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내 기억 속을 헤매는 어떤 장면이 하나 있는데, 요즘 다시 그 장면이 머릿속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이를 테면, 실질이 거세된, 말만 그럴싸한 정치적 담론과 구호들에 대한 증오가 더욱 구체화된 개인적인 예로 그 장면을 꼽기도 한다.
몇 년 전 홍석천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동성애자 인권 단체 기자회견이 있었는데, 참여연대 느티나무 카페에서 이루어졌더랬다. 우리보다 앞서 민주화운동 인사 어쩌구 하는 기자회견이 열어지고 있었다. 기억이 다소 흐릿하긴 한데, 아마도 민주화 인사를 탄압한다는 등의 정치적 기자회견이었던 것 같다. 머리 희끗한 중년 이상의 사람들인 걸로 보아 7, 80년대 인사들이었던 듯 싶다.
그들이 기자회견을 끝내고, 우리 차례가 되어 좀 서두르고 있는데, 그들 중 몇 명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준비한 기자회견문과 팜플렛 등을 만지며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세상 많아 좋아졌네. 호모들이 설치고 다니고."
그러자 내 옆에 함께 있던 문화연대 측 패널 한 분이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들이랑 무슨 상관인데 그래요?"
그러자 먼저 시비를 건 자칭, 민주화 인사들이 피식거리며 대꾸한다.
"그럼 당신들이 제대로 된 인간들야?"
아마도 누군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기자회견에 앞서 싸움이 일어날 뻔했던 사건이었다. 그냥 잊어버리면 그만인 사건이지만, 아직도 내 머릿속에 이 장면은 계속 떠돌아다니는, 그러니까 겉만 번지르르한 모든 정치적 수사들에 대한 내 개인적 증오를 부추기게 된 어떤 사건으로 각인되어 있다.
아마도 자칭 민주화 운동 인사라는 노친네들의 그 알량한 '민주' 속에는 동성애자들이 끼어들 틈이 없는가 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실질이 확보되지 않은 민주라는 온갖 허상의 담론들, 민족주의 담론들, 국익이나 국가에 대한 온갖 쓰레기 같은 담론들은 결코 동성애자의 시민권 투쟁을 담보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위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런 담론들의 뿌리 속에는 '생물학적 종'에 대한 어떤 종교적 믿음이 접착되어 있다.
동성애자 시민권 투쟁은 이 견고한 생물학주의를 깨는 그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