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홈페이지 (www.kscrc.org) 의 "레인보우 컬럼"에 실린 글입니다. 이 글의 내용은 필자 개인의 견해를 반영할 뿐, 센터의 견해와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 * * * * * * * *
(1)
미 대선에 가려 상대적으로 잘 안 알려졌지만, 지난 2일에는 네브라스카, 아칸소, 미시간, 오레곤, 조지아 등 11개 주 에서 결혼을 남녀 간의 관계로 규정하는 주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동안 미국 내에서 동성혼과 관련한 위헌 소송이 있을 때마다 인용된 주된 근거 중 하나는 각 주 헌법의 평등조항이었습니다. 이 조항에 근거해 일부 판사들이 "동성혼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란 판결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헌법을 개정하여 결혼을 "남녀 간의 관계"로 못 박아 버리면 아무리 친동성애자적인 판사라 해도 그런 판결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미 법률 상으로 "결혼은 남녀 간의 관계"라 정의하고 있는 네브라스카 등이 굳이 개헌을 한 것입니다. 사법적극주의의 나라인 미국인지라, 일개 판사가 일거에 평등조항을 들먹이며 하위 법을 폐기하고 동성혼을 허용할 소지를 아예 없앤 것입니다.
(2)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헌재는 "관습헌법"이란 논리를 동원, 수도이전을 위해서는 헌법개정이 필요하게끔 강제장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문제는 이 관습헌법이란 논리가 동성혼 문제에 너무나 쉽게 적용된다는 겁니다. [주1]
가령 한국민 누군가가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고 칩시다. 그 결과 하급심에서는 운좋게 승소할지 모르지만, 지금 상황을 보자면 자칫 이 문제가 헌법차원의 문제로 비화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가령 한기총 등을 주축으로 한) 반동성애자 진영에서 이 문제를 헌재로 가지고 가 "결혼이 남녀 간의 관계라는 것은 관습헌법"이란 판결을 끌어낼 경우, 동성혼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국회 2/3 동의와 국민투표를 통해 "결혼은 남녀 간 뿐 아니라 동성 간에도 성립가능한 관계다"라는 내용의 개헌을 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설령 국회가 여차저차하여 동성혼을 법제화한다 하더라도, 지금 상황으로는 반동성애자 진영이 이 문제를 헌재로 가지고 가는 것을 막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역시 동성혼을 위해서는 개헌이 필요해지는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이 두 시나리오에 비추어 제가 내리는 일차적 결론은 "관습헌법"이란 법리를 가능한 빨리 폐기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이 학설이 정당한 학설로 살아있는 한, 동성애자계에는 득이 될 것이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절반 이상이 동성애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날은 아직은 먼 미래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 제가 내리는 또 다른 잠정적 결론은 충분한 국민적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동성혼 문제를 섣불리 법원이나 국회로 가지고 갈 경우 큰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부연설명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한 이유 중 하나는 동성혼 문제였습니다. 미국 내에서 동성혼이 사회적 이슈로 크게 등장하면서,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던 소수민족계들 일부가 공화당으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미국 내에서 아프리카계나 히스패닉 등 소수민족은 민주당 성향이 강한 집단입니다. (물론 동성애자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동성혼 문제가 큰 이슈가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 중 종교적인 이유나 문화적인 이유로 호모포비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민주당 대신 공화당을 지지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민주당이 동성애자를 옹호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미국 내에서 "결혼"이란 문화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여서, 민주당이 동성애자의 다른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용인하면서도 동성혼 문제에 이르면 반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또한 동성혼 문제는 이탈가능성이 있었던 공화당 지지자들을 공화당에 묶어두는 역할도 했습니다. "제대로 한 것은 없지만 동성혼은 안 되기 때문에 공화당을 찍는다"는 식으로 말입니다.[주2]
제가 보기에 이번 선거로 인해 미국 동성애자 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고 봅니다. 단순한 "입법의 문제"였던 동성혼이, 보다 까다로운 "개헌의 문제"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퇴보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위에 적었듯) 동성혼 문제를 국회나 특히 법원으로 섣불리 가지고 가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만약 이 문제를 공론해야 할 시기가 온다면 그 접근방식은 "동성결혼" 보다는 "시민결합" 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행정수도이전"일 수 있었던 문제가 보수언론에 의해 "천도"로 부풀려짐으로써 국민의 폭넓은 공감을 얻지 못했고, 그 결과 종내 헌재의 위헌판결이 나왔던 사례 또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회문화적 저항이 심할 수도 있는 "결혼"을 처음부터 추진하는 것 보다는, "결혼"이 아님을 분명히 하며 시민결합을 추진한 뒤, 사회적 저항이 줄어든 후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동성애자인권의 시계를 보다 빨리 전진시키는 방법이라는 생각입니다.[주3]
(4)
끝으로 사족을 덧붙이자면, 저는 동성혼이나 시민결합보다는 취업과 거주이전의 자유 등 다른 기본권 보장을 먼저 추진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주4] 서구에서 동성혼 문제가 진행 중이다 보니 한국 내에서도 (특히 비 동성애자들이) 동성혼을 들먹이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보기에 동성혼 문제는 아직 우리에겐 시급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유를 굳이 대자면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는데, 우선은 동성혼이 우리나라 동성애자 대중에게 아직 절대절명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서구에서 동성혼이 이슈가 된 것은 수 많은 동성애자들이 사실혼 관계를 맺고 아이를 입양하는 등 이미 "가정"을 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동성혼은 단순한 상징적 의미가 아닌 현실적 필요의 성격을 띕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상황이 과연 이러한가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취업평등 등의 이슈가 사회적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동성애 문제에 대한 인식의 기반을 넓히는 방편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결혼보다는 취업 등에서 받는 불이익을 제기하는 것이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 보다 용이하다고 보거니와, 커밍아웃해도 생존권에 위협을 받지 않는 상황이 와야 보다 많은 동성애자들이 커밍아웃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곧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인식의 전환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이유는 결혼이나 결합이 사실 상 "공문서로 커밍아웃하기"를 의미하기 때문에 취업 등의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도입된 동성혼은 유명무실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취업시 주민등록등본을 요구하는 기업이 대부분인 것으로 아는데, 주민등록등본에 동성배우자가 있음이 드러나 취업에 불이익을 받는다면 설령 제도 상으로는 결혼할 수 있더라도 실제로 동성애자들이 결혼하기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주5][주6]
============================
[주1] 故 James Boswell 등 역사학자 일부가 로마시대 등에 동성혼을 인정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우리나라는 동성혼을 관습적으로 인정해 왔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어 보입니다.
[주2] 11월 4일자 뉴욕 타임즈 기사에 의하자면 투표를 마친 사람들을 설문한 결과, 20%가 "도덕적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답변했으며, 이렇게 답변한 사람 중 80%가 부시를 찍었다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이 기사는 또한 지난 2000년 대선에 비해 부시를 지지한 히스패닉 및 여성 표가 늘었다고 말하고도 있습니다.
[주3] 이 "시민결합"의 그릇에 가능한 많은 권리를 담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만, 단 한 가지 욕심내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결혼"이라는 명칭입니다.
[주4] 제가 의미하는 바는 커밍아웃하더라도 취업이나 거주이전 등의 기본권에 침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커밍아웃을 할 경우 퇴사조치를 당하는 것을 용인하는 사회는 동성애자에게 취업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동성애자임을 밝히지 않는 한 차별받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5]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도 학생할인을 받을 수 있도록 "청소년증"이란 것을 만들었지만, 청소년증을 제출하면 재학 중이 아님이 알려져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청소년증을 신청하는 청소년이 매우 적었다는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에 대해서는 한겨레 신문 2004년 2월 17일자 "청소년을 소외시키는 청소년증", 문화일보 2004년 2월 6일자 "실효없는 청소년증 근본적 개선 바람직" 등 참조.
[주6] 현재 미국에서는 "과연 동성혼 문제가 부시의 재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논쟁이 진행 중입니다. 그 논쟁의 대체적인 추이를 보자면 동성애자 단체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반면, 반동성애자 진영 및 공화당 지지자들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상당부분 정치적 고려가 깔린 것으로 보이는데, 반동성애 진영으로서는 "동성애자를 지지해 득될 것이 없음"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 민주당의 동성애자 지지에 마침표를 찍고자 하는 의도가, 친동성애자 진영으로서는 이를 막으려는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이 논쟁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sfgate.com/cgi-bin/article.cgi?file=/chronicle/archive/2004/11/04/MNG3A9LLVI1.DTL
허나 대중의 의식 변화를 기다렸다간 앞으로 얼마가 더 걸릴지 아무도 장담 못하게 될 거라는 조심스런 생각도 드네요.
제도의 변화가 사람의 의식을 바꾸는 경우는 왕왕 보아 왔으니까요.
물론 의식의 변화가 수반된 제도의 변화만큼 바람직한 건 없겠지만요.^^
앞으로도 그곳 소식을 비롯한 좋은 글들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