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을 지지하는 성 소수자 모임이 '출범'했다고 합니다. 어느 분이 다음에 카페를 하나 떡하니 개설하고, 또 그것을 언론에 릴리즈한 모양입니다. 사실, 이건 어떤 데자뷔인 셈.
예전에 대선을 앞두고, 이인제 선거 캠프에서 나왔다며 한 분이 친구사이 사무실을 방문했어요. 요는 이렇습니다. 이인제 캠프에서는 분명히 동성애자들을 지지할 것이다, 동성애자들이 표를 결집해서 이인제를 지지하자.
물론 그 제안은 거절당했지요. 왜냐, 첫째는 대선 같은 요란 법석 시장통 같은 시기가 오면 표 장사치들이 설치는 법인데, 사무실에 방문한 분의 횡설수설로 보아 어떻게 동성애자들의 표를 상징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평소 동성애자 인권에 대해 어떤 이해도 보이지 않았던 정치인 이인제 씨와 그 캠프가 동성애자의 권리를 자신들의 공약이나 강령에 삽입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게지요.
친구사이가 아니라더라도, 이인제 캠프는 분명 그렇게 할 거라는 주장을 하며 화가 난 그 분은 사무실을 나가셨더랬지요. 물론, 대선 당시 이인제 씨는 예상 대로 동성애자의 '동'자도 입밖에 꺼내지 않았습니다.
통상 자본주의의 대의제 선거 제도 속에서, 후보 캠프의 공약이나 정책들은 대개 어떤 정치적 공학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후보 자체의 개인적인 정치적 성향보다는, 후보를 둘러싼 정치 세력과 또 후보에게 표를 몰아줄 잠재적인 유권자의 정치적 성향,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 사회구성체의 정치적 성격에 의해 결정되는 게 다반사지요.
일례를 들어 봅시다. 진보정당이라는 민주노동당의 정책에 동성애자 권리를 명시하는 조항이 들어가 있고, 민주노동당 성 소수자 위원회가 존재하며, 또 이번 퀴어 퍼레이드처럼 민주노동당 대표가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와 친구사이가 함께 벌인 '예쁜 가족 대회'에 수상자로 나올 수 있게 된 건 룩셈부르크 언니 말처럼 하늘에서 똑 떨어진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닙니다. 이런 과정을 만들기 위해 '붉은 이반'을 비롯해 동성애자 단체 각 진영이 꽤나 많은 입품과 발품을 팔아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정치적 성향이 다른 각기 제 정파가 결집되어 있는 민주노동당 내는 아직도 동성애자에 대해 비우호적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민주노동당, 앞으로도 동성애자 문제에 관해 꽤나 많은 설득 과정이 유혈 과정이 존재하게 될 겁니다.
반면 저 개인적으로는 고건 캠프에서 동성애자 문제를 공약이나 강령에 채택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봅니다. 대개 선거 전에는 캠프에서 이런저런한 '표'들에 관해 부풀려 생각하는 버릇이 존재하지만, 이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두 삭제되기 마련이지요. 고건 캠프에서 고건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정치적 성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단 뜻입니다. 적어도 선거에서 동성애자 문제로 이슈를 끌어내려면 '동성간 파트너십'이나 '동성간 결혼' 정도의 큰 아젠더를 제시해서 여론을 흔들어놔야 하는데, 이는 고건 캠프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역풍'으로 변하게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채택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고건이 대선 후보로 나올 경우 공약에 동성애자 문제를 삽입하지 않는다는 것에 저는 500원을 걸겠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모임이 생긴다는 건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외연이 그만큼 확대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 커뮤니티의 가시화에 이런저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할 게고요. 아마도 고건 씨가 대선 전에 중도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들을 결집해서 파워를 과시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생긴 거겠죠. 물론 기존 정당 속으로 고건 씨가 다이빙할 경우 모든 게 물거품으로 그치겠지만 말입니다.
하긴, 미국에서도 동성간 결혼을 죽어도 막겠다는 부시 정권을 '지지하는' 분열 증세의 동성애자들이 더러 있지요.
추신 :
기사에 릴리즈된 보도자료문을 보자 하니, 꽤 거슬리는 문장들이 있더군요. '동성애의 합법화'란 주장을 동성애자 인권 단체에서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합법화는 불법화를 전제하기 마련이고, 군 형법을 제외하고 한국의 법은 동성애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조항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두고 전문 용어로는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고 표현하고, 속된 말로는 '무식'이라고 하는 거지요.
고작 다음 카페 19명 가입을 놓고 성 소수자 400만 운운하는 근거 없는 기개는 높이 산다고 쳐도, 동성애자 인권 단체들의 '동성간 파트너십'과 '동성간 결혼' 요구를 '막무가내식 주장'이라고 폄하하는 저 얼토당치도 않는 치기의 이데올로기는 대체 뭘까요? 차별을 이야기하겠다면서 뭔 차별을 말하려는 걸까요? 하긴 이명박과 박근혜에 비해 고건이 훨씬 더 '도박'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는 분이니 뭔 소리를 못할까 싶긴 하지만 말이에요.
아실까 모르겠지만, 동성애자의 삶과 권리의 문제는 '도박'이 아니라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저축'과 같은 거지요. 도박 너무 좋아하다 보면 패가망신하는 수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