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와 남성성-박형지·설혜심|아카넷
‘강인하고 활동적이며 경제적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사회적·정치적 발전을 위해 공공영역에서 일하는 남성. 조용히 남을 배려하고 집안일을 관장하며 남편과 부모, 자식을 보살피는 여성.’
이같은 성역할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시대와 장소마다 다른 배경이 가능하겠지만 영문학(박형지 연세대 영문과 교수)과 영국사(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를 전공한 저자들은 제국주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19세기 영국에서 젠더의 관념이 형성된 과정을 추적한다.
우선 영국 제국주의가 가장 기승을 부렸던 19세기 중반, 전형적인 영국의 남성상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의 꽃이었던 인도에서 세포이반란(1857~1859)이 일어나자 영국은 이전까지의 간접통치를 직접통치로 바꾸는 등 지배체제를 강화한다. 이 무렵 전형적인 영국 남성상은 ‘꼭 다문 입술’ ‘스포츠로 단련된 육체’ ‘신사적 행정가’ 등으로 표현되는 강인하고 엄격하며 가부장적인 남성이다.
그렇다면 이런 전형은 19세기 내내 마찬가지였을까. 그렇지 않다. 빅토리아 여왕의 60년 통치(1837~1901) 직전, 조지 4세는 옷과 여자에 관심이 많은 무력한 왕이었는데 섭정시대라 불리던 당시의 멋쟁이를 ‘댄디’라고 불렀다. 낭만주의 시인들이 주로 그려낸 19세기 초의 남성은 자신을 성찰하고 관조하는 태도를 지닌 여성화된 사색가로서 행동이나 생산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편 19세기 말이 되면 화려하고 귀족적이었던 섭정시대의 멋쟁이와 빅토리아 중기의 강인한 신사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퇴폐적인 양상이 나타난다. 문필가 오스카 와일드가 대표하는 세기말적 유미주의는 동성애 성향과 화려한 의상을 표방하며 엄격한 남성성의 전통을 거부하고 엄밀한 성역할의 구분에 반기를 든다.
불과 한 세기 동안 벌어진 남성성의 극적인 변화를 놓고 저자들이 하고자 하는 주장은 남성성이란 본질이 아니라 일종의 역할극(수행, performance)이라는 것이다. 남성성의 형성과 변모는 여성과 제국주의라는 관점에서 또다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남성성은 여성성과 대타적으로 형성된다. 그래서 ‘강인한 신사’의 반대편에는 ‘집안의 천사’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 여성상이 등장한다. 거꾸로 본국의 남성들이 퇴폐로 치닫는 동안 영국 여성들은 관리의 아내로서, 선교사로서, 여행자와 작가로서 제국경영에 적극 참여해 1899년 무렵에는 식민지에서 활동하는 여성의 수가 남성을 훨씬 능가하게 된다.
위계화된 성역할은 식민지배에 그대로 투영된다. 지배자인 영국은 이성적이고 절제하는 남성으로, 피지배자인 인도는 무절제한 여성의 몸으로 상징된다. 본국에서 ‘집안의 천사’인 여성을 보호하는 영국 남성은 원주민 여성을 대상으로 성적 탐닉을 멈추지 않는다.
저자들은 이처럼 얽혀 있는 젠더와 제국주의의 상관관계를 밝혀내면서 남성과 제국이라는 중심이 늘 여성과 식민지라는 주변부로부터의 영향을 통해 형성, 변모되는 것이라는 해체적 시각을 드러낸다. 또한 ‘강인한 남성’은 ‘천사같은 여성’만큼이나, 제국은 식민지만큼이나 많은 스트레스와 억압에 시달린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한마디로 ‘영국신사’의 위선적 가면 벗기기이다. 집안에서 엄격하고 자상한 아버지가 밖에서는 겁탈을 일삼는 무뢰한이다. 기사도의 품격 뒤에는 약자에 대한 가혹함이 숨어 있다. 지배엘리트의 온상인 퍼블릭 스쿨은 식민지배자를 길러내는 제국의 사관학교다. 이렇게 이중적인 삶을 견뎌야 하는 이들을 가해자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경향신문〈한윤정기자 yjh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