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

12 김용일 : 웃음의 충전지

안녕하세요. 저는 새롭게 커밍아웃 인터뷰를 담당하게 된 라이카라고 합니다. 이번에 인터뷰를 해 주신 분은 김용일 형입니다. 나이는 마흔이 살짝 넘었구요. 인터뷰 초짜인 저는 그의 유쾌함을 지면에 옮기고 싶었어요. 친구사이 게이코러스와 수영모임인 마린보이에서 활동하는 그는 언제나 유쾌한 웃음이 떠나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오래 알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정색하고 얘기를 시작하니 지나온 삶에서 쌓인 그의 내공에 압도되고 말았어요. 아침 햇살이 아름다운 조그만 마을 버스 안에서 흐르는 눈물을 훔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힘에 겨워 애써 결정이란 칼날을 들이대야 할 때는 누구보다 단호하고 냉철한 논리로 해답을 제시해 주곤 해요. 동생들의 하소연과 푸념을 듣느라 마음 한구석엔 근심 덩어리가 쌓였을 텐데, 정작 본인을 어떨까요? 그냥 그를 만나면 저에 대한 하소연만 하고 정작 본인의 아픔 듣기를 유예했던 반성의 시간이 되길 바라며 인터뷰를 시작해 봅니다.





라이카 : 게이들이 살아가면서 힘든 점 중의 하나가 모델링이 없다는 점인 거 같아요. 바나 클럽에서는 얼마든지 40이 넘은 선배 게이(?)들을 볼 수 있지만 생활 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델링이 되어주는 게이 선배들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본인은 다른 친구사이 후배들에게 좋은 모델링이 되어주는 반면에 자신은 그런 형들이 없다시피 하는데 모델링이 없기 때문에 힘든 점은 없나요?

용일 : 워낙 그런 것에 익숙해져서 별다른 어려움은 없어요. 다만 나이가 마흔이 넘어가니까 늙는다는 것에 대한 고통과 힘든 점이 있지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긴 하지만 내가 책임을 어느 정도 지고 거기서 내 스스로 보살핌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 또는 공동체가 있었으면 해요. 그리고 무슨 결정이든 최후의 몫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모델링 부재에 따른 별 문제점은 없구요, 음, 그리고 나이를 신경 쓰지 않으면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조언을 구할 수 있잖아요.

라이카 : 당신은 우리나라에서 버티기 힘들기로 유명한 집단인 대기업에서 꽤 오랫동안 근무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게이로써, 삭막하고 커다란 집단에서 생활하기 어렵지는 않았나요?

용일 : 난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써요, 그래서 그런지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어요. 다만 나이가 차다보니까 결혼에 대한 압력은 알게 모르게 생기더라구요.

라이카 : 집에 커밍아웃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제 했나요?

용일 : 음 서른다섯 쯤에 했던 거 같아요.

라이카 :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그리고 처음 이야기를 하신 대상도 약간 특이하다고 들었는데요.

용일 : 굳이 계기라고 꼽자면 결혼에 대한 압력 때문이었죠. 부모님의 강요로 선을 몇 차례 보다보니까 이건 상대 여자에게도 할 짓이 아니란 생각이 더욱 강해졌고 커밍아웃 말고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고나 할까요.

라이카 : 그럼, 구체적으로 이 날, 날 잡아서 해야겠다 그러고 저지르셨나요?

용일 :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막연하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으니 말씀은 드려야겠다 싶었던 찰나에 그 때 선 본 여자가 내가 맘에 든다고 하는 바람에 집에서 어머니가 난리가 나셨죠. 도대체 왜 안 하냐고, 그래서 이제는 할 때가 됐구나 싶어 말해버렸죠.

라이카 : 근데 처음 말한 대상은 어머니가 아니셨다죠?

용일 : 큰 매형에게 먼저 고백(?) 했죠.

라이카 : 음, 이건 뭔가 스토리가 애매한 쪽으로 흘러가는데요, 혹시 매형을 짝사랑....

용일 : (웃음) 그게 아니구요, 그 때 큰 누나 식구들과 같은 건물에서 살고 있었고 어머니가 그래도 매형이 남자니까 서로 통하는 바가 있을 거라면서 나랑 이야기해보라고 시키셨어요. 그래서 매형과 얘기 도중에 말한 거였죠.

라이카 : 그럼 그 때 당시에도 매형의 연세가 제법 있으셨을 텐데 게이란 존재를 알고 계시던가요?

용일 : 그 때 마침 홍석천 씨가 텔레비전은 통해 커밍아웃 한 직후라 알고 계시더군요. 처음 반응은 고칠 수 있다. 같이 노력해보자는(웃음)







라이카 : 그 후 어머님의 반응이 더욱 궁금합니다.

용일 : 그 얘기를 매형에게 하고 한 일주일 정도 집을 나가 있었어요. 그 후 집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아무 말 없으시더니 며칠 지나자 정신병원엘 데려가셨고, 정신병원에서 병이 아니라고 하자 돌팔이라시며 '침'의 힘을 빌자며 한의원엘 데려가셨죠.

라이카 : 그리고 한 5년이상이 지났는데요, 지금은 게이 아들을 인정하고 계신가요?

용일 : 게이로서는 인정하지 않고 내가 쭉 독신자로 살아가겠구나 라는 정도로만 인정하고 계시죠. 그래도 이제는 결혼 강요는 없으시니 그래도 나아진 거죠. 이 정도까지 발전한 것만도 5년 이상이 걸린 것 같아요. 휴우.

라이카 : 아까 공동체 얘길 하셨는데요, 게이 실버타운 같은 걸 말씀하신 건가요?

용일 : 구체적인 용어야 상관없을 것 같구요, 건물 하나를 공동명의든 어떤 형태든 구입해서 게이 친구들과 같이 지내는 것은 가능할 것 같아요.

라이카 : 그렇다면 지금 시설이 잘 마련되어 있는 실버타운도 있는데요, 기존에 있는 실버타운에 들어가는 것과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용일 : 나이 먹어서까지 남 눈치보고 살고 싶지 않아요. 돈 문제가 걸리긴 한데,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지금 알고 있는 지인들과 의논해서 같이 살고 싶네요. 아무래도 이성애자 집단에서는 맘이 편해지질 않아서.

라이카 : 자, 이제 취미 얘기로 넘어가 볼까요. 당신은 음악, 그것도 고전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걸 좋아하세요? 뭐 말씀하신다 해도 내가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겠지만요.^^;;







용일 :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바뀌게 되더군요. 처음에는 교향곡이 좋다가 협주곡이 좋아졌고 다음엔 실내악곡 그리고 요즘은 오페라를 보러 다녀요. 자주는 못 보더라도 괜찮은 공연들은 주말에 혼자라도 꼭 챙겨서 봐요.

라이카 : 그러면 음악이 당신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요?

용일 : 고등학교 때부터 합창단을 해서 자연스럽게 음악과 친해질 수 있었고, 직장을 다니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들었던 거 같아요. 뭐 다들 그렇겠지만 직장 생활이라는 게 보통 스트레스가 쌓이는 게 아니잖아요. 음악은 그럴 때마다 찾게 되는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입니다.

라이카 : 음악이나 문화 등 다방면에 관심도 많고 돈을 투자하기를 아끼지 않던 사람들도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으면 은근슬쩍 자신이 향유하던 문화 생활로부터 발을 빼게 되는데요,  왜 그런 것 같나요?

용일 : 우선은 경제적인 이유겠죠, 자식이 생기면 문화 생활은 끝인 거 같더라구요, 그리고 마음의 여유도 없는 것 같구요.

라이카 : 그럼 최근에 구입한 앨범이나 자주 듣는 곡들이 있나요?

용일 : 소프라노 홍혜경 씨의 아리아들을 요새는 자주 들어요. 뉴욕 메트로폴리탄의 주역인데요, 목소리가 푸근한 데다가 서정적이어서 요즘 같은 가을에 듣기에는 그만이죠.

라이카 : 이제 당신의 아픈 과거를 좀 찔러볼까 하는데요, 당신이 친구사이에 등장한 지도 어언 8, 9년이 되어가고 미모도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고들 합니다만, 당신의 연애 경력은 고작 한 사람과 9개월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왜 이런 안습 사태가 벌어졌나요?

용일 : 우선 주위에 워낙 친한 친구나 동생들이 많아서 굳이 애인관계 아니라도 만족하며 살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음 이건 내가 단면만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너무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관계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서 일부는 포기하며 살아갔던 면도 있지 않나 싶군요.

라이카 : 그럼 당신은 단기간에 확 불살라버리는 사랑보다 은근하며 오래 유지되는 관계를 원하는 편인가요?

용일 : 난 성격상 소모적인 것들이 싫어요, 오래 지속되고 편하면서 믿을 수 있는 관계가 좋아보이고 저도 그러고 싶구요.

라이카 : 그럼 말 나온 김에 어떤 상대면 그렇게 은근하게 지낼 수 있으실 것 같나요?

용일 : 우선 나이는 또래가 좋구요, 외모 좋은 건 마다하지 않을 거구,(웃음) 그리고 솔직히 중요한 건 그 사람의 경제력이죠.

라이카 : ???






용일 : 연봉이 많아야 한다거나 그런 뜻이 아니고 자기 나이를 책임질 수 있는 일정한 수입이 있었으면 한다는 거예요. 링컨도 자기 나이 마흔에는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잖아요.(웃음) 암튼 자기 삶에 책임감 있고 성실한 사람이면 좋을 것 같네요.

라이카 : 요즘 게이 싸이트에서는 한참 기혼 게이에 대한 설왕설래가 많았어요. 당신이 원하는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데 단하나 걸리는 부분이 기혼 게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 같나요?

용일 : 누구나 입장이 다르겠지만 저는 조심스럽게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겠어요. 우리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픔 한 가지씩은 가지고 살 거에요. 자기의 아픔만 특수화시켜서 대접받으려는 자세는 마음에 들지 않아요. 모든 걸 가지고 살 순 없잖아요? 그리고 현실적인 면을 봐도 기혼 게이와의 데이트에는 제약 조건이 많을 수 밖에 없잖아요.

라이카 : 그럼,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게이사이트는 자주 들어가 보시는 편인가요?

용일 :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고 봐야죠.

라이카 : 왜 그런가요?

용일 : 얼마 전에 나도 애인을 찾아볼까 하고 잠시 이용한 적이 있었는데 나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친구사이 사이트만 하루에 한 번 정도 들어가서 사람들이 어떻게들 지내고 있나 확인하는 편이에요.

라이카 : 음 알겠습니다. 자 그럼 우리의 친정인 친구사이에 대해 수다 좀 떨어봅시다. 당신이 처음 친구사이에 나올 때에는 그래도 다 당신 또래 사람들이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신이 마흔을 살짝 넘긴 요즘은 당신과 20년 이상 차이 나는 친구들도 속속 친구사이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솔직히 같이 술 마시고 놀다보면 세대 차이 같은 거 느껴지지는 않나요?

용일 : 별로 느낀 적 없어요. 오히려 행동하는 게 과감하고 자기 표현에 솔직한 모습들은 너무 보기 좋아요.

라이카 : 그럼 친구사이 동생들과 당신 직장에서 만날 수 있는 후배들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용일 : 그건 비교대상이 안 되는 거 같아요. 친구사이 동생들을 만나는 내 자세와 직장 후배들을 만나는 내 자세 자체가 다르니까요.

라이카 : 아이쿠, 그렇겠네요. 난 당신을 비교적 오래 알고 지낸 편인데 당신은 감성이 풍부해 남의 아픈 얘기를 들으면 그 당사자보다 더 아파하고 때론 아침 마을버스 안에서는 눈물을 보이는가 하면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하거나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누구보다 냉철하고 다부진 모습을 보입니다. 어떤 쪽이 자신의 모습과 더 가까운 것 같나요?

용일 : 평소 나를 지배하는 건 감성적인 면이 훨씬 큰 것 같아요. 하지만 사회 생활을 한 해 두 해 하다보니 사회 생활의 부산물로 냉철한 면이 생긴 것 같네요.

라이카 :전 20대 때는 게이 친구들뿐만 아니라 스트레이트 친구들도 자주 만나고, 만나면 즐겁고 했는데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는 거의 게이친구들만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요?

용일 : 그건 게이, 이성애자를 떠나 가정을 가지고 직장을 갖게 되면 서로 만날 물리적인 시간도 없어지고 설혹 만나게 되더라도 자기 앞에 닥친 문제들, 돈벌이, 가족 문제로 화제가 고정되기 때문인 거 같아요. 한마디로 속 이야기를 터놓기가 힘들죠.

라이카 : 가을을 맞이하여 주변 지인들에게 좋은 일이 많이 생겼어요. 다들 애인이 생겼다는 말인데 배 안 아파요?

용일 : 배가 왜 아파요? 한두 해 볼 사람들도 아닌데, 모쪼록 행복하게들 오래 지냈으면 해요.

라이카 : 그럼 마지막으로 친구사이 왕언니로써 한마디 거들자면요?







용일 : 남는 건 친구, 사람들인 거 같아요. 바라지만 말고 서로 위로와 힘이 되 주면서 즐겁게 지냈으면 합니다. 지금도 잘하고 있으니까 너무 의욕만 앞서서 욕심부리지 말고 차근히, 즐기면서 했으면 해요. 그리고 애인이든 친구든 한번 알게 된 사람들은 서로 위로하고 즐거움을 주면서 오래도록 봤으면 하구요.

라이카 : 이 글을 읽고 있을 미래의 그이에게는?

용일 : 너 어딨어? 잡히기만 잡혀봐. 아주 죽었어.




*이 인터뷰 내용과 사진은 김용일 씨와 인터뷰어의 허락없이 다른 곳에 절대 게재할 수 없습니다.
(김용일 : operagala@hanmail.net)
(글 : 라이카 deli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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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