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좌파 평론의 페리 앤더슨은 언젠가 작은 소책자에서 지식인의 세 가지 유형을 묘파해낸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 공산당을 둘러싼 제반의 역학관계가 그 그림의 핵심이었지요. '당내에선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을 기술한 알튀세르처럼 묵묵히 공산당을 지지하다가도 안에서 당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비판해나가는 지식인 유형, 급진적인 마오주의자들처럼 프랑스 공산당을 박차고 나가서 새롭게 다른 대안을 구성하는 지식인 유형, 그리고 세 번째로 사르트르처럼 당 바깥에서 끊임없이 공산당을 괴롭히고 비판하는 유형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허나 이들이 각기 당과의 관계맺음은 다르더라도 한 가지 공통점은 가지고 있었지요. 바로 사르트르가 말하는 '참여적 지식인'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겁니다. 사르트르의 참여적 지식인은 무엇입니까? 바로 대중들을 현혹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까대고, 민중들의 '상식' 안에서 요동치는 헤게모니의 역학 관계를 재구성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유기적 지식인, 바로 그것이 지식인으로서의 본령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지식인의 펜끝은 사회적 문제에 앙가주망해야 하며 민중들의 직접적 삶과 괴리되어선 안 된다는 가르침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참여적 지식인을 자처하는 분들에겐 자기 반성의 나침반으로 기능해야 할 것입니다.
허나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속하거나 민중을 배반하는 지식인들이 존재합니다. 참여정부라는 간판 밑에다 이름 새겨넣는다고 자신을 '참여하는 지식인'으로 착각하는 과대망상의 글쟁이들이 존재합니다. 청와대 인터넷에다 글 몇 줄 올려놓고 마치 앙드레 말로인 척 온갖 허세를 떠는 가여운 족속들이 존재합니다. 보수 야당조차 개혁적이지 못하다고 갈굼을 해대는 여당과 대통령이 배설하는 온갖 거짓말들을 미사여구로 꾸며대는 수사 세공 기술자들이 존재합니다. 바로 이들이 '이데올로그들'이며, 참여를 참칭하되 가장 반참여적인 권력자의 파수견들인 겁니다.
오늘 신문을 보니 청와대 홈페이지가 서프라이즈에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올라왔더군요. 참으로 가관입니다. 부활절도 다 지났는데, 부활하소서, 영생불사하소서 하는 열혈 신도들의 기도문이 여전히 낭송되는가 하면, 총선 이후 이렇다할 민생 정책도 내놓지 못한 주제에 대기업들의 경제 난국론만 척결하면 서민들 삶이 좋아질 거라 주장하는 덜 떨어진 자칭 경제학도들의 노란 머리띠가 펄럭이고 있더군요.
아직도 이들은 한나라당과 보수 꼴통들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 매트릭스 세계의 세뇌자들이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자신을 현실세계에 앙가주망하는 지식인으로 착각하는 과대망상증 환자들입니다. 끊임없이 가상의 적을 만들어서 자신들을 투사인 척 위장해야만 존재론적 안정을 보존하는 가련한 존재들인 셈이죠. 그래서 이들은 울진 시민들이 지진으로 떨고 있는 사이에도 샥스핀과 포도주를 마시며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청와대 만찬장의 요상한 꼴라쥬 장면을 투사들의 이미지로 덮어씌우는데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들도 '참여'가 무엇인지 압니다. 불의가 무엇이고, 글쟁이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이들은 민중의 직접적 삶으로부터 괴리된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노빠와 노무현 대통령이 공히 함께 취하는 포지션이 바로 '엄살'입니다.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을지도 몰라요, 제발 표를 꿔주세요. 조선일보는 정치 집단이에요. 지금 경제가 어려운 게 아니에요. 파병요, 현실 외교 해야죠, 미국이 때리면 아파요! 바로 요런 수사들을 가능케 하는 정치적 포지션이 '엄살'이며, 이들의 '엄살'은 곧 자신을 참여하는 지식인, 참여하는 시민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위장전술인 것입니다.
참여정부에 기생하는 이데올로그들의 오늘날 키워드는 바로 '꾀병'인 게죠. 다들, 삭스핀은 맛있었나요?
p.s
오늘 우연히 기사를 읽고 화가 나서리...
기냥 밥 하다 시간 나서, 대충 써서리 모 정치 웹사이트에 익명으로 띄웠네요.
날 덥네요. 선풍기를 꺼냈다는.... 다들 땀띠들 조심하시라요. 물론 커플들은 땀디 열라 많이들 나시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