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핍박’의 유행 끝나길
[일다 2005-07-19 14:24]
내가 고3이었던 2002년, 한 해 동안 어떤 선생님으로부터 꾸준히 이런 얘기를 들었다. “대학 가면 여행 많이 다녀라. 근데 해외여행 가서는 같은 여자끼리라도 손잡고 다니면 절대 안 된다. 그러면 외국 사람들은 딱 ‘호모’라고 생각하고 너희를 쳐다보거든.”
2002년은 언론에 보도된 대로라면 한창 “동성애가 유행”이던 때였다. 그래서 학교에 동성애자가 넘쳐났어야 했으며 이들은 “음란의 바다”로 뛰어들면서 크게 반항해야 했다. 그러나 현실 속의 우리는 선생님의 동성애 비하발언을 들으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도 “호모”로 보이면 어때서요 하고 묻지 않았고 동성애자가 어때서요 하고 따지지 않았다. 우린 선생님이 왜 동성애자를 “호모”라고 부르는지, 사회에서 동성애자의 지위가 무엇인지, 학교에서 커밍아웃을 하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학교의 이반들은 침묵했고 나 역시 그 침묵에 동참했다.
7월 13일 방영된 MBC <뉴스투데이-현장 속으로> “‘이반’ 문화 확산” 을 보았다. 10대 시절 겪었던 그 침묵의 서러움이 다시 살아나 무섭고 끔찍했다.
내가 한창 성 정체성으로 혼란을 겪을 때, 내게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들은 대학 입학 수시전형 면접을 지도하면서 면접 때 ‘동성애 찬/반을 묻거든 무조건 반대입장을 펼치라’고 가르쳤고, 여자애들이 손만 잡아도 너희 사귀는 거냐고 조롱하며 손 떼라고 강요했다. 학교 안에 분명 존재했을 이반들은 그룹을 형성하지 못했다. 아름아름 얼굴 정도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다가가서 “너도 이반이니?”라고 묻고 고민을 털어놓으려면 정말이지 큰 용기가 필요했다.
2002년의 언론은 끊임없이 동성애자와 트랜스 젠더 관련 보도들을 펑펑 터트렸다. ‘펑펑 터트렸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만큼, 가십성의 보도였다. 홍석천씨의 커밍아웃 관련 기사의 제목은 “나 호모다!”였다. 2002년 10월에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10대 레즈비언을 다루었다. 그 방송도 문제가 많았지만 혹시라도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챙겨보았다.
어느 날 집에서 트랜스젠더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을 때 엄마는 “너도 남자가 되고 싶니”하고 나에게 물었다. 가십성 방송들은 동성애자는 무엇이고 트랜스젠더는 무엇이며 이반은 무엇인지 기본적인 이해를 전달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는 여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당신 딸이 남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당시 10대 레즈비언들 사이에는 ‘마녀사냥’에 대한 소문과 두려움이 번져갔다. ‘**가 학교 정문 앞에서 경찰에 의해 연행됐다’는 식의 말들이 급속도로 퍼지고, 많은 10대 여성이반 커뮤니티가 ‘당분간 폐쇄’를 결정했다.
졸업 이후 나는 10대 레즈비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후배들을 통해 조금씩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는 손목을 끊어 죽다가 다시 살아났고, 누군가는 고백을 못해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10월 <그것이 알고 싶다>가 방영된 직후 수능을 보고 졸업을 했기 때문에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이 방영된 이듬해부터 학교에선 동성애자들이 누구인지 지레 짐작하고 엄청난 탄압을 가했다고 한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긴 생머리’ 헤어스타일을 강요 받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현실은 달라져 있었다. 이제 아이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같은 정체성의 이반들끼리 친해지고 그룹을 지으면서, 서로 고민을 털어놓고 격려해주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을 지지해줄 수 있는 이성애자 친구들을 만들었다는 점이 달라졌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냈기 때문에 더욱 거센 차별과 억압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가까이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다는 게 부러웠다.
아이들은 이제 그룹을 형성하고 있으며 자신을 향한 시선이 그릇된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고 동성애에 대한 편견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10대 동성애자들의 현실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미약하게나마 품었다. 그런데 MBC에서 그 어처구니없는 방송을 내보낸 것이다.
MBC <뉴스투데이-현장 속으로> “‘이반’ 문화 확산”을 보고 과거의 침묵하던 시절이 되살아났던 것은, 그 안에 출연했던 사람들이 침묵할 것 같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카메라에 담긴 동성애자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와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었고, 이성애자들 또한 “한 번쯤 생각해봤을 것 같다”고 동성애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표했다. 그러나 MBC 보도는 이들을 매우 이상하고 위험한 것처럼 취급했다. 그래서 다시금 ‘침묵에의 강요’가 들이닥칠까봐 두려웠다.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메인 화면과 게시물,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진들을 카메라에 담아 내보낸 이 보도로, 수많은 동성애자 커뮤니티가 또 “당분간 폐쇄”를 결정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걱정스럽기도 했다. 길을 지나다니는 커트 머리의 10대 여성들을 무작위로 찍어 동성애자로서 보도하는 행태 때문에, 여자라면 긴 머리여야 한다는 지침을 또 강요당할 것 같아서 속이 상했다. 레즈비언 바(bar)에 잠입하여 몰래 찍어 내보낸 영상 때문에, 많은 레즈비언들이 바에 가서 대화하는 것조차 두려워할 것을 생각하니 분노가 일었다.
우리 사회에서 정말 유행하고 있는 건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애를 핍박하는 행태라는 생각이 든다.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누구나 즐겨 하고 어디서나 용인한다. 심지어 공중파 방송 MBC에서 어이없는 허위보도, 동성애자 인권을 마구 침해하는 보도를 해놓고도 지금까지 사과 한 마디 없다.
2002년도에 <그것이 알고 싶다>가 방영된 직후, 한국여성성적소수자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현 한국레즈비언상담소)가 인권침해 부분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커뮤니티를 통해 전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인권단체들 및 레즈비언들과 함께 항의전화를 하고, 항의메일을 쓸 것이다. 이미 많은 레즈비언들이 그렇게 하고 있으며 전화와 메일에 답하는 MBC 담당자들의 적반하장 식 태도가 끊임없이 레즈비언 커뮤니티에 전달되고 있다.
나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하루 빨리 동성애 핍박의 유행이 끝날 수 있도록, 나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 '일다'에 게재된 모든 저작물은 출처를 밝히지 않고 옮기거나 표절해선 안 됩니다.
ⓒ www.ildaro.com
여성주의 저널 일다 네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