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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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로봇 2006-05-29 05:4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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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수리 세트장에서였다. 먼지와 싸우면서 열심히 촬영 한 뒤 찾아온 즐거운 점심시간. 언제나 그렇듯 맛없는 밥차의 음식들을 그릇에 꾹꾹 눌러 담은 뒤 식당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허겁지겁 밥숟갈을 입에 쑤셔놓고 있는데, 저 한켠에선가 호모 어쩌구 저쩌구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유하 감독님과 인성이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난 대수롭지 않게 먹던 밥그릇을 싹싹 비워냈다. 세트장 안으로 돌아와 불룩 나온 배를 내밀며 담배 하나 피고 있는데, 녹음 감독님이 내게 다가오더니 대뜸 내게 "너 게이야?" 툭 하고 물으셨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빠져나갈 생각에 머리 속이 불꽃 튀듯 돌아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아니요, 누가 그래요?"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가슴은 터질듯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아닐 줄 알았어." 녹음 감독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는 옆에 같이 있던 스틸 기사님에게  "게이 영화를 찍어서 이상한 소문이 났나봐요." 하며 가식적으로 웃어 보였다. 거짓말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후 나는 남자 스텝들이 나누는 여자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고, 온갖 음담패설로 분위기를 맞춰 나갔다. 그러는 동안 스텝들은 내게 "변태라는 소문이 이었는데 너 아니었구나."라며 하나 둘씩 그 전에 가지고 있던  의심들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난 지방 촬영을 돌면서 여자가 나오는 노래방에 가서 분위기 맞춰 놀아주고, 심지어는 홍등가 길목을 걸으며 여자들의 점수를 매기는 등의 몹쓸 짓거리들을 계속했다.

2.
일을 시작한 이후로 점점 내 자신에게서 '게이'라는 단어가 멀어짐을 느낀다.  점점 나의 정체성이 무성화 되어감에 고통스럽다. 일반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커뮤니티 내에서 당당했던 그 모습들은 어디로 간지 자취를 감춘 뒤 오래고, 나는 점점 스스로를 포비아화 시키고 있는 듯 하다.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속임수가 나를 조각조각 잘라내는 느낌이다. 그와 더불어 내 자신이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것에, 세상이 만들어 논 틀에 자여져 들어간다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퀴어영화 감독'이라는 타이틀은 핸디캡이 된지 오래고, 혹시 '동백꽃' 찍으셨어요? 라고 묻는 영화사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당혹스럽다. 이것들은 어쩌면 '권력'의 문제가 아닐까라는 우스운 생각을 해본다. 몇 달전에 잠깐 만났었던 영화쪽에 있는 분은 이런 말을 하셨다. "영화라는 종합 예술 분야에서 만난 사람들이 가장 호모포빅하다. 가장 개방적이고 자유로와야 할 예술판인데 이해할 수 없다."라고.  뭐 이같은 상황들이 지극히 주관적인 것은 사실이만, 나는 고민스럽다. 내 스스로가 포픽한 사람들을 만들어 가는 것인지 아님 포빅한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를 상실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정말 위태롭다.

3.
모든 일들이 톱니 바퀴 돌아가듯 맞물려 있는 것 같다. 연애에 있어서도 이젠 너무 소극적이 되어 버렸다. 일이 힘듯 탓도 있지만,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귀찮다. 예전에 사랑 밖에 난 몰라를 외치던 환타스틱 소녀는 미아가 되어 버렸고, 이젠 핑크빛 러브러브보다는 모노톤의 안정한 관계가 그립다. 인스턴트식의 연애는 신물이 날 정도로 지겨워 진지 오래고, 누군가를 알아가는 설레임조차 필요치 않다. 지금 상황같아선 하늘에서 나를 잘아는 남자 하나 떨구어 줬으면 한다. "예전엔 얘도 귀엽고 순수했는데.."라고 말했던 기즈베 대표님의 말처럼 이미 나는 나이를 먹어버렸고, 내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사회에의 기이한 적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위태롭다. 알 수 없는 위태로움이 두려움을 양산해 내고, 나는 점점 그것들에 잠식되고 있다.

4.
괜시리 사람들이 그립다. 나란 놈은 굉장히 소극적인 인간이라서 그리움만 가지고 있을 뿐 그것들을 해소할 방법을 모른다. 그래도 그립다. 퀴어문화축제에 함께 하고프나 나는 또다시 고달픈 밥벌이를 해야 한다.

p.s
이번주 씨네21 표지에 인성군이 나왔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참 착한 아이이고, 생각이 많은 소년같은 배우다. 인성군을 좋아하는 언니, 오빠들은 필히 한 권씩~ 더불어 영화 비열한 거리도 많이 사랑해주길.



변태로봇 2006-05-29 오전 06:34

음... 그 영화스텝 아저씨들 생각도 좀 해주지... 핑크로봇의 어설픈 이성애자 연기를 속아주는 척하려면 꽤나 고달플텐데...
그러고보니 핑크로봇님의 이성애연기는 이번이 두번째로군요. 옛날에 퀴어문화축제에 처음 나타났을 때도 이성애자라고 빡빡 우겼다가 며칠 만에 들통났잖우? ㅎㅎ

아, 글구 난 조인성 안 좋아해.

가람 2006-05-30 오전 01:04

바쁘고 이래 저래 힘든 모양이구나. 힘내!

Emen 2006-05-30 오후 14:30

아, 아닌 척하다보면 오히려 포비아로 …오해받죠. 공감합니다. -_-;
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