가 혁명가라고 생각해요.
그 이후로 지보이스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이후에 코드지나 다른 곳에서도 그런 욕망들이 표출되었잖아요. 그게 전 지보이스의 힘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먼저 앞에서 이끌어 줬으니까, 다양한 방식으로.
▲ 2008년 제3회 지보이스 정기공연 'Naked' (2008.10.18)
터울 : 영수형 올라갔던 공연이 2008년 'Naked'였는데, 그 때부터 공연을 촬영하셨나요.
박기호 : 촬영은 1회 때부터 다 찍었어요. 편집을 안했을 뿐이지. (웃음) 그 당시만 해도 이런 행사는 무조건 찍는다는 원칙이 있어서, 무조건 찍었어요. 그러다 'Naked' 때부터 처음으로 촬영을 업으로 삼고 있는 친구들을 불렀어요. 그 전에는 자원활동가들더러 여기, 여기에 세워놓고 찍으라는 것밖에 안했거든요. 그냥 카메라를 세워놓기도 하고. 처음으로 'Naked'때부터 방송공연 실황을 녹화하는 시스템을 적용했어요. 그 때 촬영스탭이었던 사람이 한영희 감독, 김일란 감독이었어요. 지금은 이렇게 감독님이 되셨지만 그 때는 감독이 아니었죠. (웃음) 부탁해서 데려오고, 그 때 처음 촬영팀을 모아서 회의도 했어요. 각자 찍을 장면을 의논하고, 그래서 그 때 처음으로 그 팀이 들어왔었어요.
터울 : 지보이스와 카메라의 관계는 유구하군요. (웃음)
박기호 : 처음부터 공연은 기록보존용으로 찍었어요. 그 당시 처음으로 디지털 DV 6mm 캠코더가 나왔어요. 친구사이 10주년 행사 때도 그 때 누가 없었는데, 있었으면 좋았을 걸, 그런 얘기를 많이 해서, 저는 제가 할 때는 웬만하면 행사가 있으면 녹화해두려고 했었어요. 보통 영화 다큐멘터리를 봐도, 말로 때우는 것보다 남은 기록을 담는 게 좋으니까, 그런 의미로 촬영을 꼬박꼬박 했어요.
▲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홈페이지.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사무국 활동
터울 : 지보이스가 주인공인 <위켄즈>(2016) 촬영이 2013년 즈음부터 시작했는데요.
박기호 : 얘기하러 오라고 했는데 저는 안 갔어요. (웃음) 그 지난한 과정을 또 밟는 게 싫었고, 제가 그 때 당시에 친구사이에서 힘들었던 게 있어서 시네마테크협의회 사무국으로 간 거였거든요. 시네마테크협의회도 처음엔 일하러 간 게 아니고, 친구사이 상근을 그만두고 넉 달 후에 원래는 스페인을 가려고 했었어요. 친구가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에 사무국장을 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두 달 간만 극장운영팀으로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두 달을 했는데,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그 친구가 붙잡는 거예요. 극장 운영이라는 것도 해보니까 너무 재밌더라고요. 관객들을 만들고, 극장 운영에 하나하나 필요한 것들을 살피니까 편하고 그래서 조금만 더 하겠다고 했죠. 그리고 몇 달 더 한 뒤에 스페인을 가려고 했는데, 그걸 하다보니까 아예 거기서 일하게 됐죠.
또 그 떄쯤에 서울프라이드영화제 등에서 서울아트시네마 대관요청이 들어왔는데, 제가 담당했던 게 대관업무였거든요. 대관 여부를 제가 결정하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그만두면 대관 금액이 오를 것 같기도 하고, 1년간은 더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1년동안 사무국장이었던 친구가 갑자기 그만뒀어요, 나한테 말도 없이. 그리고 그 다음에 온 사무국장도 1년 정도 하고 갑자기 그만두게 되었고, 이제 당장 보고서도 작성해야 하고 계약서도 써야 되고 하니까, 제가 사무국장을 하겠다고 한 거죠. 그렇게 하다보니까 이렇게 된 거죠.
터울 : 친구사이에서 힘든 일이 있어서 갔다고 하셨는데, 어떤 힘든 일이 있었나요.
박기호 :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성소수자 단체의 첫번째 주업무가 상담이라고 생각해요. 저 때는 상담이 너무너무 많이 들어왔어요. 시도때도 없이 상담이 왔기 때문에 기즈베(현 친구사이 사무국장)에게 넘겨둔 상태였고, 낮에 사무국에 상담이 올 때는 제가 주로 상담을 했어요. 할 때마다 너무 힘들어서 상담이 버거워지기 시작했어요. 상담의 주요 내용이, 초기에는 정체성 문제였다면, 제가 그만둘 즈음에는 범죄 상담이 많았어요. 꽃뱀, 연애 사기, 이런 게 되게 많았었는데, 상담 내용을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유부남 게이에 대한 아웃팅 협박이나, 사우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상담들도 있었어요. 유부남 게이 관련한 건은 친구사이를 통해서 잘 해결되어서, 그분한테는 지금도 1년에 한번씩 전화가 와요.
그렇게 친구사이를 통해 잘 해결되면 문제가 없는데, 제가 가장 상처받았던 상담은, 꽤 높은 사회적 직급을 가지고 재산도 많은 어떤 분이 찾아오셨어요. 연애 사기를 당했는데, 제가 받았던 상담 중에 사기를 당한 액수가 가장 컸어요. 심지어 주변 사람에게도 다 돈을 빌려놓고. 그래서 피해자가 경찰에 고발했는데, 하루만에 잡혔어요. 그런데 그새 그 돈을 전부 도박으로 날린 거예요. 피해를 당한 그 분은 가족과는 인연을 다 끊은 상황이었거든요. 사기범의 사진을 봤더니, 심지어 별로 잘생기지도 않았어. (웃음)
그 사건을 보고 의문이 들었어요. '당신같은 사람이 대체 왜?' 그게 저는 상처가 됐어요. 이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는 게 아니라, 나는 십몇년 동안 이쪽 판에서 일하고 친구사이에서 일하면서 사람들도 많이 오고, 게이커뮤니티도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터울 : 우리의 노력이 딱히 게이커뮤니티에 큰 기여가 없나, 이런 생각이 드셨던 거군요.
박기호 : 그러니까 이 사람들한테는 우리가 어떤 존재로 여겨졌을까, 사건 사고만 처리해주는 단체로 느껴졌을까, 이 사람이 뭔가 좀더 안전한 관계를 요청했으면, 친구사이가 더 안전하다는 걸 몰랐을까, 왜 자기가 1:1로 만나는 게 더 안전하다고 느꼈을까, 온갖 생각이 다 드는 거예요. 대체 그 큰 돈을 어째서 그 사람에게 맡겼을까, 그 안정감은 도대체 무엇에서 느꼈을까, 이 사람은 자기의 모든 걸 보여줬던 건데, 사기를 친 사람도 되게 약삭빠르거나 치밀한 사람도 아니었어요. 그걸 겪으면서 환멸을 느꼈어요. 그걸 버티기가 힘들었어요.
터울 : 그래서 저는 사실 상담하시는 개인의 감수성이 다치는 게 걱정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워낙 흉한 걸 많이 보니까.
박기호 : 저도 그게 많이 걱정돼요. 그 때 저도 그런 상담을 듣고 힘들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막상 그런 문제를 편하게 얘기할 사람도 마땅히 없었어요. 그래서 시네마테크협의회로 가게 된 거였어요. 그 이후로는 한동안 친구사이를 멀리하고 싶었죠. 영화 관련 일에만 매진하고 싶었고.
터울 : 그럼 활동하고 계신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에 대해 소개해주시죠. 시네마테크가 정확히 어떤 뜻인가요?
박기호 : 시네마테크(Cinémathèque)란 '영화의 집'이라는 뜻인데,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서 말하고, 영화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전당이에요. 한국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말인데, 거기서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시네마테크는 전국적으로 9개의 조직이 있고요, 각 도에 하나씩 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아쉽지만 시네마테크 전용관은 서울의 서울아트시네마를 제외하고는 없고, 극장이 있는 데가 3개 단체고, 그곳도 예술영화전용관으로 같이 운영되고 있죠.
지금으로선 외적인 변화와 내적인 변화에 발맞춰 협의회를 어떻게 굴러가게만 하는 것만 해도 되겠다 싶어서, 허겁저겁 버티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원해서 사무국장이 된 게 아니라서,
터울 : 그런데 활동하신 이력들이 다 그런 느낌이셨던 것 같아요. (웃음)
박기호 : 그래도 그 중에 친구사이에서 게이컬쳐스쿨을 했던 때가 제일 재밌었던 것 같아요.
터울 : 사실 게이봉박두도 게이컬쳐스쿨에서 출발했었잖아요.
박기호 : 게이봉박두는 제가 관여 안했어요. 영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서 기즈베에게 넘기고, 초반에 했을 때 저는 판만 깔아줬었죠. 아무튼 그 당시 저는 게이컬쳐스쿨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 <위켄즈>(2016)
<위켄즈>(2016)
터울 : 이 이야기를 쭉 들어보니까, <위켄즈>(2016)가 영화운동, 퀴어영화의 흐름이랑, 친구사이가 가져왔던 문화운동의 방향이랑, 형의 존재랑, 이런 것들이 다 유산이 되어서 하나로 모아진 종합체 같은 느낌이 있거든요.
박기호 : 네, <위켄즈>가 생각보다 너무 잘 나와서, 저도 살짝 흥행에 대해 기대했었거든요. 그런데 워낙 당시 한국의 영화판 상황이 안좋아서,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데 아직도 <위켄즈>를 보면 마음이 힘들어요. 티나 때문에. 티나의 경우에는 조금만 옆에서 말만 잘했어도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어쨌든 <위켄즈>는 영화적으로 의외로 잘 빠졌고, 그래서 기분이 좋아요. 지보이스의 미덕이 잘 드러난, 제가 생각했던 지보이스가 그대로 잘 나왔던 것 같아요.
'영화는 내 인생'
터울 :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활동을 정말 너무 많이 하셨는데요. 퀴어영화와 영화제의 역사를 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나중에 역사서의 각주에 실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웃음) 형의 인생에서 퀴어영화란 어떤 의미인가요?
박기호 : 전 영화가 너무 좋아요. 영화란 제 삶인 것 같아요. 영화를 보면서 뭔가 대리만족할 수도 있고, 영화를 통해서 처음으로 제 성적 정체성을 고민했고, 그걸로 제 욕망도 풀어왔고, 그걸 통해서 제 삶도 꾸려왔기 때문에, 영화는 제 인생이죠. 앞으로도 영화 일을 하고 싶지만, 또 잘 모르죠. 이제 안할 수도 있고. 힘들어서. (웃음)
터울 : 앞으로도 왠지 계속 하실 것 같은데요. (웃음) 이것으로 인터뷰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72호][활동스케치 #4] SeMA 옴니버스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 관람기 (1) : ‘친구사이’를 보는 친구사이, ‘지보이스’를 보는 지보이스
2024-11-04 19:08
기간 : 10월
ㅎㅎ 2006년에 친구사이에서 주최한 "긴급 진단 - 극장가를 장악한 퀴어웨이브" 좌담회도 떠오르네요. 이때도 기호형이 토론자로 참여해주셨었다는! ^^
http://news.hankyung.com/article/2006030139368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2958§ion=sc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