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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0호][커버스토리 'ILGA ASIA 2019' #4] 아시아 각국의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성소수자 난민의 인권 상황
기간 8월 

[커버스토리 'ILGA ASIA 2019' #4]

아시아 각국의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성소수자 난민의 인권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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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8월 21일 오전 9시 30분에 열린 일가 아시아 컨퍼런스의 개회식.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KSCRC) 캔디님과 함께 사회를 담당했다.

 

 

 

ILGA 아시아 지역 컨퍼런스 참관기:
아시아 각국의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성소수자 난민의 인권 상황

 


친구사이와 무지개행동 덕분에 ILGA(국제 성소수자 연합) 아시아 지역 컨퍼런스에 장학금까지 받으며 참관할 수 있게 돼서 매우 고마웠다. 물론 단체 이름은 예전부터 들어봤지만, 국제 성소수자 회의에 참석해본 적이 없는 처지에 드물게 한국에서 열리는 만큼, 하나라도 더 듣고 배우려고 했다. 다만 본격적인 활동가가 아닌데다가 평소에 국내외 상황을 잘 알거나 운동과 연구의 성과를 열심히 따라가는 편은 못 되기 때문에, 더 준비된 상태에서 참석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남는다. 또한 개인 일정 때문에 회의를 많이 참관하지 못한 점도 아쉽다.

 

물론 중요하고 꼭 필요하지만, 전체 회의에서 다루는 개별 국가를 뛰어넘는 여러 사안은 ‘아시아’라는 지역만큼이나 광범위해서 오히려 특정 주제를 구체적으로 다루는 분과 회의에 더 관심이 갔다. 기왕이면 한국 활동가들이 주최하지 않거나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 사안을 다루며 다른 친구 사이 회원들이 참관하지 않는 회의를 고르려고 했는데, 그 중 트랜스젠더, 인터섹스(간성), 그리고 난민 관련 회의가 기억에 남았다. 특히 인터섹스는 어쩌다 보니 관련 회의에 두 번 참석했는데, 덕분에 제한된 시간 안에 조금이나마 ‘심화 학습’을 할 수 있었던 것같다. 분과 회의는 주최측이 발표나 소개를 한 뒤에 청중과 질의 응답을 벌이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자연스럽게 난상 토론이 돼버려서 다소 두서는 없었지만 다양한 경험과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아래에서는 사안별로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소개하면서 소감도 곁들이도록 한다

 

 

 

1. 아시아 각국의 트랜스젠더 인권 상황

 

트랜스젠더 관련 회의는 동아시아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는 태국의 카투이(kathoey)나 남아시아의 히즈라(hijra)처럼 ‘남성’과 ‘여성’을 초월하거나 그 사이에 놓이는 소위 ‘제 3의 성’이라는 범주가 이 지역에는 전통적으로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처럼 문화적인 개념이 없다는 점은 오해와 편견의 가능성과 정도가 더 높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 활동가인 사회자는 그 밖에도 유독 동아시아에서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어려움을 나열했는데, 지역의 특수성을 놓치지 않으며 미처 생각 못한 점을 짚어줘서 중요하고 의미 있었다. 이는 1) 비가시성, 2) 언어 등 간접 폭력 노출, 3) 성 노동자의 인권 운동 비참여, 4) 커뮤니티의 온라인 중심성, 5) 당사자 정체성의 다양성, 6) 강한 가족 유대감, 7) 법적·의료적 절차의 시급성이다. 또한 한국을 중심으로 트랜스젠더 배제 급진 여성주의(TERF), 그리고 동아시아 곳곳의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 트랜스젠더 무시·차별도 논의됐다. 

 

성별 이분법, 즉 익숙한 범주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명칭과 정의가 사회마다 조금씩 다른 점도 인상적이었다. 외부 시선의 이런 혼란과 복잡성 탓인지, 트랜스젠더들의 자기 정의와 태도도—‘남성’ 또는 ‘여성’처럼 보이거나 아예 성별 확정 수술(SRS, 소위 ‘성 전환 수술’)을 받아서 사회에 순탄하게 섞여 들어가자는 ‘현실적’이면서 순응적인 입장, 여성주의에 대한 찬반, 기존에 알려진 ‘트랜스젠더’를 높이 쳐주고 ‘젠더퀴어’ 등 새로 대두된 탈이분법적 정체성을 낮춰 보거나 아예 배제하는 입장 등—예상 외로 다양하고 비일관적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관점은 결국 트랜스젠더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정책과 태도에서 비롯되는데, 가령 성별 이분법을 유일한 ‘표준’으로 전제하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모든 경우를 병리화하는 중국에서는 소위 ‘성 주체성 장애(GID)’ 진단 → 성별 확정 수술 → 법적 성별 변경이 분명한 하나의 과정으로 정해져 있다. 따라서 현지 트랜스젠더 남성들도 종종 수술을 마치 종양 제거 수술처럼 당연시하며, 수술 이전의 삶이나 자기의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일시적’이거나 ‘임시적’인 상태로만 본다고 한다. 더구나 규범으로부터의 이탈이나 제도권에 대한 이견이 금기시되고 위험한 상황이다 보니, 정치적 의미에서의 트랜스젠더 정체성과 운동은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기피 대상이 되며, 수술 후 ‘정상’이 된 트랜스젠더 남성들은 종종 비수술 트랜스젠더를 포함하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과 거리를 둔다는 것이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트랜스젠더들은 대개 성소수자 혐오 세력에게 동성애자·양성애자들보다는 덜 주목 받고 공격 당하기도 한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일단 비가시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패싱(passing)에 성공하는 경우 중국의 ‘정상화’ 정책에서처럼—가령 트랜스젠더라도 겉모습이 머리 모양, 옷, 화장, 장신구나 수술을 통해 확실하게 ‘남성’이나 ‘여성’처럼 보이면—체제에 흡수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앞서 언급한 ‘젠더퀴어’ 등 새로 대두되는 여러 탈이분법적 정체성은 청(소)년 등 젊은 층에게서 두드러지는데, 이 점과 관련해 서구 이론과 운동의 영향도 논의됐다. 한국만 해도 ‘치마씨’/‘바지씨’, ‘마짜’/‘때짜’처럼 토착적인 성소수자 용어가 있었지만 이제는 영어 용어를 그대로 쓰는데, 세계화 때문에 원래 없었거나 미처 생각 못한 개념이 도입되는 것은 사고를 넓히고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좋지만, 서구와는 경험과 여건이 엄연히 다른 여러 지역의 특수성이 간과되고 가려질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특히 인권 운동에 전념하는 활동가와 연구자들은 서구의 최신 동향에 민감하고 또 필요하면 이를 도입하게 마련인데, 종종 학술적이며 어려운 용어와 개념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 자칫 ‘엘리트주의’로 오해 받거나 거리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한편 아시아 등 제3세계의 성소수자 개인과 운동 모두 서구에 빚진 것이 많은 만큼, 트랜스젠더 배제 급진 여성주의자들과 성소수자 혐오 세력도 ‘국제화’돼서 이론과 방법을 서구에서 수입할 뿐 아니라 연대도 이룬다는 점도 언급됐다. 남아시아와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트랜스젠더 성 노동자들이 인권 운동에 소극적인 이유로 성 노동의 불법화가 지적됐는데, 사회적 낙인과 함께 처벌 등 실질적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시화도 연대도 어렵다고 한다. 물론 이는 역으로 애초에 트랜스젠더 등 성별 정체성이 탈이분법적인 사람들을 차별해서 취업 등 사회 생활을 극히 어렵게 하는 제도, 그리고 (대개 시스젠더 이성애자인)남성의 성 매수는 용인하면서도 그 수요 때문에 생겨난 성 노동자는 천시하는 이중적인 태도 탓이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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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 지역 간성의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Intersex Asia의 팜플렛.

 

 

 

2. 아시아 각국의 인터섹스 인권 상황

 

인터섹스는 (종종 탈이분법적인)성별 정체성이 관건이고 의학적 정의와 절차가 연관된다는 점에서 트랜스젠더와 공통점이 있으며, 또한 개인적으로 가장 모르기 때문에 관련 회의를 참관하게 됐다. 

 

인터섹스란 소위 ‘모호한’ 외부 생식기 또는 생식선(성선), 호르몬, 염색체의 소위 ‘이상’ 때문에 ‘남성’이나 ‘여성’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경우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중 인터섹스의 특징으로서 가장 잘 알려진 외부 생식기의 ‘모호함’만 해도 매우 다양하고, 인터섹스 또는 성징도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처럼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스펙트럼(연속체)으로 봐야 한다는 사회자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아래 내용은 당일 발표된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외부 생식기가 ‘불분명’하거나 하나 이상인 인터섹스는 대개 법적 보호자의 동의 아래 생식기를 ‘남성’과 ‘여성’ 중 한 쪽으로 고정하는 수술을 영유아기에 받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처럼 당사자의 인식도 동의도 없는 상태에서 아주 어릴 때 수술을 받을 뿐 아니라 가족도 이에 대해 계속 함구하기 때문에, 자기의 인터섹스 정체성을 어른이 되고서야, 그것도 우연히 알게 되기 십상이라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있는 1차 성징을 이처럼 강제로 ‘교정’ 받을 뿐 아니라 그 사실이 은폐된다는 점에서 영유아 인터섹스에 대한 조치는 윤리적으로도, 의료적으로도 문제이다. 이런 수술이 나중에 건강상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당사자가 자라면서 어린 시절에 강요된 신체적 성별(그리고 그것에 지정되는 정신적 특징)에 혹시나 불일치를 느끼고 고통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령 의사가 수술의 난이도 등에 따라 임의로 ‘여성’이라는 성별을 고르고 지정하더라도, 정작 인터섹스의 신체는 그 후 사춘기를 거치며 자연히 ‘남성’으로 발달할 수 있다. 설령 수술을 하더라도 인터섹스에게 2차 성징이 나타나고 성인의 신체에 가까워지는 시기에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고 정신적·신체적 후유증의 발생 가능성도 낮은데, 너무도 이른 시기에 일방적으로 성별을 결정해 오히려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의료인과 가족에 의한 강제 수술과 은폐 탓에 인터섹스는 자기 정체성을 모른 채 철저히 비가시화돼 비슷한 사람들을 못 만나게 됨으로써 무지와 고립에 처하기 십상이다. 이는 특히 자기의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에 대해 고민하는 경우에 피해가 막심한데, 다양한 성소수자 집단 중 어느 곳에도 소속감을 못 느낀 채 오랫동안 방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가 소위 ‘정상’으로 타고 난 신체적 성별(그리고 사회가 이것에 지정하는 정신적 특징)에 불일치를 느낀다면, 인터섹스는 소위 ‘비정상’으로 타고 난 신체적 성별을 자기도 모른 채 ‘교정’당하며, 그 결과로서 일방적으로 지정된 신체적 성별(그리고 사회가 이것에 지정하는 정신적 특징)에 불일치를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인터섹스는 심지어 트랜스젠더보다도 비가시화되고 고립되며 정보도 부족해, 커뮤니티를 이루고 인권 운동의 전면에 나서기가 매우 어렵다. 이런 여러 차이 때문에 가령 네팔과 필리핀에는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로 이뤄지는 ‘LGBT’와는 별개로 인터섹스 정체성과 운동을 주장하는 입장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 모두 자기 결정권이 부정되기는 마찬가지인데, 이는 물론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정의하고, 일련의 신체적 특징에 특정 성별(그리고 이에 따른다는 특정 정신적 특징)을 지정하며, 이런 정의와 분류에서 벗어나는 모든 경우를 ‘비정상’으로 낙인 찍고 ‘교정’하려는 사회 때문이다. 또한 특정한 신체 형태나 상태를 ‘표준’으로 전제하며 여기에서 벗어나는 모든 경우를 ‘미달’로 보고 의료적으로 ‘보완’하려 한다는 점에서 인터섹스와 장애인에 대한 ‘전통적’ 또는 ‘보수적’인 의학적 태도가 비슷하다고 하겠다. 

 

이런 차별과 인권 침해를 없애려면 일단 인터섹스 영유아에 대한 수술을 즉각 금지하고 신체적 온전성을 보장해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하고 인간의 다양성을 긍정해야 하는데, 이 때 의료인뿐 아니라—가령 아시아에서처럼 인터섹스 자녀를 ‘전생의 업보’나 ‘가문의 수치’로 보고 거부하기까지 하는—가족의 교육이 필수적이다. 물론 애초에 상황과 동기는 다를 수 있지만, 결국 외부 생식기를 소위 ‘남성’ 또는 ‘여성’에 맞추는 수술을 안 받은 인터섹스는 역시나 수술을 안 받은 트랜스젠더, 젠더퀴어 등 정체성이 탈이분법적인 다양한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다. 문제는 이처럼 사회가 (소위 ‘보편적’이라는 신체적 특징을 토대로)정의하는 ‘추상적’ 성별과 당사자의 (신체가 실제로 띠며 개인마다 상이할 수 있는)‘구체적’ 성별 또는 ‘객관적’인 신체적 성별과 ‘주관적’인 성별 정체성이 다를 때—특히 신체 노출이 부분적으로라도 불가피한 화장실과 목욕탕 등—사회의 모든 시설이 ‘정상주의’에 토대를 두는 성별 이분법을 따라 운영되기 때문에, 이런 ‘규범 위반자’들은 갈 곳이 없어지며 일반 대중은 겉보기에 성별이 ‘모호한’ 사람들에게 몹시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매우 어렵지만, 제도와 인식 모두 갈아엎어야만 인터섹스 등 정체성이 탈이분법적인 사람들도 남들과 똑같이 권리를 누릴 수 있다.

 

 

3. 아시아 각국의 성소수자 난민 인권 상황

 

난민(망명자 포함)은 매우 특수하면서도 국제적인 사안이라고 하겠다. 성격상 당연히 개별 국가를 넘어설 뿐 아니라, 발생·수용의 여부와 정도가 지역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유럽 연합같은 예외도 있지만, 세계가 개별 국가를 기본 단위로 하기 때문에 영토, 국적, 시민권 등 각국과 그 국민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난민에 대한 대응이 판이할 수밖에 없다는—즉 개별 국가의 배타적 이권이 보편적 인권이나 인도주의를 종종 압도한다는—점이 상황을 악화시킨다. 이번 난민 세션을 통해 알게 된 각국의 난민 인권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령 중국 정부에 의한 북한 이탈 주민의 북송처럼 강제 송환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참관한 회의에서 주로 다룬 태국에서는 난민이 수용소에 30년 동안 방치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즉 핍박 때문에 고국으로 못 돌아가는 것은 물론, 유엔 난민 협약 미가입국인 태국이 난민 인정도 안 해주고 시민권도 안 주기 때문에 수용소에서 한 걸음이라도 나가면 모든 사회 생활이 불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장기 수용 중 수용소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부모와 달리 자동으로 무국적자가 된다. 보다 못한 태국의 일반 시민들이 개인적인 숙식 제공과 모금 등으로 난민을 후원·구제하는 지경이다. 

 

난민이 성소수자인 경우에는 어려움이 더 큰데, 가령 동남아에는 서양 식민지 시절에 만들어진 성소수자 처벌법이 남아 있는 경우가 적잖다. 이 경우, 애초에 고국에서도 핍박 때문에 난민이 될 수 있고 중간 기착국에서도 핍박 때문에 거부되거나 방치될 수 있다는 점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난민의 지위 인정과 정착 허용에 극히 인색한 한국에서도 일어나듯, 성소수자 난민들은 함께 고국을 떠나온 사람들의 편견이나 차별, 그리고 중간 기착국의 편견이나 차별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즉 자기가 단순 밀항자가 아니라 ‘정당한’ 난민일 뿐 아니라 성소수자라는 점 모두 ‘증명’해야 하며, 동시에 고립되지 않고 생활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 가족 등 함께 있는 동포들에게는 이 점을 숨겨야 하는 것이다. 

 

HIV 감염인이나 성 노동자의 경우, 거부와 핍박의 위험이 더 큰 것은 자명하다. 더구나 성소수자는 종종 난민 관련 국제 법과 기구에서도 고려되지 않아, 훨씬 더 취약하다. 또한 성소수자 인권 단체들은 난민 사안에 미숙하고 난민 인권 단체들은 성소수자 사안에 미숙해서, 이처럼 정체성이 이중적인 사람들은 적절한 지원을 받기가 어렵다. 국가가 국민을 인권과 시민권의 주체가 아니라 납세, 병역 등의 수단으로 보며 국민의 안전과 복리보다는 국가 자체의 안전과 이득을 중시하는 경우, 국외자인 난민은 더더욱 ‘귀찮고 부담스러운’ 존재이기 십상이다. 종종 인종·민족, 문화, 종교 등에서 낯설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고 내놔야 한다는 점에서 난민은 일반 국민에게도 달갑잖을 수 있다. 규모도 크고 다양한 당사자들의 이해 관계도 복잡하게 얽혀서 매우 어려운 사안이지만, 결국 국가란 절대선도 아니고 인위적인 제도일 뿐이니 국적을 넘는 이해와 포용이 실현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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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시아' 내부의 위계 사고하기 

 

물론 이번 대회는 가령 순전히 학술적이거나 이론적인 회의와는 성격상 다를 수밖에 없고, 활동가, 연구자, 교육자 등이 각국의 인권 상황을 보고하고 경험을 공유하며 해결책을 찾고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특히 아시아처럼 문화적·역사적 배경도 다양하고 각국의 경제 수준과 제도 구비 정도도 판이한 경우에는 범지역적인 이론화와 운동이 얼마나 가능하고 실효성 있는지 궁금하다. 실제로 분과 회의가 종종 그랬듯, 오히려 ‘동아시아’, ‘남아시아’ 등 공통점 많은 하위 지역별로 논의하고 활동하는 것이 적어도 뿌리 깊거나 시급한 문제에 대처하는 데는 더 효과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적잖은 ILGA 회의 참가자는 개발 도상국에서 활동하는데, 만약 해당 지역의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지원·후원을 기대하기 힘들 뿐 아니라 일반 국민도 종종 관심이나 이해 정도가 낮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으며 성소수자 인권 단체들이 늘 인력난과 재정난에 시달린다면, 운동은 얼마나 어려우며 대책은 어떤 것이 가능할까. 한편 한국처럼 어중간하게 ‘부자’이고 ‘민주적’인 나라는 그 나름대로 조금 다른 어려움이 있지 않나 싶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여럿이 뭉칠수록 힘이 생기고 파급 효과가 커지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ILGA처럼 자원이 풍부하고 영향력이 커서 고맙게도 이번 대회같은 행사를 조직하고 장학금까지 줄 수 있는 큰 국제 단체가 아니라, 풀뿌리 차원에서 활동하는 각국의 작은 단체들은 어떻게 현지에서 무사히 ‘자력 갱생’할 뿐 아니라 국경을 넘어 서로 힘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행사 참석자 모두 서로 지지하는 마음은 하나일 텐데, 특히 공통점도 적고 거리도 먼데다 자원마저 부족한 활동가와 단체들은 어떻게 시사점과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을까. 물론 이런 여러 의문은 개인적인 무지와 조급함에서 비롯되며, 인권 운동에 전념해온 활동가와 연구자들은 다행히 생각도 다르겠고 대책도 있겠지만, 나처럼 뒤에서 지지하고 제한된 시간과 능력 안에서 돕는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질문은 남는다.

 

이슬람권 성소수자 관련 회의는 관심이 있었지만, 몹시 아쉽게도 그만 놓치고 말았다. 개별 국가에 따라서는 전쟁이나 근본주의 종교 세력의 탄압 등 제약이 많기 때문에 서아시아 지역은 활동도 연락도 상당히 어려우며, 이번 회의에도 일부 참가 예정자가 결국 못 오게 됐다고 한다.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주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령 작년 제주도 예멘 난민 사태 때 터져나온 일반 국민의 혐오를 생각하면 한국에서도 이슬람(권)에 대한 이해가 절실한데, 부디 현지 사정도 나아지고 국제 연대도 강화되길 빈다. 

 

또한 몇몇 장애인 활동가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성소수자 장애인 관련 메인 세션이 없었던 점이 다소 뜻밖이고 궁금했다. 장애는 다른 여러 특성과 더불어 교차적으로 또는 다중적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기 때문에 필수적인데다가 다른 많은 사안과 마찬가지로 인식뿐 아니라 재정과 제도가 뒷받침돼야 해서 복잡하고, 개별 국가를 뛰어넘는 대응이 더 효과적일 수 있는 만큼, 앞으로 ILGA 회의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낼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다. 그리고 여러 필요성과 제약 때문에 어렵겠지만, 분과 회의가 지금보다도 많아지고 다양해지면 더 좋겠다. 

 

미안하지만 낯가림도 많이 하고 바쁜 탓에 각국 활동가들과 소통하지 않았고 부대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다른 친구사이 회원들은 적극적으로 임하고 결실을 맺었으리라 믿는다. 끝으로 소중한 기회를 준 친구사이와 무지개행동, 그리고 큰 국제 행사를 준비하고 운영하느라 고생 많이 하신 모든 분께 깊이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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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사이 정회원 / 대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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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