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화점> 뜨는데 레즈비언 영화는 왜 없지?
출처 : <쌍화점> 뜨는데 레즈비언 영화는 왜 없지? - 오마이뉴스
동성애 영화로 곱씹어 본 문화의 위기
김현준 (nbpurple)
개봉한 지 한참 지났으니 이쯤해서 물을 때도 되었군요. 한국 영화에 상상력이 존재할까요? <쌍화점>의 흥행을 보며 묻고 싶습니다. 픽션과 결합시킨 왕의 동성애가 뭘 어쨌다는 걸까요? 사실 이 작품은 <왕의 남자>와는 반대로 어마어마한 스크린에 개봉하여 관객몰이를 했습니다.
15세 이상 관람가인 <왕의 남자>가 당시 190개 정도에 불과한 스크린에 걸렸지만 연소자 관람불가인 <쌍화점>은 개봉 초기에 무려 650개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했죠. 대한민국 스크린 3분의 1입니다. 그 저력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결국 <로드 무비> <왕의 남자> <후회하지 않아> 같은 작품들이 어렵게 닦아 놓은 길을 초호화 캐스팅의 대작 기획영화가 따라간 겁니다.
더군다나 이 영화는 <브로크백 마운틴>과 <색, 계>가 개봉한 이후 상당 부분 비슷한 면을 보이며 상영시간을 채웠습니다. 때문에 <쌍화점> 같은 부류의 영화들을 보면 저는 '흥행했으니 잘됐다'라는 생각보다는 깊은 절망과 한계를 느낍니다. 수위 높은 베드신과 남자간의 사랑. 왜 이미 화제가 됐거나 흥행한 외국 작품들과 비슷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
아마도 투입된 제작비가 많으니 관객이 극장에 얼마나 들지를 고려해야겠고, 결국 수치로 입증된 유명한 기존 작품들을 참고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만.
야오이 열광, <록키 호러 픽쳐 쇼>부터 <데스 노트>까지
그런데 이미 트랜드는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관객의 주요 타깃인 20대 초·중반 여성들이 한창 즐기던 문화가 '야오이(남자간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나 만화)'였다는 점만 들춰봐도 말이죠. 실제로 <쌍화점>에서는 왕과 호위 무사의 사랑 장면을 통해 수많은 야오이 코믹스물의 전형들을 보게 됩니다. '밥 먹여주기', '도닥거리기', '여자처럼 애원하기'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네요.
따지고 보면 지금의 야오이는 마니아들의 문화, 그 이상인 것 같습니다. 컬트영화의 신화로 유명한 예인 <록키 호러 픽쳐 쇼>의 남자 주인공은 란제리를 입은 크로스 드레서로 나오지만 극소수 마니아만이 작품을 봤었죠. 그런데 지금은 대중문화 컨텐츠의 모든 것이 야오이로 둔갑합니다. <데스 노트>나 <디지몬> 같은 작품들도 이미 야오이로 변형돼 소비되고 있죠. 심지어 지난 대선에서 이회창, 이명박 후보까지도 패러디될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대중이 패러디를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전적 인지가 있을 때에나 가능한 것인데 놀랍게도 야오이가 등장한 겁니다.
검색만 하면 무수히 떠오르는 야오이 소설과 만화들은 이미 마니아들의 공유물이 아닙니다.
따라서 영화가 역사에 상상력을 덧칠했다지만 이미 기성 히트상품들의 모방 이상으로 의미를 찾기는 힘들다고 느껴집니다. 더군다나 비슷한 영화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것도 근 5년 사이에 말이죠.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창작 기준에서 '새로운 것을 발굴해라' '최근 5년 동안 개봉한 작품들과 차별화를 둬라' 따위의 지침들. 이제는 빛이 바랜 걸까 씁쓸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엉뚱한 질문.
왜 '대작 레즈비언 영화'는 안 나올까요?
우리는 여기서 동성애 코드가 아직도 기피대상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쌍화점>의 흥행을 위해 발판을 마련한 무수한 화제작들은 남자들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죠. 일반적으로 동성애를 보는 시각은 자신과 생물학적 성이 다른 이성의 경우 좀 더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더군요. 야오이만 해도 그렇습니다.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한 야오이 문화가 남자들의 사랑을 다뤘지만 소위 백합물, 그러니까 레즈비언의 사랑을 다룬 만화나 소설들은 그만큼 공유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동성애 코드가 대중적 지지를 형성했다는 것보다는 여성들 특유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색다른 로맨스 욕망을 충족시킨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야오이 문화가 한창일 땐 이것을 소위 '여성 전용 포르노'라고 비하하던 적도 있거든요.
여성 전용이라는 말 속엔 순정 만화적인 감성과 아름다운 그림체가 포함되지만 남자들끼리의 노골적인 성애 장면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포르노라는 극단적인 명칭까지 붙게 된 것입니다. 남자 관객이 '야동'을 보면서 여성의 몸에 시선을 두고 심지어 레즈비언의 행위까지 소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관점이었죠.
만일 동성애 코드가 기피 대상이 아니라면 영화의 주 타깃인 여성들이 레즈비언 소재의 작품에도 열광하며 차이를 극복하는 발전을 이뤘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작품성과 재미를 겸비한 사라 워터스의 레즈비언 소설 <핑거 스미스>나 <티핑 더 벨벳> 같은 영화도 안 본 여자들이 수두룩합니다. 심지어 여성 영화제에서 상영된 <사랑하는 애너벨>같은 작품들도 말입니다.
아무래도 여성들 사이에서는 아직까지도 동성애를 보는 편견과 거부감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해야 타당할 겁니다. <쌍화점>을 본 여자 관객들이 왜 '엉덩이' 이야기로 꽃을 피웠겠어요.
그런데 잠깐만요. 실제로 우리나라 역사엔 레즈비언 왕세자비가 존재합니다. 바로 세종대왕의 며느리입니다. 세자빈 봉씨라고 기록된 그 여인은 소쌍이라는 시녀와 사랑하는 사이였고 이것이 발각되어 폐위되기에 이르죠. 게다가 궁에서 추방되자 가문의 수치라고 여긴 아버지에 의해 목 졸려 살해당했습니다. 이렇게 드라마틱하고 비극적인 실화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왜 안 만들고 있을까요?
남자들이 역사를 주도하는 문화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 그 가운데서도 더욱 소외된 삶을 살아야 했던 레즈비언의 역사를 조명해서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사회적 차별과 편견들에 일침을 가할 좋은 소재인데 말입니다.
문화의 위기를 반성해야 할 때
그러한 작품이 만들어지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 타깃인 여성 관객층이 동성애라는 사랑의 종류에 전근대적 거부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작비를 회수하고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들춰보며 작품성보다 관객 수를 헤아리는 지금의 풍토에서는 불가능하단 말이죠. 때문에 <쌍화점> 같은 소위 '안전빵' 기획 영화가 나오는 겁니다.
이런 모습은 결과적으로 상상력을 통해 이전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력을 저해하며 한국영화의 위기만 부채질할 겁니다. 트랜드에 영합하는 태도와 모방성이 창조적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될까요? 누군가는 어차피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면서 항변할지도 모릅니다. 글쎄요. 수많은 발명과 예술 작품으로 인류의 발전에 공헌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제일 경멸했던 말이군요.
<쌍화점>의 흥행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아직까지도 배타적인 보수성과 전근대적 사고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아닌 것처럼 동성애 코드를 내세워 포장했기에 관객들이 몰린 것이죠. 이것은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의 위기이며 몰락의 신호입니다. 차별적 편견과 모방성에 바탕을 뒀을지언정 안전해 보이는 트랜드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세와 도전 정신을 품은 상상력이 힘을 잃은 풍토가 지배적이라면 발전보다는 퇴보가 올 것입니다. 흥행했으니 한국영화의 선전이라면서 좋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