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헤어져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며 집으로 오던 길에 누군가 나를 부른다.
"형."
눈을 간신히 비벼 뜨며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본다. 초점 맞추는데 한참 걸렸다. 그였다. 예전에 연인이었던 동생. 머리를 빡빡 밀어선지 술 취한 눈으로 한참 초점을 댕겼다 밀었다... 3년 만인 것 같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마지막에 전화번호를 물어보길래 이렇게 대꾸하고 말았다.
"예전과 똑같아. 너는?"
"나도 예전과 똑같아."
물론 예전과 똑같겠지. 하지만 난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사정은 마찬가지. 3년 전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우린 똑같은 질문과 대답을 나누었었다. 예전과 똑같아. 한 번도 이후에 전화하지 않았던 그 번호를 여태 서로 기억할 리 만무할 터, 그 말은 어떤 푸른 공허함으로 부옇게 에워 쌓여 있다. 예전과 똑같아.... 아마도 우린 이후로도 서로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서울에 홍수가 날 정도로 억수같이 비가 퍼붓고 번개가 내려치던 날, 내 신발을 들려준 채 그를 엎고 맨발로 물에 잠긴 아스팔트를 첨벙거리며 뛰어가던 그 찬란히 아름다운 새벽의 장면은, 천둥이 칠 때마다 터져나오던 그와 나의 웃음소리는 그저 기억의 표면에 깊히 새겨진 암각화일 뿐.
지금, 후두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2005년의 장마, 시작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