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든 영화든 노래든 내용과는 상관없이 제목만으로 마음을 빼앗기는 것들이 있다.
'너라는 환상'이라는 표제의 시집이 그런 경우였다.
이승훈 시인의 시집 중 하나였는데 친구 생일 선물을 고르려 들른 서점에서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단숨에 사버렸던 기억이 난다.
몇 일 전 찾을 책이 있어 몇 권 되지 않은 책을 들추다 우연찮게 이 책이 '사랑의 기술' 근처에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망연해 있었던 적이 있었다.
한 때 '사랑의 기술'을 읽으며 도통한 연애 박사가 되리란 헛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군데군데 친 밑줄에다가 지금은 누렇게 번져 뭐라 알아 볼 수 없는 메모까지 되어 있는 걸 보면 꽤 열심히 탐독했던 거 같다.
사랑의 기술에 나온 대목, 하나하나 '이론적'으로는 수긍이 가고 무릎을 칠 일이다.
하지만 환상 속에 자리잡은 '너'라는 허상을 깨기란 도무지 쉽지가 않다.
환상은 머리 속에서만 가능한 허상이다.
하지만 그 허상이라는 괴물은 머리 속에서 자가번식을 해대(특히 현재에 대한 욕구불만이 클 때에는 더욱) 때로는 그것이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도 있다.
그리고 그 환상의 이면을 경험한 사람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머리 속에서 존재할 때만 가능한 것이라는 걸.
그걸 알면서도 그 환상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는 것도.
다시 한번 '사랑의 기술'을 들춰본다.
노력하고 연습하면 얻어질 수 있는 게 '사랑'일까?
과연 그것 앞에서 환상은 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운명적인 사랑', 또는 그에 상응하는 '인연'이라는 말만 들어도 코웃음을 처 대던 나의 모습을 돌아본다.
뒤돌아선 얼굴에선 쓸쓸히 그런 만남을 무책임하게 바래왔던 건 아니었는지.
스스로 부풀린 허상과 욕망을 녹이느라 누런 맥주 잔 속에 침잠했던 건 또 아니었는지.
너를 만나면
이승훈
너를 만나면
우선 타버린 심장을
꺼내 보여야지
다음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를 해야지
잘 익은 빵을
한 바구니 사야지
너를 만나면
우선 웃어야지
그럼 나는
두 배나 커지겠지
너를 만나면
가을이 오겠지
세상은 온통 가을이겠지
너를 만나면
나는 세 배나 커지겠지
식사를 하고
거리를 걸으면
백 개나 해가 뜨겠지
다신 병들지 않겠지
너를 만나면
기쁘고 한없이 고요한
마음이 되겠지
아아 너를 만나면
감기로 시달리던
밤들에 대해
전쟁에 대해
다시는 말하지 말아야지
너를 만나면
이렇게 비만 내리는
밤도 사랑해야지.
- 아, 깨야 할 너라는 환상.
읽는 도중 짜증이 나서 책을 덮어두고 다시는 쳐다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읽게 된 책이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인데,
이것 또한 만만치 않을 정도로 짜증이 나더군요.
사랑..하고 싶습니다.
남의 연애사나 글이나 들추는 그런 도둑질 행위.
이젠 지겹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