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이빠이 쳐먹은 채 새벽에 올라탄 귀향길 고속버스에서 표딱지를 펼쳐보니 1번이었다. 노친네도 아닌데 왠 1번? 신경질이 났다. 다행히 빈 자리 있어, 대충 숨어들 수 있었다.
아, 제발 밀리지만 말게 하소서 하고 삼신할미께 삼세 번 기도를 올리고 올라탄 귀경 고속버스, 세상에 이번엔 27번 끝번이었다.
고속버스 맨 끝자리, 나까지 네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1. 호두과자 봉지를 들고 있는 어떤 아버지는 그 짧은 귀경길에서 딸과 못내 헤어진 게 아쉬운지 앞자락에 앉은 딸내미를 연신 할끔이느라 정신이 없다.
2. 나에겐 강박증이 하나 있는데, 요즘 젊은 애들이 입는 맨들거리는 캐쥬얼 양복과 높은 구두코, 옆구리에 낑궈 넣는 끼 가방에 대한 편견이 그것이다. 약간 통통한 젊은 애가 어울리지도 않게 그런 차림으로 앉아, 다짜고짜 전화에 대고 여자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야 시발 년아 너 어디냐?"
말하는 본새 봐, 개새끼.
3. 제목도 긴 싸구려 장편 소설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30대 후반의 남자. 예의도 없게, 계속 울려대는 핸드폰 신호음이 '벨' 소리로 되어 있다. 싸구려 장편 소설을 읽는 놈들에 대한 편견도 오늘 하나 생겼다. 타인에 대한 예의를 거저 먹는 놈들.
난 이 남자 세 명에 '낑긴 채' 이미 말끔 휘발된 고속버스 사건에 대한 아련한 기대감을 포기하고, 책 따위도 덮어버린 채 왜 내가 오늘 귀경하고 있을까 하고 쓰잘데기 없는 공상을 붙들고 있었다.
아무런 사건도 없고, 아무런 기대감도 없는, 느릿느릿 거북이 걸음의 귀경길 고속버스 맨 끝자리에 앉아 무심코 버스 반동에 맞춰 몸을 흔들어대던 나는 꼭, 안단테로 흔들리는 정물이었다.
p.s
집에 돌아와 보니, 2년 만에 낯선 자의 침입이 있었다.
주인집에서 들어온 모양이다. 수도가 꽁꽁 얼어 있고, 보일러가 켜져 있다. 불마저 켜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