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

42 박에디 : 젠더무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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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를 처음 본 건 2014년 신촌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에서 였다. 부스를 지키고 있던 친구사이 언니들을 보고선 저 멀리서 한달음에 달려와 반가움을 표시하던 그녀. 이후 다양한 활동들 속에서 늘 밝고 넘치는 에너지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어 주고 활력을 불어넣어주던 그녀가 돌연 활동을 정리하고 뉴질랜드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래서 떠나기 전 그녀의 과거부터 미래의 계획까지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Q. 안녕하세요, 에디님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박에디라고 하고 MTF 트랜스젠더이고 호르몬 시작과 함께 조각보 활동을 했으닌깐.. 거의 활동을 시작한 지는 4년차 된 거 같네요. 그리고 이태원에서 살고 있고 청소년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이하 띵동)에서 회원지원팀장, 트랜스젠더인권단체 조각보(이하 조각보)에서는 준비위원, 운영위원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활젠더라 돈 되는건 다하느라고. 여기저기 다녀요. 저는 주로 공연 같은 걸 되게 좋아해서 물론 공연을 잘하는건 아니지만 춤추는 것도 좋아해서 퀴어문화축제나 여러 공연 무대에 종종 올라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제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요청하시는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활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Q. 주로 강연 섭외는 어디서 들어오나요?


사실 강연이라기는 좀 웃기고 제가 청소년 활동을 하니깐 알음알음 저의 주변에 청소년 활동을 하면서 만나는 선생님들, 사회복지학과 교수님과 선생님들이나 요청을 해주세요. 그래서 그냥 가서 이야기하는 거죠. 그게 강연까지는 아닌데 강연비를 주니깐..(웃음)

 

 

# <친구사이>와의 인연



Q. 사실 에디 님이 이전에 여러 매체에서 하신 인터뷰나 기사는 워낙 많아서 저희 인터뷰는 거기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들로 좀 채워보려고 해요. 제가 알기로는 에디님이 처음에 친구사이로 데뷔를 했다고 알고 있어요. 당시의 친구사이 활동이나 이야기들을 해주실 수 있나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제가 07군번이고 1년 전이니 2006년쯤 친구사이에 처음 갔었어요. 그런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저는 저를 게이라고 얘기하고 다닌 적은 없었던 거 같아요.(웃음) 나는 초바텀이라고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그 당시 친구사이를 갔을 때 저는 게이커뮤니티에 있었거든요. 사실 그때 남자르 좋아하지만 당시는 저를 여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그러나 뭔가 몸의 불일치를 느꼈고 혹시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좀 나를 알기 위한 과정으로 그 일 년을 게이커뮤니티에 있었던 거 같아요.


그 일 년 동안 게이 커뮤니티에 있으면서 막바지쯤에 친구사이를 만나게 되고 지보이스 공연도 했거든요. 못 알아보실 거예요 아무리 찾아봐도. 그때 친구사이를 통해서 나온 게 거의 게이커뮤니티에 있을 때 막바지였고 그때 저를 알았죠 나는 그거구나 왜냐면 사람들은 자기 몸에 대해 불일치를 전혀 안 느끼고 다 재밌게 사는데 저는 항상 친구사이에서도 어떤 소속감을 못 느꼈어요. 친구사이의 활동과 사람들이 너무 좋았고 너무 재밌었고. 아직도 기억나는 게 제가 군대 가기 전날에 전에 지보이스의 어떤 분이 피아노 쳐주면서 잘 가 라고 케익도 사주며 송별회를 했는데 너무 감동받아가지고 엄청 울었거든요. 그 정도로 저한테는 소중한 곳이었고 너무 재밌었지만 그래도 이제 좀 뭐가 약간의 불편함은 여전히 있었어요. 결국 내가 있을 곳은 아니구나, 이런 느낌 아 친구사이라는 단체가 싫은 게 아니라 이거 말 잘하셔야 해요(웃음) 단체가 싫은 게 아니라 단체는 너무 좋았는데 여기는 게이인권단체 잖아요 게이.. 그런데 나는 게이가 아닌 느낌이니까. 그리고 그 당시의 분들이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제가 종종 술자리에서 언니들한테 많이 물어 봤었어요. 혹시 자기를 상대방이 어떻게 봐주기를 좋겠냐고 물어봤을 때 언니들이 막 남자“, “당연히 쌔끈한 남자지이런 식으로 뭔가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 알았어요. 아 이 사람들과 나랑은 다르다는 걸 그래서 입대 후 전역하고 나서 확실히 MTF 트랜스젠더로 정체화 하고 살게 된 것 같아요.


Q. 그럼 지보이스 공연은 어떻게 서게 되신 건가요?


사실 그때도 되게 실력도 없었는데 제가 지보이스에 딱 들어갔을 때가 마침 공연을 준비하는 기간이었어요. 그리고 그 전에 뮤직캠프를 갔었는데 저는 친구가 없으니깐 그런 캠프가 있으며 가보고 싶었던 참이어서 같이 갔죠. 그리고 그 뒤로 참여를 했었죠. 사실 공연시즌이었고 저도 노래를 해보고 싶었으니깐, 그냥 끼어들어 간 거죠. 뭔가 솔로를 한다거나 메인 멤버는 아니었어요. 그냥 머리하나 채우는.. 제 기억엔 창덕궁 근처 지금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이 있는 건물 지하에서 열렸던 지보이스 정기공연에 참여 했었어요. 그때 기억나는 분이 재경, 재우, 종걸, 가람, 노르마님이 제게 잘 대해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Q. 친구사이 합창 소모임 지보이스 활동을 하고 군대를 갔다고 했는데, 혹시 그럼 군 입대 당시에 자신이 게이들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군대를 갈 당시에는 게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가려고 결심했던 이유는 일단 군대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남성성들이 장점이 되는 곳이잖아요, 그런 곳에 가서 생활해보면 오히려 내가 모르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을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있었어요. 반면 성별을 바꾼 삶이 힘들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고 또 한편으론 부모님께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을 해봐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군대에 가보니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과 나는 맞지 않았어요. 생활 속 기본적인 정리방법부터 시작해서 생각들 하나하나까지, 기존의 남성세계 안에서 당연시 되는 수상한 질서들이 나와는 너무 맞지 않다는 것을 느꼈어요. 무엇보다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힘든 점들 보다 젠더표현에서의 차이가 너무나 컸고 힘들었어요. 그러다보니 군대라는 조직 안에서 유난히 나의 존재가 눈에 띄게 되더라구요. 그런데 또 그렇다고 사람들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어요. 다들 친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어디에도 소속 될 수 없었어요. 그렇게 답답한 곳에 오랜 시간 있다 보니 나의 몸에 대한 불일치도 커졌고, 앞으로의 날들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죠. 그리고 군복무를 끝내면 당장 수술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어요.


Q. 군대 내에서 에피소드 같은 것이 있어요?


, 기억에 남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제가 복무할 때 부대 내에 싸지방(사이버 지식 정보방)이 생겼는데 보통 다른 부대원들은 게임을 하거나 그러는데 저는 포털사이트에서 트랜지션 의료에 관한 정보들을 검색해서 찾아보다가 그 기록이 남아 들킨 적이 있어요. 선임이 누가 찾아봤냐고 추궁해서 솔직하게 제가 그냥 궁금해서 찾아봤다고 얘기를 하고 넘어 간 적이 있어요.


Q. 불이익 같은 건 없었는지?!


불이익을 당하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사실 그 선임에게도 어렴풋이 저의 정체성과 관련한 커밍아웃 비슷한 것을 했었고 그 선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그렇게 전역을 하고 트랜스젠더로 정체화 한 이후 1년 정도 회사생활을 하고 호주를 다녀와서 조카를 좀 봐주다가 시작된 이태원에서의 독립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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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에서의 시작한 새로운 삶

 


Q. 전역 이후 시작된 독립생활을 왜 이태원에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이태원이라는 곳 자체의 문화적 특수성의 이유도 있지만, 일단 독립을 하려고 마음먹고 보금자리를 보광동으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집값이 쌌고, 당시 저에게 신세계 같은 곳이 이태원이었기 때문이에요. 게이들이 처음 종로나 이태원을 나오게 되면 막 그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오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웃음) 발품을 팔다가 허름한 방 하나를 보았고 내부수리를 해서 지내겠다는 조건으로 보증금 200에 월세 20만 원에 들어갔어요. 당시 그 집엔 아무것도 없었고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죠 나머지 돈으로 중고 세탁기, 텔레비전 하나를 구입했어요. 그것이 제 독립의 시작이었어요.


Q. 이태원에서의 새로운 삶은 힘들진 않았는지? 기억에 남는 일들은?


이태원에서의 독립생활은 사실 동네의 특성상 트랜스젠더나 게이등 성소수자들이 워낙 많다보니 주민들 역시 이질감 없이 트랜스젠더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게 가장 편했어요. 또 주변에 편하게 알고 지내던 언니들도 있어서 힘들었던 점은 크게 없는 것 같아요. 단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런 소수자들이 너무 작은 동네에 밀집되어 살다보니 사생활을 지키기 어려웠던 점이에요. 예를 들어 알고 지내던 트랜스젠더 언니가 어느 날 동네카페에서 어떤 남자랑 데이트를 하는 장면을 봤는데 다음 주엔 같은 카페에서 언니도 지난 주에 봤던 그 남자도 서로 또 다른 상대와 데이트를 하고 있다 던지. 뭐 그런 것들?(웃음)


또 집이 이슬람 사원 근처라 호모힐과 가까워서 가끔 새벽에 친구들이 불러서 놀러 나갈 때나 매일 밤 키우고 있는 개들 산책을 시켜주러 나갈 때, 골목의 후미진 곳에서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처럼 털 달린 화려한 차림의 복장에 선글라스를 끼고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골목을 누비는 크로스드레서 분들을 만나곤 하거든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그 분들을 쳐다보지만 저는 그런 차가운 시선의 날카로움을 알고 있으니 그 분들이 무안하지 않게 그냥 지나치거나 먼저 말을 걸어오면 인사를 하는 편이에요. 그래도 그냥 지나쳐주는 것이 그 분들에게는 패싱이 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으니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Q. 독립 이후 생계는 어떻게 꾸렸어요?


당시 이태원에 있던 한 외국인들이 주로 가는 클럽의 사장님 밑에서 일도 하면서 공연도 배우고 그렇게 1년을 일했어요. 평일엔 영어공부를, 그리고 주말엔 클럽에서 일하고 일이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노는 시간들이 이어졌어요. 그렇게 클럽에서 일을 하던 막바지쯤에 트렌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설립 준비 위원회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부터 활동가의 삶이 시작 된 거예요. 조각보 활동을 이후 커피회사에 취직을 해서 잠시 일하다가 지금의 청소년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으로 오게 되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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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의 연애



Q. 위에서 트랜스젠더 언니들의 데이트 얘기도 잠깐 나왔는데, 에디의 연애는 어땠는지?


사실 연애라고 이야기할만한 것이 손에 꼽을 정도에요. 거의 대부분 짝사랑이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연애는 우선 저에 대해 잘 알고 함께 있거나 같이 밥을 먹었을 때 불편하지 않은 관계, 그리고 서로가 연애의 시작을 선언 하고 동의 후 만나는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저는 두 번의 연애경험이 있는데, 한 번은 1살 연하, 또 한 번은 연상의 오빠를 만난 적이 있어요. 연하의 동생과의 연애는 그리 깊은 관계는 아니었는데. 그 동생은 내가 좀 더 외모적으로 여성스러워지기를 원했어요. 그런데 당시 저는 그 동생을 만날 때는 여성스러운 모습 보다는 좀 더 편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만났거든요. 사실 MTF 트랜스젠더들도 당장 호르몬을 시작 하더라도 성별의 변화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기간들이 있거든요. 물론 어떤 분들은 그러한 적응단계가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는 경우도 있지만.. 저는 호르몬을 시작하고 나서도 적응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 좀 더 여성스러운 것을 원했고. 저는 그런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았죠. 더욱이 그 동생이 자신의 주변인들에게 저를 소개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둘의 관계가 편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고, 서로 각자 바빠지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었어요.


두 번째 연애는 오빠는 게이에 가까운 바이섹슈얼이었어요. 같이 있을 때 표현이 조금 무뚝뚝한 편이었어요. 이런 부분들에 서로가 답답했고 서로를 대하는 방법들이 서툴렀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 만남을 이어가지 못하고 헤어졌어요.


연애를 이어가지 못했던 건, 아마 거기서도 저를 만났던 사람들은 성별이분법을 따졌고 지금도 여전히 쉽게 연애를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인 것 같아요.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화장을 진하게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들이나, 치마를 입지 않는 것을 보고 지적하는 상황들. 남성 동성애자 커뮤니티 안에서도 소위 일틱을 요구하는 것처럼 MTF 트랜스젠더들 사이에서도 여성스러움을 추구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 스스로가 성별이분법을 강화시키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상황들이 더욱 저를 힘들게 했죠.

 


# MTF 트렌스젠더 여성으로서의 고민들



Q. 자연스럽게 연애에서 MTF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서의 고민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스러움을 추구한 적 있어요?


지금도 그래요, 아무리 성별이분법적인 사고와 환경에서 벗어나려 노력하지만 예전부터 성별이분법적 사고를 당연시 하는 커뮤니티 사람들 사이에서 있다 보니. 몸에 익어버린 것들이 있어요. 하루는 제가 너무 놀랐던 적이 있는데 띵동에서 일을 할 때였어요. 그 날 마침 띵동에 청소년 친구들이 온대서 출근 준비를 하고 나가려던 찰나 문득 거울을 봤는데 너무 짙게 화장을 한 저를 발견한 거죠. 이건 무슨 청소년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니라 오빠 만나러 갈 때처럼..(웃음) 그 때 스스로에게 너무 실망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이건 여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에요.


사실 제가 화장을 하는 이유는 저에 대한 만족감도 한 몫을 하지만, 저를 보는 MTF 트랜스젠더 친구들을 위해서 하는 부분도 있거든요. 사실 띵동에서 일을 하면서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을 종종 만나게 되는데 그 청소년들을 만나보면 겉모습으로 굉장히 차별을 많이 받아요. 그러다보니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남성 혹은 여성의 모습을 완벽히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있는 거죠. 자신의 과거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게, 그것이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에게 요구되는 일틱이라 생각해요.


특히 MTF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외신의 MTF 트랜스젠더와 관련된 기사의 악플들 예를 들어 저게 무슨 여자냐?’등 입에 담지 못할 이야기들을 보며 상처를 받아요. 그리고 성별이분법적 외모를 벗어난 것들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괜찮다는 말이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에게는 위로도 안 될 뿐더러 짜증만 나는 이야기인 거예요. 실제로 띵동을 찾아 왔던 MTF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이 처음 저에게 와서 상담을 했을 때 제 외모 지적을 했어요. 마치 완벽한 삶이 있는 것처럼, 그런 삶을 기대하면서 저는 거기에서 도태된 것처럼 얘기했어요. 그 청소년들에게 저의 말은 허울 좋은 소리로 들리는 거죠.


결국 저는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조금이라도 화장을 하게 되고. 종종 저 스스로 이렇게 모순되는 부분들과 부딪히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줘야 할까? 이런 게 힘들었죠. 사실 이 모든 문제는 MTF 트랜스젠더 롤 모델이 없어서 라고 생각해요. 있다고 해도 하리수, 최한빛 같은 방송인들이 전부인 상황인거죠. 특히 MTF 트랜스젠더의 경우 방송인이나 모델을 꿈꾸는 이들이 많이 있어요. 결국 대중은 여자보다 이쁘면 이해받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반성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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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밍아웃



Q. MTF 트랜스젠더로 다양한 매체와 인터뷰도 많이 하시고, 대외적인 행사에도 자주 참여하시면서 오픈리하게 활동하시잖아요. 커밍아웃에 대한 부담이나 책임감 같은 건 있나요?


사실 일종의 부담감일 수도 있는데 늘 저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하는 인터뷰에 응할 때 답변에 제 생각이에요라는 말을 꼭 덧붙이게 되요. 사실 평범한 MTF 트랜스젠더들의 삶이 사회에서 조명된 적이 많이 없다보니 MTF 트랜스젠더에 대한 정보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겐 그것이 전부가 될 수 있으니 인터뷰를 할 때는 늘 긴장하게 되요. 지금도 엄청 긴장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 책임감 보다는 근거 없는 의무감. 의리? 이런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MTF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을 하면서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많이 좋아하는 편이기도 했고 친구가 필요했던 사람이었기도 했고요. 그리고 정체성을 얘기했을 때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는 것도 좋고 또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게 돼서 제일 좋아요.


물론 친하게 지내는 트랜스젠더 언니들 중에서는 남자들을 만날 때 트랜스젠더라고 밝히지 말아라 뭐가 좋다고 이야기를 하냐 이런 얘길 제게 해주기도 해요. 그렇지만 저는 무조건 먼저 말을 하는 편이에요. 그 이유는 첫 번째로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느껴지는 게 싫고 두 번째로 내가 속앓이를 하는 게 싫어요. 들킬 까 걱정하며 상대에겐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싫어요.

 

이처럼 저에게 커밍아웃은 편하게 살 수 있게 하고 삶에 도움도 되요. 그리고 저의 정체성을 통해 주변의 사람들을 가릴 수 있게 되었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계기 인 것 같아요. 그래서 커밍아웃은 제게 오히려 더 이로운 것이죠.



# 가족들과의 관계



Q. 지난 추석 연휴 때. 에디님의 SNS계정에 홀로 차린 제사상 사진을 올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 제사상의 의미가 뭔가요?


(웃음) , 그건 그냥 반 재미로 한건데. 사실 명절에 집에 잘 안 가려고 해요. 저는 창피하지도 않고 부모님을 보는 건 어렵지 않은데 저의 모습을 보고 친척들이 부모님께 뭐라고 해서 괜히 곤란해지실 까봐.. 그렇게 집에 홀로 있으면 문득 내가 죽게 되면 누가 나를 기억해줄까?’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되요. 그리고 분명 저랑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제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제가 죽었을 때 저를 기억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명절에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 상을 차리고 저만의 명절을 보내는 거죠. 저의 반려견 에게도 이 때는 특별히 맛있는 것들을 해서 주고. 미래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Q. 명절이야기가 나오니 가족 이야기를 뺄 수가 없어요. 부모님은 명절에 에디님이 오지 않으면 궁금해 하실 것 같은데, 가족들과 관계는 어때요?


명절에 가족들은 오지 말라는 얘기는 안하는데 제가 안가요, 뭐 위에 언급한 이유도 있고. 사실 아버지는 제가 외국에 간 줄 알고 있기도 했어요. 그래서 웃긴 일이 있었는데 언니가 명절에 집에 갔다가 저한테 줄 명절음식 챙겨서 가려는데 아버지께서 언니한테 음식을 왜 그렇게 많이 싸가냐고 물어보셔서 언니가 에디 주려고 그런다고 대답을 했더니 아버지가 에디 걔 외국갔잖아 라고 대답을 하셨다고(일동 웃음)


사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좀 데면데면한 부분이 있어요. 왕래가 활발하지도 않고 그냥 서로 도움이 필요할 때만 보는 정도? 최근에도 아버지가 또 내야 할 벌금이 생겼는데 언니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사실 결혼을 하고 가족이 꾸린 언니에 비해서 저는 부양할 가족도 없고 제 수술비를 위해 모아놓은 목돈이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언니가 제게 연락을 한 거죠. 결국 벌금을 대신 내어드렸는데 아마 아버지는 제가 벌금을 대신 낸 것도 모르실 거예요.


Q. 혹시 가족들과의 다른 에피소드들이 있나요?


조카 학예회에 갔다가 생긴 일인데요. 사실 아이들 학예회 같은 행사에 부모님의 역할은 자기 아이들 나오면 선물주고 앞에서 박수쳐주고 이런 것들이잖아요. 그런데 마침 조카 학예회 날 언니랑 형부가 너무 바빠서 못가는 상황이라 제가 대신 참석한 적이 있어요. 저는 가족들 중 참석하는 사람이 저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학예회 장에 도착해보니 부모님이 계신 거 에요. 사실 그 때 저는 다른 학부모들한테 꿀리기 싫어서 정말 빡세게 풀 메이크업을 하고 학예회장에 갔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부모님을 만나서 당황했죠. 결국 부모님 옆에 자리를 잡았는데 저를 알아 본 엄마가 웃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저를 못 알아보시고는 정중하게 사돈 쪽에서도 오셨냐며 고맙다고 인사를 꾸벅 했어요. 엄마가 그 장면을 보고서 조카 공연은 뒷전이고 더 크게 웃기 시작했어요. 저는 엄마한테 그만 좀 웃으라고 타박하고. 상황파악을 못한 아버지에게 엄마가 얘 에디라고 알려주자 아빠는 당황하셔서 얼굴 빨개지고. 제가 화장한 것을 아버지는 그날 처음 보셨거든요. 뭐 그런 적이 있었어요(웃음)

 

Q.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어요?


별다른 일 없이, 학예회가 끝나고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같이 고기를 먹고 헤어졌어요. 아버지가 되게 순수하세요. 정말 남한테 피해주는 걸 싫어하시고 제게도 상처 받을까 쓴 소리 없이 그냥 계시는 거죠. 나중에 전해 듣기론 집에 들어가서 어머니에게 에디 걔는 왜 그러고 다니냐고, 그리고 왜 집엔 안 오나며 물으셨대요.


Q. 가족에게 커밍아웃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렇죠, 군대에서 전역 후 어렴풋이 지나가는 말로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는 이야기를 했고다행히 부모님은 저에 대해 심하게 부정하거나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부모님 두 분 다 그다지 신앙심이 깊지 않으셨고, 또 성소수자에 대해 거부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냥 불쌍한 존재들로 생각을 했던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이후로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아직 완벽한 커밍아웃을 한 상태는 아니라는 생각을 해요. 그냥 게이들의 커밍아웃에 비교하자면 부모님은 우리 아들은 여자에 관심이 없다며 둘러대는 정도랄까? 부모님이 나를 설명하는 수위는 그 정도? 아직 커밍아웃이 서로의 관계에서 수면위로 떠올랐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많아요.


그래서 조만간 부모모임에 엄마부터 모시고 갈 계획이에요. 얼마 전 엄마가 전화 와서 너는 왜 엄마에게 연락 한통 안 하냐고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제가 부모님에게 이해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저를 원하면 어머니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처음엔 어머니도 자기만 피해자라는 식으로 얘기를 종종 하시곤 했는데 그럴 때 마다 완강하게 관계를 차단 하다 보니 엄마가 위기를 느끼셨는지 어느 날 전화통화에서 진짜 니가 그러면 떠나 버릴 것 같다라는 얘기를 했어요.


사실 그 얘기를 듣고 많이 슬펐죠. 어머니가 생각하는 트랜스젠더들의 삶은 굉장히 단편적인 것들 뿐 이니까요. 그저 불쌍하고 힘들게 살까봐 걱정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해요.


예전에 집에 한번 갔다 엄마의 친구들을 만나 인사한 적이 있어요, 그 이후에 엄마 친구분이 엄마에게 아니, 그래서 에디는 트랜스야?”라고 물어보셨대요. 사실 엄마를 통해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놀랬어요. 엄마가 나 때문에 주변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겠구나. 그게 조금 두려워요. 아직 내가 집에 가지 못하고 피하게 되는 지점들이 그것인 것 같기도 하구요. 어머니나 아버지와 저 사이의 갈등은 괜찮은 데 저로 인해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비난의 대상이 되는 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래도 커밍아웃 후 가족들에게 도리는 다했어요. 언니네 조카들을 1년 간 봐주기도 했고 부모님께는 명절에 꼬박꼬박 돈 부쳐드리고 언니에게도 예쁜 옷들이 있으면 챙겨주고 그런 것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제 생각인데 커밍아웃을 하고나서 너무 이해받으려고 하는 행동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삶의 비전과 행복한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사실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가족의 인정을 받기 위해 정말 많은 시간들을 투자하는 것을 보거든요. 혹시나 처음부터 가족들이나 부모님의 반대가 너무 완강하면 설득과 이해보다는 우선 좀 거리를 두고 내가 잘 사는 모습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Q. 그래도 현명하게 잘 대처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언니와의 관계는 어떤지?


언니는 너무 편해요. 사실 처음에 언니도 단번에 이해하진 않았지만 제가 살아오면서 과정들을 보고 언니도 제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들을 접하면서 자기 안의 틀을 깼죠. 또 사실 제가 띵동 후원의 밤이나 여러 공적인 행사 자리에 많이 데리고 다니기도 했고요.


그런데 종종 저희 언니가 어디 가서 저를 여동생이라 소개하면 너무 오글거려서 못 견딜 것 같아요. 오랜 시간 남동생이라는 호칭을 듣다가 갑자기 여동생이라 부르니(웃음) 사실 그래서 제 조카와 엄마에게도 저를 그냥 에디라고 부르라고 했거든요. 그리고 언젠가 조카랑 같이 길을 걷는데 앞에 인형뽑기 기계가 있는 거예요, 제가 인형을 제법 뽑거든요 그래서 조카가 저보고 에디 이거 뽑아줘라고 했는데 내가 돈 없어서 안 된다 그랬더니 조카가 그럼 삼촌이라 부른다라고 하는 거예요.(웃음)


언니보다 조카들이 나이 들어가면서 젠더를 인식하고 사회화 되어갈 때가 두려워요. 엄마나 언니와 다르게 조카가 저를 이상하게 바라본다면 너무 상처받을 것 같아요. 사실 트렌지션 할 때도 가장 신경 쓰였던 게 조카였거든요. 저의 모습 때문에 조카가 상처받을 까봐. 그래서 언니에게도 이런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 했었어요. 언니는 제게 벌써 그런 걱정하지 말고 지금 즐겁게 잘 지내라고 나중에도 잘 받아들여 질 거라 얘길 했어요. 제가 정말 조카들을 잘 챙겨주거든요 그런데 하루는 조카가 에디는 몸은 여자인데 목소리는 남자야?”라고 물어보는데 너무 당황스러운거에요. 그런데 사실 그럴 때 당황하면 안되거든요. 그래서 조카에게 내가 이상하냐고 다시 물었더니 조카는 괜찮은데?”라고 답을 하는 거예요. 그때 사실 너무 안도감이 들었어요. 물론 조카와의 관계 사이에서도 어느 시기에 고비가 오겠지만 잘 넘어갈 거라 믿어요. 이런 생각들을 하면 정말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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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가족 열이



Q. 에디에게 또 하나의 가족은 반려견 열이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잖아요. 어떻게 만나게 되었어요?


반려견 열이는 올해 2월에 갑자기 입양하게 되었어요. 당시 우야가 같이 띵동에서 활동하던 한 활동가에게 주인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사실 일단 강아지를 키우는데 돈이 많이 들고, 활동가로서의 급여도 넉넉지 않은 상황이고 더군다나 수술비를 모으고 있던 상황이어서 금전적 부담이 있어서 고민을 했죠. 그리고 사실 제가 예전에 6년 정도 키우던 강아지가 포도를 먹고 죽었는데, 제가 며칠을 고통스러워하며 죽는 장면까지 보고난 이후 반려견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서 이후로 강아지를 기르고 있지 않거든요. 사실 지금도 그 강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그런데 열이를 처음 만난 날 보자마자 키워야겠다는 말이 너무 쉽게 나왔어요. 그리고 열이를 집으로 데려온 거죠. 사실 열이의 이름을 무어라 지을지 많이 고민을 했는데 엄마가 나를 부를 때 제 이름이 온열이라 열아 이렇게 부르거든요. 그래서 이참에 엄마에게 아들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이라고 짓기로 했어요. 제가 뉴질랜드로 가 있는 동안에는 아마 언니에게 맡길 예정이에요. 사실 열이랑 있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많이 찾았어요. 사실 띵동 일을 하면서 청소년 성소수자 내담자들의 힘든 일이나 고민 상담을 지속적으로 하다 보니 그 영향을 받아서 저도 힘들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쉬는 날에는 집에만 있게 되기도 하고.. 그런데 또 집에 혼자 있으면 우울해지곤 하는데 열이가 오고 나서 우울한 것도 덜해졌어요.


물론 열이한테 돈은 들지만 또 장점이라면 열이 때문에 집에 있으면서 나에게 쓸 돈을 절약 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집의 청결에도 신경 쓰게 되고 또 주기적으로 외출을 시켜주어야 하니 나름 운동도 되는 것 같아요.



# ‘띵동조각보



Q. 이제 인터뷰도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는데요, 앞에서 언급했던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의 활동과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에서 활동가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에디에게 이 조각보와 띵동은 어떤 의미인가요?


트랜스젠더는 여전히 소수라 아직 어려운 점이 많아요. 조각보는 준비 위원회 1년 차 때부터 꾸준히 해왔고 지금은 객원 멤버로 빠진 상황이에요. 사실 띵동에서 상임활동가로 전업 활동을 하다 보니 조각보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한 점도 있고요.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이 다른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을 만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 한편으론 조용히 사는 것이 좋다는 인식도 있고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성소수자들도 비슷하겠지만 트랜스젠더들은 그게 조금 더 심한 것 같아요. 그래도 나의 과거를 비추어보며 아쉬웠던 부분들이나 어려움들을 다음 사람들이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제일 커요.


그리고 띵동은 사실 처음에 상임활동가 제안이 들어왔을 때 함께하기 어렵겠다고 이야기를 했었어요. 지 주제도 모르고..(웃음) 제안을 받고 어렸을 때 저 스스로에 대해서 고민하던 시기를 떠올려보았는데 그 시기에 저를 긍정하고 미래에 대해 고민하게 해 줄 좋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제 안에 있는 많은 물음표들에 대해 답을 가질 수 있었을 거라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후 띵동에서 활동하면서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을 많이 만났고 또 그들이 많이 발전하는 모습을 볼 때 예전에 내가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보상받는 느낌을 받곤 해요. 그리고 내가 잘하고 있구나라는 기분을 많이 느껴요. 가장 좋은 건 그런 청소년들을 만난 뿌듯함과 이어진 관계들 그리고 성소수자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 모두가 굉장히 좋은 경험이라 생각해요.



# 새로운 시작



Q. 돌연 활동을 정리하고 워킹 홀리데이로 뉴질랜드에 가시겠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이유나 계획에 있던 일이었나요? 그리고 왜 뉴질랜드인지?


사실 별 다른 이유는 없고 워킹 홀리데이가 가장 자유롭다는 이유에서 선택을 했어요. 사실 저는 여행을 1주일 정도 가는 거면 그냥 가질 않아요. 여행을 가더라도 뻔 한 관광지 말고 단 2주라도 좋으니 현지에서 살아보는 것이 훨씬 와 닿는다고나 해야 할까요?


그리고 여러 나라들 중 뉴질랜드를 선택했던 이유는 뉴질랜드가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법제나 제도들이 잘 되어 있어요. 그래서 직접 그 곳에 가서 트랜스젠더 인권단체들이나 커뮤니티의 활동들을 보고 배워보고 싶기도 하구요. 그리고 제가 오랜 꿈이 세계여행이거든요. 그 꿈을 실현하는 단계 중 하나이기도 하구요.


또 사실 제 삶의 리스트에 활동가는 없던 계획이었어요. 이렇듯 없던 계획에 없던 곳에 있다 보니 원래 내가 생각했던 삶에 미련이 많이 남아 있었기도 했구요. 뉴질랜드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돌아와서 한국에서 다른 일을 한다면 작은 카페를 열고 싶어요. 그렇게 일상 속에서 작게나마 활동하는 것이 나의 역할인 것 같기도 하구요.


Q. 오늘의 인터뷰를 마치며 하고 싶은 말 한 마디 해주신다면?


저는 정체성이 유동적이라고도 생각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행복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많은 MTF 트랜스젠더들이 처음 소속되는 곳은 게이 커뮤니티거든요. 저 역시도 그랬었고 사실 그 속에서 조금 불편하더라도 자신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소화가 되는 부분이 있으니. 그래서 저처럼 뒤늦게 자신의 정체성을 정체화를 하는 과정에 있는 분들께, 만약에 자신의 정체성에 뭔가 불일치를 느끼고 불편함을 느낀다면 트랜스젠더 커뮤니티를 좀 찾아봐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자신을 찾아가는 이런 과정들이 정말 값진 일이라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주변에서도 그런 이들이 있다면 배려하고 선택을 격려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사실 호르몬을 하기 시작하고 나서 예전에 게이커뮤니티에서 만났던 한 친구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친구가 제게 너 뭐 하러 그런 걸 하느냐, 그냥 남자를 만나면 되지..”라는 얘기를 들었던 경험이 있어요. 사실 다른 사람이 제게 그런 얘기를 했으면 크게 상처 받지는 않았을 텐데 같은 성소수자인 친구가 그렇게 얘기를 해서 굉장히 상처 받았었거든요. 어떤 분들은 심지어 배신감을 느낀다는 얘기까지 하더라고요. 그런 태도들은 지양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잘못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사실 이런 것들이 커뮤니티 안에서 바이포비아 트렌스포비아 같은 것들과도 연결이 된다 생각해요 물론, 저도 제 주변에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면 개인적 섭섭함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는 응원을 해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이 커밍아웃 인터뷰를 하면서 저의 활동시작과 끝을 모두 친구사이와 함께 하네요(웃음) 첫 번째 활동으로 친구사이 지보이스를 시작해서 조각보와 띵동의 활동을 마무리하고 이렇게 또 친구사이 커밍아웃 인터뷰로 끝나잖아요. 그리고 과거의 온심이를 기억해주시는 언니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마도 저의 이 오픈리한 활동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준 것은 그 시절의 친구사이 언니들 덕분이라 생각해요. 아무튼 감사하고 영광입니다, 우리 모두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진행/편집 timm,낙타 

사진제공 에디/김민수(기록활동가) 


※ 사진을 제공해주시고 사용을 허락해주신 에디님과 민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인터뷰의 내용과 사진은 에디님과 친구사이의 동의 없이 다른 곳에 게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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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