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혹은 눈에 얽힌 몇 가지 에피소드들.
이십 오 년 동안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던 거시기를 벗어던졌다.
겁나는 세상에 맨 눈으로 나서기 힘들 때 든든한 보호막이기도 되어주기도 했고, 울퉁불퉁한 이목구비의 결점을 커버해주는 악세서리 역할도 톡톡히 해줬지만, 그래도 득보단 실이 많아 꽤 성가시던 놈이었다.
1. 초등학교 오학년 때 처음 안경을 썼다.
그때 안경을 쓴 채 엄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콧노래를 불렀다.
훈장이라도 단 듯한 기분, 빨리 학교가서 반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엄마는 내내 화가 나신 듯 했다.
첫째부터 막내까지 차례차례 안경을 씌우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정도의 철은 그때의 나는 갖고 있지 못했었다.
2. 누나들은 성인이 되자 첫째부터 순서대로, 다시금 엄마의 손을 잡고 안과에 가서 시력교정술을 받았다.
엄마는 몹시 만족한 듯 보였고 누나들은 곧 결혼을 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더 지나 나도 안과 수술대 위에 누웠다. ‘혼자 오셨어요?’라고 묻는 간호사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살타는 냄새가 날 때는 아주 약간은, 외롭다는 생각도 들었던 거 같다. 십여 분 만에 공양미 열 세 석(수술비를 그 때의 나락섬으로 환산하면 대충 그 정도 된다는...)이 날아갔다.
눈을 거의 감다시피 한 채 집에 돌아와서 하루 종일 잤고. 일어나자마자 그동안 쓰고 있던 안경을 깨버렸다.
3. 예전에 가끔 쓰던 ‘명안’이라는 닉네임.
사람들은 다 ‘밝은 눈’이라는 뜻의 명안明眼이라 여기고 이름이 좋다고들 했다. 사실 명안의 한자는 명안明安이다.
십수 년 전 남해안의 어느 섬에 있는 작은 절에 며칠 머문 적이 있었다.
마악 게이커뮤니티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을 때였고 커밍아웃은 하기 전이었다.
절밥만 축내며 빈둥거리던 우리 일행은 스님에게 법명을 하사받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우리는 ‘안’자를 돌림자로 가졌다. 애인이랑 헤어지고 내내 울고 다녔던 선배에게는 ‘수안’,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선배에게는 진리를 보라며 ‘혜안’ 뭐, 그런 식이었다.
내게는 명안이라는 이름이 떨어졌다. 내가 좀 까칠해보였던가 보다. 아직은 혼돈스럽겠지만 지혜를 깨달으면 몇 년 안에 마음이 편안해 질 것이라며 지어주신 이름이었다.
여전히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나는 요즘 이 이름을 자주 사용하지는 않는다.
4. 십여 년 전 국방부의 부름을 받고 신체검사를 하기 전, 나는 4급 판정을 받기 위해 열심히 체중을 감량시켰다. 늘이는 건 힘들지만 빼는 건 내게는 쉬운 일. 두 달 만에 6킬로그램 정도까지 감량하는 데(지금보다 십 킬로그램 정도 적은)성공했다. 그리고 뼈대만 앙상한 몸으로 신체검사를 받았다.
나는 4급을 받는데 성공했다. 이유는 고도근시 때문이었다.
아직은 맨 눈으로 세상을 보기가 겁이 난다.
눈에 부기가 가라앉자마자 동네 안경점에 나가서 도수 없는 안경을 샀다.
< 오늘의 결론 >
: 개말라, 오늘부터 수술비로 지른 카드값 메우기 위해 열심히 꽃을 팔아야 한다.
(요즘 친구사이에 '가람적 글쓰기'가 유행하는 듯 하여 함 따라해봤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