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여우가 어느 날, 많은 포도송이가 잘 익어 매달려 있는 포도밭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포도송이는 너무 높아서 여우에게는 닿기 어려울 만큼 높은 시렁 위에 매어져 있었다. 여우는 어떻게든 거기에 닿아 보려고 훌쩍 뛰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훌쩍 뛰었다. 하지만 모두 헛일이었다. 마침내 여우는 완전히 지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여우는 외쳤다.
"아무나 딸 테면 따라지, 저 포도는 시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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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솝의 우화는 성인용이었다지요. 후에 아동 교훈용으로 개작되었습니다. 해서 자세히 이솝 우화를 들여다보면 에로틱한 구석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 위의 여우의 sex는 암컷입니다. 이 이야기의 다른 버젼을 보면, 후에 수컷 오빠 여우가 등장하는 게 있습니다.
다른 버젼에 따르면, 오빠 여우는 여동생 여우의 '저 포도는 시단 말이야." 라는 경고를 듣지 않고 하루 왼종일 포도나무 밑에서 포도를 따려고 펄쩍거리다 결국 사람들에게 붙잡혀 죽게 되지요.
헌데 이렇듯 '체념'의 정서를 조장하는 듯한 이솝 우화가 과연 어린아이들에게 도움이 될까요? 지금껏 많은 이들은 이솝의 우화들이 빨리 체념하는 인간상, 과욕을 부리면 패가망신하게 된다는 교훈을 주기 때문에 외려 아이들에게 나쁜 정서를 심어줄 거라며 이솝 우화를 비판해왔습니다.
그렇게 비판의 각을 세우는 사람들은 대부분, 조금 더 노력해서 신포도를 따야 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허나 '파비안'과 '하늘을 나는 교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일의 작가 E.케스트너에 의해 재각색된 '여우와 신포도'의 결말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결국 애면글면 노력해서 딴 포도를 먹었는데 정말로 시큼떨떠름한 맛이어서 먹기 곤란했던 거지요!
본디 노예 출신으로 알려진 이솝의 우화는 고대 그리스에서 발원해 로마에서 꽃을 피운 스토이즘과 궤를 나누고 있습니다. 스토이즘의 뛰어난 철학자이자 노예 출신인 에픽테투스의 일화들은 이솝 우화의 이야기와 닮아 있습니다.
실제로 노예 출신이라는 신분상의 데미지로 한때 에픽테투스는 아주 지독하게 고문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고문하는 인간들이 에픽테투스의 팔을 비틀자, 에픽테투스가 평정심을 잃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팔이 부러질 거야."
헌데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정말로 팔이 부러지고 말았지요. 그러자 에픽테투스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봐봐, 내 말이 맞잖아."
스토이즘의 철학적 토픽은 '마음의 평정'입니다. 세계 최초의 이 코스모폴리탄적인 철학자들은 인간의 '정념'은 사물과 인간 마음의 질서를 흩뜨려놓는 위험한 기도라고 여겼지요. 때문에 외부 사물에 대한 욕심을 접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게 우주와 합일하는 가장 좋은 삶의 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에픽테투스의 '내 말이 맞잖아'라는 말은 우연을 신뢰하지 않고 필연의 법칙으로 만물의 이치가 세워져 있다는 그들 나름의 철학에서 비롯된 경구인 셈입니다.
마찬가지로 ''저 포도는 시단 말이야." 라는 여우의 말은 외부 사물에 대한 정념을 거둬들여 스트레스를 줄이자라는 이솝의 철학을 반영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드물긴 하지만 몇몇 정신분석의들은 '저 포도는 시단 말이야.' 라는 말이 단순한 핑계 이상의 치유 효과, 스트레스의 조건을 덜어내는 효과적인 자가치료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오늘, 갑자기 여우와 신포가 이야기가 생각나서 개념없이 몇 자 주절거려봅니다. 상당히 에로틱한 이야기입니다. 짝사랑에 대한 엔딩 씬의 마지막 대사를, '저 포도는 시단 말이야.' 라는 말로 대신하는 게 기실 저 같이 보통명사普通名詞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처세술인 거지요.
p.s
마음이 조금씩 다스려지니 어느덧 낯선 이의 노크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마음을 열고 이 새로운 사랑을 조금씩 탐색해볼까, 그런 흐릿한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