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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티즌]

1960년대 클리프 리차드가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를 부르자 한국의 여성들은 흥분하여 속옷을 벗어 던졌다고 한다. 그 풍문이 사실이라고 하자. 성적인 폭발 상태에 이른 동양인 여성들의 땀에 젖은 얼굴과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팬티나 브래지어를 본 클리프 리차드의 리비도 수치가 상승했을까? 성적인 자극 혹은 동요를 경험했거나 나중에라도 침대 위에 홀로 누워 그 관능적 광경을 되새겼겠는가 말이다. '안티섹슈얼 온라인'(Antisexual Online)에 따르면 무관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클리프 리차드는 무성애자(asexual) 혹은 반성애자(antisexual)이기 때문이다. 그가 여성들과 데이트를 하기는 했지만 성행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이성과의 만남이 가벼운 유희나 장난질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아내와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는 조지 버나드 쇼, 루 살로메가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었던 니체, 저속하고 변태적인 루머가 나돌았지만 평생 처녀성을 유지한 퀸 엘리자베스, 그리고 살바도르 달리와 미국 녹색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랄프 네이더 등도 모두 성행위를 선천적으로 꺼리는 무성애자들이라고 '안티 섹슈얼 온라인'은 주장 혹은 추측한다.

섹스 행위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여겨진다. 2차 성징기가 지난 인간들이 섹스를 할 생각이 없다면 당연히 '비정상'으로 분류되고 가문의 재앙으로 해석된다. 이성이나 동성과 성기 접촉을 꺼리는 이들 집단은 극단적인 비정상 집단이어서 가령 상대의 엉덩이를 채찍으로 갈기는 에스앰머(SMer)나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보다 훨씬 변방에 서식하는 괴물들이다. 치료가 그들의 운명이다. 고장난 정신에는 심리 치료사의 설득을 주입하고 불모의 육체에는 호르몬을 주사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하지만 무성애자를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통념이 부당하고 저급하고 반이성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무성애자가 결코 괴물이 아니며, 동성애자나 이성애자처럼 존중받아야 할 성적 취향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고, 인류 역사에서 무성애자들은 엄연히 존재해왔고, 나아가 무성애자 자신들도 자각과 자긍을 가져야 한다고 주창하는 집단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AVEN(Asexual Visibility and Education Network)이다.

AVEN에서는 최신의 섹스 마이너리티 그룹인 무성애자를 '성적인 매혹(attraction 혹은 이끌림 혹은 쏠림)을 느끼지 못하거나 그 수준이 현저히 낮은 사람들'로 정의한다. 성욕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섹스를 하는 무성애자들도 있다. 하지만 성욕을 타인과의 섹스 행위를 통해 해소하기를 꺼린다. 타인에게서 성적 매혹을 느끼더라도 아주 미미한 수준이다. 가령 이성애자 남성이 다른 남성에 대해 갖는 정도의 낮은 매혹을 경험할 뿐이다. (아래 오른쪽 그림이 무성애자의 심볼이다. 동성애 양성애 이성애 등의 범주로부터 무성애는 멀리 그리고 낮은 곳에 외떨어져 있다. '매혹'의 수준이 현저히 낮다는 점이 여타의 집단과 무성애를 가르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섹스를 하는 무성애자는 모순인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동성애자들도 이성과 섹스를 한다. 또 일반적인 사람들('유성애자'라고 하자)이 무성애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유성애자들이라고 해서 전부 부모나 형제나 친구들과 섹스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무성애자도 섹슈얼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양상이나 동기가 유성애자들의 섹스와 다르다. 강박적으로 섹스에 몰입하는 것은 아니다. 섹스가 데이트의 목적이 되지 않는다. 무성애자들은 호기심 때문에 섹스를 하는 일이 있다. 또 로맨틱한 사랑의 감정을 갖고 있는 대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적 자극을 선물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원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성행위를 하는지 여부가 무성애자 판별 기준이 아니다. 섹스를 즐겁지 않거나 불편하거나 하등 유혹적이지 않는 행위로 생각한다면 그는 무성애자의 기본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유성애자들은 멋진 육신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성적으로 고양되는 반면 무성애자들은 말 그대로 무심하다. 가령 예술 작품이나 화려한 석양을 바라볼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동을 느낄 뿐이다. 무성애자도 일대일의 로맨틱한 연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그 양상은 다르다. 그들은 섹스가 목적이 아니다. 꼭 껴안고 누워 TV를 보는 정도의 신체 접촉에서 행복을 느낀다. 이른바 정상인들의 이성을 향한 집착을 분해해보면 80%는 성적 동기이고 나머지 20%는 친밀한 관계에 대한 열망이라고 하는데 무성애자들은 관계 지향적이다. 그들은 인간적 관계와 친교와 낭만을 갈망한다. 보통의 연인들은 체액을 나누면서 사랑을 확인하지만 무성애자들은 가슴속에 숨겨 둔 고통이나 비밀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하나의 목적을 향해 함께 일을 하는 커플들도 있다. 일대일 소유 관계를 부정하는 폴리아모리를 지향하는 무성애자들도 있다.

무성애자들은 자신의 성적 스타일이 의외의 선물을 가져다준다고 증언한다. 성적 강박 없는 인간 관계는 평화롭다. 연대감도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 사실 유성애자들은 섹스 때문에 친구를 잃고 적을 만들고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가. 치정에 얽힌 살인 사건 따위는 너무나 흔한 유성애적 인간의 비극이다. 욕망과 번민이 없는 무성애자의 세계에서는 심플 라이프가 가능하다. 교미 상대를 찾아 나서는 수고에 쏟는 에너지를 자아 개발이나 취미 활동에 투여할 수도 있어, 무생애적 인생은 훨씬 풍요롭다. 애초에 자신이 섹스에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말못할 열등감에 시달리지만, 커밍 아웃하고 나면 대단히 편안하고 아늑한 생활이 가능해진다고 무성애자들은 증언한다.

한편 무성애자의 한 부류로 '레더 스핀스터 (Leather Spinster)'라는 개념도 있다. 1998년 레지나 잉글리시가 관련 서적 [Leather Spinster and Their Degrees of Asexuality]를 내면서 유명해진 개념이다. 결혼이나 애인 찾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 캐리어 우먼들이 지칭하는 개념인데 무성애자의 한 유형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여성들에게 결혼이나 섹스를 강요하는 이 세상의 암묵적인 압력에 반대하고 무성애적 자기 존재를 긍정한다.

요컨대 무성애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것 같다 : 섹스를 강요하지 말라. 섹스 기피증은 암이나 결핵처럼 반드시 치유해야 할 질병이 아니다. 섹스를 좋아하는 당신들이나 실컷 정액과 난자와 에너지를 허비하며 살면 될 것이지 우리 무성애자들을 염려하거나 동정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모던보이 2004-02-16 오후 12:00

외려 제가 고맙네요. 돈 내고 글 읽는 버릇이 안 들여져서 컬티즌이 유료화된 이래 유료 글들은 아예 단념했었거든요. 덕분에 '공짜'로 읽게 되었습니다. ^^ 또 덕분에 asexuality에 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어서 외려 고맙습니다.

아마 유료 콘테츠 글에 삽입된 asexuality 상징 심벌은 아래 그림이었을 겁니다. 밑의 그림은 이 심벌을 도상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그림이고요.




프로이트의 '여성의 남근 선망 욕구라는 원죄' 개념을 비웃으며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그리고 자신들의 섹슈얼리티를 제 4의 정체성이라 명명하는 무성애자들이 무척 당당해 보이고 좋습니다. ^^ 그에 관해 쉽고 간결하게 쓴 영어 페이지가 있어 링크 걸어놓습니다.
target=_blank>http://oak.cats.ohiou.edu/~lb122098/fourthsexuality.html


조금 시간이 지나면 한국에도 무성애자 커뮤니티가 형성되리라 봐요. 일본에는 이미 있더군요.

나중에 시간 되시면, 친구사이 사무실에도 놀러 오고 그러세요. ^^ 암튼 반갑고, 고맙고 그렇습니다.
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