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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94호][기고] 지금, 우리는 베를린 퀴어와 함께할 것이다
2026-09-04 오후 16:28:48
기간 8월 

 

 

[194호][기고]

지금, 우리는 베를린 퀴어와 함께할 것이다

 

 

 

그렇게 불타고도 남은 게 있다니/ 미래는 정말 멋지다/ 너의 말을 들으니 걸어 볼 마음이 생겼다/ 키들키들 웃으며 타고 남은 재를 서로의 얼굴에 묻혔다/ 손과 얼굴이 모두 검게 변했다 발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모두 비슷한 색을 갖고 있었다 -박은지, 「눈을 뜰 수 있다면」, 『여름 상설 공연』, 믿음사, 2021.

 

 

 무덥습니다. 집밖을 나서는 순간 짜증마저 무력해질 정도로 숨 막히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어요. 재난과 다를 바 없는 폭염 속에서 동료들의 안부를 묻습니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1.

양산 없이는 외출이 불가능한 7월을 보내면서, 몇 년 전부터 서울퀴어문화축제(이하 ‘서울퀴퍼’)가 6월에 열리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올해 서울퀴퍼는 개인적으로 조금 특별했는데요. 선글라스를 굳이 쓰지 않고 제 미모를 뽐내며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대형앰프 못지않은 목소리를 보유한터라 선글라스를 착용해도 알아보는 지인들이 더러 있었지만요. 조금 더 솔직한 모습으로 그곳에서 만나는 이들과 밝게 인사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쓰지 않고 서울퀴퍼에 참가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현장에서 직장동료와도 같은 재난참사 활동가들, 그리고 연구자들과 ‘어색한’ 조우를 했습니다. 회의와 술자리를 심심치 않게 가졌어도 서로의 정체성을 밝힌 적은 없었기에 어색했던 것 같아요. 물론 주말의 종로에서처럼 일상에서도 끼 부리는 데는 탁월해서, 어쩌면 그들은 진작 저의 정체성을 눈치 챘을지도 모르지만요. 그들은 자연스레 제 이름을 불렀어요. 그렇다고 “어머, 너도 게이였니?”라고 묻지 않았어요. 그저 수많은 인파속에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고, 만났다는 게 기뻐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무지개로 가득 채워진 거리에 함께 서있었다는 것, 그 만남에서 흐르는 여럿의 감정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이성애/성별이원화가 공고한 세계에서 퀴어가 마음 나눌 일상은 없다는 터울의 말처럼,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나날에는 늘 감당해야하는 낙인이 따릅니다. 보다 안전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본모습을 감추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아웃팅과 혐오에 대응하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할애합니다. 때로는 (성)정체성을 존중한다는 이들에게서 커밍아웃에 대한 기대를 견뎌내기도 하고요. 그래서인지 1년에 하루 열리는 각 지역의 퀴퍼는 LGBTQ 커뮤니티 일원들에게 있어 특별하고 소중한 날입니다. 낙인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는 해방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퀴퍼를 통해 해방에 이르는, 더러는 그것을 초과하는 미래를 다짐합니다.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를 따라 춤추고 노래 부르는 행렬에는, 오늘 이 하루가 언젠가는 일상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성애/성별이원화 질서에 의해 폐제돼버린 퀴어라는 존재는, 퍼레이드를 통해 이 세계에 우리가 존재함을 알리고, ‘살만한 삶(the livable)’을 보장할 것을 촉구합니다.

 

‘살만한 삶’의 촉구는 퀴어라는 존재에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취약성을 지닌 이들의 인간적인 권리를 실현할 것을 요구합니다. 퍼레이드 행렬에는 권리중심 일자리와 이동권을 요구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동지들이 함께하고, 부당해고에 맞서 투쟁하는 세종호텔 노동자들이 함께합니다. 핑크워싱을 집단학살의 무기로 삼는 제국주의자들을 규탄하며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약속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버틀러의 주장처럼, “퀴어(queer)”라는 용어는 “정체성”을 넘어 “연대”를 의미하게 됩니다.

 

 

2.

매해 베를린에서도 퀴어의 권리옹호를 위한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데이(Chistopher Street Day, CSD), 일명 ‘베를린 프라이드(Berlin Pride)’가 열립니다. 독일에서는 1979년 6월 30일 최초로 이 행사를 진행했는데요. CSD는 1969년 스톤월 항쟁을 기리고 애도하기 위해, 항쟁의 발생지인 게이바 스톤월 인(Stonewall Inn)이 위치했던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53번지’에서 축제의 명칭을 가져왔습니다.

 

올해 베를린CSD는 “소신을 갖는 것은 멋져(Haltung ist hot)!”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여기에는 다가오는 베를린 주 의회 선거(2026.9.20)를 앞두고, 민주주의 수호와 성소수자 권리실현을 위해 퀴어주체가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또한 주최측도 밝혔듯이,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지고, 소수자 집단과 그들의 권리에 대한 공격이 늘어나는 시대”에 성소수자는 물론 다른 소수자의 자유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퀴어주체의 권리행사가 필수적임을 강조합니다.

 

올해 베를린CSD는 최초로 이틀간의 일정(2026.7.24.~25)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금요일(24일)에는 저녁 6시부터 독일 통일과 민주주의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각종 예술 공연과 정치집회-<민주주의의 밤>-가 열렸습니다. 토요일(25일)에는 라이프치히 거리에서 시작하여, 나치에 의해 희생당한 동성애자를 추모하는 장소인 ‘놀렌도르프플라츠’를 거쳐, 다시 브란데부르크 문으로 집결하는 퍼레이드가 진행되었습니다. 영상 속에는 베를린을 물들이는 무지갯빛 깃발들과, 무지갯빛도 다 담지 못한 즐거운 표정과 자유로운 몸짓들이 보였습니다. 주최 측은 이번 퍼레이드에 80여대의 퍼레이드 차량이 동원되었고, 약 1백만 명의 인원이 집결했을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사건은 25일 저녁 10시경에 발생했습니다.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2026베를린CSD의 폐막식이 열리고 있던 때입니다. 수많은 인파가 폐막식에 참여하기 위해 티어가르텐 공원을 지나 현장으로 이동하던 중 승합차 한 대가 이들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인파를 향해 마체테(벌목을 위해 사용하는 칼)를 휘두르며 사고현장에서 도주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딸과 함께 베를린CSD를 방문했던 65세 폴란드 여성이 사망했고, 30여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중 3명은 위중한 상태입니다. 베를린CSD행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경찰은 즉각 용의자 검거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26일 오후 6시경에 베를린 서부 슈판다우의 한 정원에서 발견된 용의자는 경찰을 향해 흉기를 들다가 결국 사살되었습니다.

 

 

3.

사건이 발생하자 독일 당국에 의해 용의자에 대한 신상이 공개되었습니다. 그는 레바논계 독일 국적자(21세)로 2025년 IS에 가입하려다가 실패한 전력이 있었습니다. 독일 당국은 이번 혐오범죄를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로 규정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이번 혐오범죄에 대해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약속하며, “잠재적 범죄자에게 이동의 자유를 최대한 제한하기 위한 조치”를 언급했습니다. 독일의 보수정당이자 여당인 기독민주연합(CDU)과 기독사회연합(CSU) 정치인들은 이 사건을 관용과 개방성을 추구하는 독일 사회를 향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도발’이자 ‘선전포고’라며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한편,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이 사건을 정부의 안보·이민정책의 실패로 규정했습니다. AfD는 이슬람주의자에 대한 관용을 중단하라며 사회에 통합되지 않는 독일여권 소지자(국적자)들을 추방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번 혐오범죄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합당한 처벌이 필요한 것과는 달리, ‘이슬람 극단주의’를 겨냥한 보수/극우 정치인들의 발화는 정확히 인종혐오에 기반을 둔 이슬람에 대한 증오선동입니다. 그들은 연일 이슬람 극단주의를 공격하고 있지만, 이번 혐오범죄의 가해자는 2025년 5월에 IS에 합류하려고 시도를 했을 뿐, 스무 해 동안 독일에서 나고 자란 레바논계 ‘독일인’입니다. 가해자가 이슬람에 심취했을 수는 있어도 독일의 문화와 생활여건을 기반으로 자라온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무슬림 공동체 전체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범죄를 부추기지도 않습니다. 퀴어 당사자로 베를린CSD에 참여했던 알렉산더 차베스는 “토요일에 포옹했던 베를린 시민들 중에는 무슬림-퀴어”들이 존재했다며, 이슬람 증오를 선동하는 정치인들에 의해 무슬림-퀴어 동료들이 받을 상처를 우려했습니다.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이 있습니다. 독일의 보수/극우 정치인들의 발화에서는 이번 혐오범죄가 LGBTQ 커뮤니티가 바라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임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한 개인의 범죄를 특정 집단으로 연결시키고, 그 집단을 위험하고 해롭다며 공포를 조장하는 일은 극우정치의 전형입니다. 그리고 LGBTQ 당사자-‘동성애 망국론’, ‘종북 게이’-인 우리에게도 꽤나 익숙한 경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과 1년 전, 무지개 깃발을 ‘서커스 천막’으로 비유하며 연방의회에 무지개 깃발 게양을 반대했던 메르츠 총리와 기독민주당(CDU)의 위선이 새삼 떠오릅니다. 이는 독일의 성소수자 인권단체인 LSVD⁺가 이번 혐오범죄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며, 독일당국에게 성소수자 공동체 보호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라고 촉구한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극단주의는 종교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태생’과도 무관합니다. 누군가를 짓밟을 때만이 살아남는 신자유주의 체제-능력·성과·경쟁주의-는 타자와 대화하고 타자의 고통에 호흡하는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불평등한 정치·사회적 조건과 혼자라는 고립감, 그리고 경쟁에서 낙오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공존의 가능성을 차단합니다. 그렇게 차별과 배제, 혐오를 정념으로 삼는 극단주의가 자라납니다. 이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서바이벌의 주체로 뛰고 있는 우리 스스로에게도,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배타성과 혐오를 마주해야하는 과제를 안겨줍니다.

 

그래서 극단주의 세력을 분리하고 척결하는 것만으로 베를린에서 벌어진-멀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혐오와 폭력을 중단할 수는 없습니다. 안전을 확보하는 것과 다르게 분리와 척결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퀴어가 거리에 출현하기 위해, 단 하루라도 마음껏 축제를 즐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극단주의 세력의 폭력성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공존과 돌봄의 실천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차별받고 배제당한 존재들이 서로를 위해 우애와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물기어린 무지갯빛이 망자와 퀴어 공동체를 애도하고 있습니다. 슬픔을 추스르기 위해 서로의 어깨를 다독이는 이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인종 학살을 규탄하고,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외치며, 트랜스젠더를 지지하자고 주장하는 퀴어해방 실천가들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나의 취약성이 다른 취약성에 얽혀야 한다는 이 윤리적 강령이, 극우와 극단의 세계에서 우리를 애도하고, 살아남게 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희생된 분의 안식과 명복을 빌며. 베를린 퀴어들과 시민들, 그리고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연대의 마음을 보냅니다.

 

 

베를린 사진.jpg

사진출처: ADVOCATE, Massimo Di Nonno/Getty. 2026.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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