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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홈페이지 (www.kscrc.org) 의 "레인보우 컬럼"에 실린 글입니다. 이 글의 내용은 필자 개인의 견해를 반영할 뿐, 센터의 견해와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 * * * * * * * *

(1)

미 대선에 가려 상대적으로 잘 안 알려졌지만, 지난 2일에는 네브라스카, 아칸소, 미시간, 오레곤, 조지아 등 11개 주 에서 결혼을 남녀 간의 관계로 규정하는 주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동안 미국 내에서 동성혼과 관련한 위헌 소송이 있을 때마다 인용된 주된 근거 중 하나는 각 주 헌법의 평등조항이었습니다. 이 조항에 근거해 일부 판사들이 "동성혼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란 판결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헌법을 개정하여 결혼을 "남녀 간의 관계"로 못 박아 버리면 아무리 친동성애자적인 판사라 해도 그런 판결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미 법률 상으로 "결혼은 남녀 간의 관계"라 정의하고 있는 네브라스카 등이 굳이 개헌을 한 것입니다. 사법적극주의의 나라인 미국인지라, 일개 판사가 일거에 평등조항을 들먹이며 하위 법을 폐기하고 동성혼을 허용할 소지를 아예 없앤 것입니다.


(2)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헌재는 "관습헌법"이란 논리를 동원, 수도이전을 위해서는 헌법개정이 필요하게끔 강제장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문제는 이 관습헌법이란 논리가 동성혼 문제에 너무나 쉽게 적용된다는 겁니다. [주1]

가령 한국민 누군가가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고 칩시다. 그 결과 하급심에서는 운좋게 승소할지 모르지만, 지금 상황을 보자면 자칫 이 문제가 헌법차원의 문제로 비화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가령 한기총 등을 주축으로 한) 반동성애자 진영에서 이 문제를 헌재로 가지고 가 "결혼이 남녀 간의 관계라는 것은 관습헌법"이란 판결을 끌어낼 경우, 동성혼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국회 2/3 동의와 국민투표를 통해 "결혼은 남녀 간 뿐 아니라 동성 간에도 성립가능한 관계다"라는 내용의 개헌을 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설령 국회가 여차저차하여 동성혼을 법제화한다 하더라도, 지금 상황으로는 반동성애자 진영이 이 문제를 헌재로 가지고 가는 것을 막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역시 동성혼을 위해서는 개헌이 필요해지는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이 두 시나리오에 비추어 제가 내리는 일차적 결론은 "관습헌법"이란 법리를 가능한 빨리 폐기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이 학설이 정당한 학설로 살아있는 한, 동성애자계에는 득이 될 것이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절반 이상이 동성애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날은 아직은 먼 미래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 제가 내리는 또 다른 잠정적 결론은 충분한 국민적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동성혼 문제를 섣불리 법원이나 국회로 가지고 갈 경우 큰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부연설명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한 이유 중 하나는 동성혼 문제였습니다. 미국 내에서 동성혼이 사회적 이슈로 크게 등장하면서,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던 소수민족계들 일부가 공화당으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미국 내에서 아프리카계나 히스패닉 등 소수민족은 민주당 성향이 강한 집단입니다. (물론 동성애자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동성혼 문제가 큰 이슈가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 중 종교적인 이유나 문화적인 이유로 호모포비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민주당 대신 공화당을 지지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민주당이 동성애자를 옹호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미국 내에서 "결혼"이란 문화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여서, 민주당이 동성애자의 다른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용인하면서도 동성혼 문제에 이르면 반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또한 동성혼 문제는 이탈가능성이 있었던 공화당 지지자들을 공화당에 묶어두는 역할도 했습니다. "제대로 한 것은 없지만 동성혼은 안 되기 때문에 공화당을 찍는다"는 식으로 말입니다.[주2]

제가 보기에 이번 선거로 인해 미국 동성애자 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고 봅니다. 단순한 "입법의 문제"였던 동성혼이, 보다 까다로운 "개헌의 문제"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퇴보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위에 적었듯) 동성혼 문제를 국회나 특히 법원으로 섣불리 가지고 가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만약 이 문제를 공론해야 할 시기가 온다면 그 접근방식은 "동성결혼" 보다는 "시민결합" 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행정수도이전"일 수 있었던 문제가 보수언론에 의해 "천도"로 부풀려짐으로써 국민의 폭넓은 공감을 얻지 못했고, 그 결과 종내 헌재의 위헌판결이 나왔던 사례 또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회문화적 저항이 심할 수도 있는 "결혼"을 처음부터 추진하는 것 보다는, "결혼"이 아님을 분명히 하며 시민결합을 추진한 뒤, 사회적 저항이 줄어든 후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동성애자인권의 시계를 보다 빨리 전진시키는 방법이라는 생각입니다.[주3]


(4)

끝으로 사족을 덧붙이자면, 저는 동성혼이나 시민결합보다는 취업과 거주이전의 자유 등 다른 기본권 보장을 먼저 추진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주4] 서구에서 동성혼 문제가 진행 중이다 보니 한국 내에서도 (특히 비 동성애자들이) 동성혼을 들먹이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보기에 동성혼 문제는 아직 우리에겐 시급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유를 굳이 대자면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는데, 우선은 동성혼이 우리나라 동성애자 대중에게 아직 절대절명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서구에서 동성혼이 이슈가 된 것은 수 많은 동성애자들이 사실혼 관계를 맺고 아이를 입양하는 등 이미 "가정"을 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동성혼은 단순한 상징적 의미가 아닌 현실적 필요의 성격을 띕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상황이 과연 이러한가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취업평등 등의 이슈가 사회적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동성애 문제에 대한 인식의 기반을 넓히는 방편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결혼보다는 취업 등에서 받는 불이익을 제기하는 것이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 보다 용이하다고 보거니와, 커밍아웃해도 생존권에 위협을 받지 않는 상황이 와야 보다 많은 동성애자들이 커밍아웃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곧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인식의 전환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이유는 결혼이나 결합이 사실 상 "공문서로 커밍아웃하기"를 의미하기 때문에 취업 등의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도입된 동성혼은 유명무실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취업시 주민등록등본을 요구하는 기업이 대부분인 것으로 아는데, 주민등록등본에 동성배우자가 있음이 드러나 취업에 불이익을 받는다면 설령 제도 상으로는 결혼할 수 있더라도 실제로 동성애자들이 결혼하기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주5][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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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故 James Boswell 등 역사학자 일부가 로마시대 등에 동성혼을 인정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우리나라는 동성혼을 관습적으로 인정해 왔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어 보입니다.

[주2] 11월 4일자 뉴욕 타임즈 기사에 의하자면 투표를 마친 사람들을 설문한 결과, 20%가 "도덕적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답변했으며, 이렇게 답변한 사람 중 80%가 부시를 찍었다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이 기사는 또한 지난 2000년 대선에 비해 부시를 지지한 히스패닉 및 여성 표가 늘었다고 말하고도 있습니다.

[주3] 이 "시민결합"의 그릇에 가능한 많은 권리를 담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만, 단 한 가지 욕심내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결혼"이라는 명칭입니다.

[주4] 제가 의미하는 바는 커밍아웃하더라도 취업이나 거주이전 등의 기본권에 침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커밍아웃을 할 경우 퇴사조치를 당하는 것을 용인하는 사회는 동성애자에게 취업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동성애자임을 밝히지 않는 한 차별받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5]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도 학생할인을 받을 수 있도록 "청소년증"이란 것을 만들었지만, 청소년증을 제출하면 재학 중이 아님이 알려져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청소년증을 신청하는 청소년이 매우 적었다는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에 대해서는 한겨레 신문 2004년 2월 17일자 "청소년을 소외시키는 청소년증", 문화일보 2004년 2월 6일자 "실효없는 청소년증 근본적 개선 바람직" 등 참조.

[주6] 현재 미국에서는 "과연 동성혼 문제가 부시의 재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논쟁이 진행 중입니다. 그 논쟁의 대체적인 추이를 보자면 동성애자 단체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반면, 반동성애자 진영 및 공화당 지지자들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상당부분 정치적 고려가 깔린 것으로 보이는데, 반동성애 진영으로서는 "동성애자를 지지해 득될 것이 없음"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 민주당의 동성애자 지지에 마침표를 찍고자 하는 의도가, 친동성애자 진영으로서는 이를 막으려는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이 논쟁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sfgate.com/cgi-bin/article.cgi?file=/chronicle/archive/2004/11/04/MNG3A9LLVI1.DTL

라이카 2004-11-05 오후 21:55

글 잘 읽었습니다.^^
허나 대중의 의식 변화를 기다렸다간 앞으로 얼마가 더 걸릴지 아무도 장담 못하게 될 거라는 조심스런 생각도 드네요.
제도의 변화가 사람의 의식을 바꾸는 경우는 왕왕 보아 왔으니까요.
물론 의식의 변화가 수반된 제도의 변화만큼 바람직한 건 없겠지만요.^^

앞으로도 그곳 소식을 비롯한 좋은 글들 부탁드립니다.^^

송신상훈 2004-11-05 오후 22:24

오해가 있군요. 제 주장은 제도의 변화를 추구하되 지금은 동성혼이 아니라 취업 등의 차별철폐를 법제화에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아가 동성혼을 추구할 수 있는 시기가 되더라도 예민한 문제일 수 있는 "결혼"보다는 "결합"을 추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구요.) 나아가 "관습헌법"을 폐기해야 한다고도 말했습니다. 이 중 그 어느 것도 "대중의 의식변화를 기다"리는 식으로 얻어지진 않습니다. 모두 쟁취해야 할 제도변화의 대상입니다.

모던보이 2004-11-06 오전 03:52

동성애자의 취업 등의 차별 문제를 금지화하는 18가지 종합차별금지법이 지난 9월부터 국가인권위원회에 의해 추진 중입니다. 소위 '동성애자 차별금지법'이라 통상 칭해지는 백화점식 인권법이, 동성애자 인권진영의 자생적인 힘이나 진보정당과의 연대를 통해 진행되는 게 아니라 국가인권위원회라는 (준)국가기관에 의해 입법화되는 특이성은 지니되, 지난 시기 국가인권위원회 창설에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기여한 바나 지금까지 지속적인 협력 체계를 가지고 있는 바, 만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추진 중인 종합차별금지법이 입법화된다면 그것 자체로 충분히 유의미한 일임에 분명할 것입니다. 동성애자와 관련한 민노당 공약에도 차별금지법 항목이 들어 있는 걸로 아는데, 위의 종합차별금지법이 입법화된다면 굳이 따로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신중한 자세가 필요할 듯.

일전에도 언급한 기억이 있는데, 동성애자들이 실제의 삶에서 결혼, 양육 등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것처럼 취업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커밍아웃에 대해 느끼는 각자의 리크스가 과연 취업 등의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줄어들까요? 공/사의 분리된 정도가 서양과 한국이 다른 것처럼, 가족주의가 훨씬 완강한 한국에서의 커밍아웃에 대한 부담감은 취업 등의 생존권을 훨씬 상회한다고 보입니다.

또 이번에 헌재가 우리에게 선사한 코메디인 관습헌법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다름 없겠죠. 동성혼에 대한 관습이 없듯이, 시빌 유니언에 대한 관습은 우리 사회에 없습니다. 외려 '시민결합'에 대한 우리 사회의 낯섦은 보다 강도가 높은 편이겠죠. 상훈 씨도 잘 알겠지만 시민결합이 어디 동성애자들의 특허 권한으로 인해 시작된 제도입니까? 동거 문화의 만연, 결혼에 대한 사회의 인식 변화 등 사적인 친밀성에 대한 역사적 변화를 함축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이 제도가 성공적으로 논외되고 있는 거개의 나라들에서 동성애자들의 시민결합 요구 투쟁은 결코 외롭지 않은 싸움이었지요. 현재 한국에서 시민결합에 대한 논의는 일천한 상황입니다. 국민연금이나 의료보험 등을 거론하는 정치적 장에 어디 동성애자를 비롯한 소수자의 발언들이 제대로 의제로 설정된 적이 있었던가요? 시민결합은 결국 가족에 대한 이해의 변화를 동반하는 문제인데, 미혼모 가정, 이성애자 동거 가정 등 기존에 존재하는 다른 형식의 제반 결합 형식 등과 더불어 동성애자 시민결합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전제되어야 할 겝니다. 물론, 해괴한 관습헌법의 폐기는 동성혼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수많은 논란을 야기함으로 당연히 이뤄져야겠지요.

그럼에도 전 시민결합을 동성혼 문제보다 더 선차적으로 진행하자는 상훈 씨의 말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다만, '결혼'보다 '시민결합'에 보다 우호적인 미국 시민들이 강고한 결혼 순결주의가 실은 거꾸로 보면, 동성애자들의 결혼 합법화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주어졌다는 겁니다.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 아해들과 일반 시민들의 입장으로 봐서는 '시민결합'까지는 어떻게 깜냥으로나마 간신히 봐주겠는데 '결혼'까지는 도저히 꼴을 못 보겠다는 거지요. 이것도 그간 동성애자들이 시민결합보다 결혼 문제를 앞세워 주장했기 때문에 얻어낸 거겠지만 '동냥 밥그릇' 같은 느낌 때문에 그리 달가운 것만은 아닙니다.

만일 한국에서 동성애자들의 시민결합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면 미국적 역설도 피해가고, 가장 근원적으로는 이성애적 결혼 제도를 모사하는 것이 과연 훌륭하고 반짝거리는 짓거리인지 함께 성찰해봐야겠죠. 동성혼이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시민결합을 주장하자는 수동적인 방식이 아니라 왜 우리가 결혼해야 하는지를 되짚으며, 호모들은 달라도 뭐가 달라요 하는 소리를 들으며 섹시하게 다른 삶의 모델들을 주장하는 그런 운동 방식으로서 '시민결합'이 '동성혼'보다 조금 더 나은 상상력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굳이 선차 문제를 따진다면 시민결합을 앞세우고 싶은 게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의견 부탁 드립니다.

피에쑤.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고 내용도 좋아서, 이 글을 웹진 메인에 걸까 하다가 이미 다른 곳에 올려져 있다길래 그러지 못하는 점 양해 바랍니다.

송신상훈 2004-11-06 오전 10:03

길게 논쟁을 벌일 일도 아니고 하니 각 주제에 대한 제 의견을 가능한 간략히 적도록 하겠습니다.

(1) 종합차별금지법 관련: 다행한 일입니다.

(2) 가족주의 관련: 한국의 가족주의는 양날의 칼입니다. 커밍아웃을 힘들게 만들기도 하지만, 일단 성공적으로 커밍아웃을 한다면 자신의 가족을 확실한 우군으로 만들어 주게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저는 이 맥락에서 가족주의를 끄집어 낼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제 주장은 "커밍아웃을 막는 가장 큰 주범은 취업차별이다"가 아니라 "제도화 노력의 우선순위는 결혼이 아니라 차별금지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의 끈끈한 가족주의의 병폐를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습니다만, 그런 방안을 제시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취업 상 등의 차별이 없어지면 상대적으로 커밍아웃이 쉬워진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3) 시민결합 관련: 프랑스의 팍스법은 예외이겠습니다만, 그 외의 "시민결합"은 동성애자에 의해 생긴 제도라 보시면 됩니다. "이성애자를 차별한다"는 소송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이성커플에도 시민결합을 개방한 나라들도 꽤 있습니다만, 제가 알기로 상당수 나라들의 경우 시민결합은 동성에게만 개방되어 있습니다. (제 기억을 되짚어 보자면 버몬트 주의 경우 차별논란을 피하기 위해 시민결합을 이성커플에도 개방하고 있고, 캘리포니아 주의 경우 (시민결합 보다 강도가 떨어지는 domestic partnership제도 이기는 합니다만) 이를 동성커플에만 개방하고 있습니다.)

(4) 미국의 "결혼순결주의" 관련: 결혼을 신성시하는 미국민의 태도는 동성혼 논쟁보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미국은 20세기 중반 타 인종 간의 결혼을 인정할 것인가를 두고 한 바탕 홍역을 치른 바가 있으며, 이혼 합법화를 두고도 진보적인 주와 보수적인 주 간에 갈등을 겪은 바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동성혼을 인정하는 주와 동성혼을 금하는 주가 혼재하는 작금의 사태는 미국 역사 상 처음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물론 이혼과 타 인종 간 결혼을 반대한 사람들은 주된 근거는 성서와 결혼의 신성성이었습니다.

(5) 동성혼이냐 시민결합이냐: 동성혼이 어렵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시민결합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은 제가 주장하는 바가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동성혼은 "결혼은 신성한 것"이라 믿는 사람에겐 너무나 혁명적인 주장이지만, 반대로 "결혼은 썩어빠진 제도"라고 믿는 사람에겐 너무나 보수적인 주장입니다. 일부 동성애자 단체가 동성혼 관련 소송을 시작하던 당시 미국 진보진영에서는 "왜 결혼이란 썩은 제도에 편입하려 하나"라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그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성혼이 계속 추진된 배경에는 (1) 이성애자들이 할 수 있다면 동성애자들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형식적 평등에 대한 욕구와 (2) "결혼"의 상징적인 의미에 수긍하는 평범한 미국 동성애자들의 욕구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법적보호의 필요성이 동기의 전부였다면, 굳이 "결혼"을 추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동성애자를 "결혼"이라는 범주에 쑤셔넣기 보다는 "결혼"의 범주를 완화시킴으로써 그 안에 자연히 동성애자가 포함되는 그런 방식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결혼"의 범주를 완화시키는 방법 중 하나가 시민결합이라 믿되, 시민결합이 결혼으로 가기 위한 베이스캠프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제가 주장한 바는 "굳이 결혼으로 가고 싶다면 서둘지 말고 시민결합이라는 중간역을 거치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는 것 뿐입니다.

글이 필요 이상 길어졌습니다. 이번 주말 행사 잘 치르시기 바랍니다.

모던보이 2004-11-06 오후 12:40

저도 이 문제가 논쟁이 될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해서 조금 더 세밀한 자료로 제출할 시간적-정신적 여건도 되지 않습니다. 지금도 엠티 가기 전에 끝낼 일이 있어 시간이 없어, 위에 다신 항목들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동성혼' 그리고 '시민결합'에 대한 한국 시민사회의 (지금 현재, 그리고 얼마간 예상되는) 반응 양식을 살피는 섬세함이 아직까지 우리 동성애자 인권운동 내부에 갖춰져 있지 못하다는 안타까움이 지배적일 뿐입니다. '시민결합'은 상훈 씨가 쪽글에서 언급한 미국 내 상황과 프랑스, 스페인 등의 유럽권의 상황 속에서 다소 다른 뉘앙스로 배치되어 있고, 아시아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것을 개념적으로 직수입해서 이식하기 어려운 상황일 겁니다. 동성혼 담론은 그것 자체로 한국 사회에 파격이겠지만, 시민들 대부분이 그 개념조차 거의 모르고 있는 '시민결합'의 제도화 문제 역시 개념의 사회적 학습 기간, 동성간 커플과 이성애 결혼 커플을 제외한 다른 영역의 다양한 가족 개념을 공론화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한국 시민사회의 비성숙 문제 등 만만찮은 문제가 산적해 있으니까요. 어쩌면 누군가 이 우회로에 비해, 동성혼 담론의 상징적 투쟁 효과에 국한해서 동성혼 이야기를 꺼내는 게 더 직접적이고 빠른 지름길이라고 주장한다면, 전 그에 대해 반박할 근거를 별로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굳이 결혼으로 가고 싶다면 서둘지 말고 시민결합이라는 중간역을 거치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는 주장은 기실 왜 하필 시민결합인가라는 의문을 낳을 수밖에 없고, 그 의문에 답하기 위해선 시민결합이 "중간역"일 수밖에 없는 이유들에 대해 수동적인 태도로 아젠더를 구성할 수밖에 없을 듯하며, 쪽글에서 그건 이미 지적한 바입니다.

외려 상훈 씨가 언급한 대로 <"결혼"의 범주를 완화시킴으로써 그 안에 자연히 동성애자가 포함되는 그런 방식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결혼"의 범주를 완화시키는 방법 중 하나가 시민결합>이라는 주장은 제 개인적 주장과 맞닿아 있기도 하며, '시민결합'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친밀성을 재구조화하는데 동성애자들이 앞장 서서 디자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즐거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쪽글 단다는 게 자꾸 길어지고 있는데, 아무튼 앞으로도 한국 사회에 우리의 작은 논의와 상관없이(ㅋ) 동성혼 문제가 제법 묵직한 아젠더로 자리잡을 듯한데, 조금 더 능동적인 태도로 동성애자 삶의 모델을 윤곽지는 방법을 사유하는 자리들이 많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