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보고 싶다는 말을 들은지가 언제였는지.
그 말이 내 기억 속에서 잊혀 갈 무렵 오늘 한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술에 취해 있었다.
반쯤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확인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니 조금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내 목소리가 많이 바뀌었다며 약간의 투정 섞인 목소리로
천역덕스럽게 나의 안부를 묻는 그 사람이 왠지 싫지는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 종로로 오라고 떼를 썼다.
종로의 모 술집에 나랑 닮은 사람이 있다는 얼토당토 않는 핑계를 대며 나를 유혹했다.
나는 완강히 거절했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고, 집에서 너무 멀고
이미 차도 끊겼다는 현실적인 핑계를 대며 그의 부탁 아닌 부탁을 거절했다.
잠시 간의 침묵. 그는 갑작스레 나에게 높임말을 하더니만
"보고 싶어요. 보고 싶으니까 일루 와줘요."라고 불쑥 자신의 속내를 내비췄다.
물론 나는 그의 말을 백 퍼센트 믿지는 않았지만
조금 마음이 술렁이고 동요되기 시작했다.
"너는 내가 하나도 안보고 싶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건성으로 "보고 싶었어."라는 단답형의 대답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마음 속에선 수많은 갈피의 생각들이 나를 옳아매기 시작했고,
이건 아니라는 결론에 대화가 빨리 마무리 되길 바랬다.
그는 주저리 주저리 자신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더니만
또다시 내가 보고 싶다며 "정말 너 많이 좋아했었어."라는 말로
내 마음을 흐트려 놓았다.
그냥 고마웠다. 정말 많이 고마웠다.
나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약간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와 함께 했던 지난 날들이 순식간에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욕했었다.
나의 마음을 이용했었고, 나의 눈물을 즐겼고, 나의 순애보를 짓밟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고 싶다."라는 말 한마디로 그 모든 것들이 용서되고
변해 버린 내가 죄스러워졌다.
"연락 좀 하고 살자."라며 아쉬움을 토로하며
전화기 저편에서 사라진 그의 목소리가 계속적으로 귓가에 맴돌았다.
누군가에 보고 싶다는 말을 들은지가 언제였는지 몰랐던 오늘.
옛사람에게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짠하고 괜히 아리다.
돌이켜 보면 나란 놈은 보고 싶다라는 말을 꾹꾹 참아가며
내 마음의 그릇 한 곳에 넘치지 않게 비워내고 또 비워냈던 걸 생각하면
오늘 받은 한 통의 전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가 이렇게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킬지 몰랐던 가을 밤.
보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바보같이 속으로만 "보고싶다"는 말을 한마디씩 건네며 잠을 청한다.
가슴이 촉촉히 젖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