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커밍아웃' 감염인 게이의 삶을 이야기하다
글 | 남웅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공동운영위원장)
감염인으로서 자기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다.
2016년 성소수자인권단체, HIV/AIDS인권단체, 감염인 자조모임과 개인 활동가들이 결성한'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는 올해 월례 정기모임을 기획했다.
남성 동성애자의 커뮤니티 문화와 섹스, PrEP(Pre-Exposure Prophylaxis, 바이러스 노출 전 예방요법), 동성애-에이즈 혐오,
의료접근권, 2-30대 감염률 증가 등 산재한 HIV/AIDS 이슈들을 한데 엮어 같이 이야기 나누자는 취지다.
그간 HIV/AIDS 이슈 관련 집회와 강연, 교육과 토론 형식의 프로그램들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근래에는 성소수자 인권단체와 감염인 자조모임을 중심으로 감염인과 비감염인, 전문가와 활동가, 이슈에 관심 있는
성소수자 대중의 교류도 빈번히 이뤄져왔다. 단적으로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는 성소수자 인권단체와 감염인
자조모임이 함께하는 첫 연대체로서 수년의 연대가 일군 결실이다.
하지만 활동 뒤에는 아쉬움이 잔영처럼 남았다. 양질의 내용이 공유되고 관계가 만들어짐에도 프로그램 안에서 맴도는
느낌이랄까.
'HIV/AIDS 인권운동'이라는 틀과 경직된 언어가 운동(또는 성소수자 인권단체) 밖 성소수자 대중과 커뮤니티 PL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찾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지적도 꾸준했다.
하지만 질병이 혐오로 인식되는 가운데 준비 없이 질병당사자로서 드러내는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것 역시 쉬운 선택일리 없다. 그렇기에 네트워크 모임은 커뮤니티 내 HIV/AIDS 온도를 확인하며 관계를 단단히 엮어야 하는 과제 역시 안고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질병에 대해 편한 분위기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떠돌았다.
문턱을 낮추고 HIV/AIDS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정기모임을 준비했다.
이름하야 '키싱 에이즈 쌀롱(Kissing AIDS Salon)'. 성급하게 대안과 방향을 세우기보다 서로의 입술을 읽으며 커뮤니티
안팎 질병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나누고 모아내자는 취지다.
한편으로는 HIV/AIDS에 덧씌워진 성적 낙인을 뒤집어보자는 욕심도 있다. 서로를 고립시켜온 환경을 더듬어 관계 가능성을 모색해보자는 바람도 작용한 것 같다.
여느 관계의 시작처럼 서로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신호를 주고받으며 교감하고, 쓰다듬고 만지고 끌어안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함께 준비한 활동가는 이를 두고 '스킨십'이라 불렀고, 우리는 모임의 구성을 관계형성의 단계로 설정했다.
그렇게 시작한 첫 모임 주제는 '찔러보기'였다.
상대를 찌르고 간보려면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취지에 부합하고자 우리는 과감히 종로의 게이 칵테일 바를 빌렸다.
낯선 회의실보다는 익숙한 공간이, 차가운 형광등보다는 은은한 조명 아래 무거운 주제를 좀 더 부드럽게 가져갈 수 있으리란 기대였다.
게이바는 성소수자로서 나를 드러내고, 당신을 만나는 장소이다.
무성한 소문들이 드나들었지만 은밀한 고백들도 병존해왔다. 쉬쉬했던 단어를 토해내며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은 사적인 소통과 쾌락의 경험을 공적으로 열어제끼리란 기대가 있었다. 말하지 못했던 것, 일부러 말하지 않던 이야기를 드러내는 자리인 만큼, '커밍아웃'을 주요 키워드로 잡았다.
여느 만남처럼 첫 대면에는 나의 정체를 밝히고 상대를 확인한다.
감염인으로서 자기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오픈된 행사에 감염인임을 드러내는 자리는 남다른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는 비단 당사자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참여한 이들 역시 내 안의 질병혐오를 내려놓고 HIV/AIDS 이슈에 관심을 표하며 우리의 삶을 지지하겠다는 모종의 결심이 따랐을 터. 신청한 이들 중에는 행사장을 배회하다 들어오지 못한 이도 있었다고 한다. 에이즈를 이야기하는데 참여조차 머뭇거리게 만드는 걸림돌은 무엇이었을까.
주저하는 심정도 이해하고 기다려야겠지만, 오늘의 행사가 에이즈에 대한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플랫폼이 되면
좋겠다.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하는 데 있어 감염사실은 넘기 힘든 능선이다.
질병당사자로서 커밍아웃은 게이로 커밍아웃하는 것과 무게가 다르다.
패널은 저마다 다른 위치와 경험을 고려하여 골고루 안배했다.
감염 23년 차를 맞은 베테랑 활동가가 있는가 하면, 주변에서 감염인 동료를 보고 이슈에 눈 뜬 비감염 게이남성도 있다.
감염인 운동단체와 자조모임에서 활동하는 20대 당사자 활동가, 그간 활동해온 게이인권단체 안에서 감염사실을 커밍아웃하고 단체 내 자조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는 이도 패널로 참여했다.
소개와 함께 저마다 경험해온 감염인-게이라이프로 포문을 열었다.
감염인으로서 자신을 커밍아웃하는 시도가 그간의 관계에 변곡점으로 작동하더라는 이야기가 공통적이었다.
치부로 여겨지는 내 모습을 드러냈으니 관계변화는 당연하다.
관계가 단절되고 좁아질 수 있기에 커밍아웃을 자제하라는 연륜 있는 활동가의 조언에는 PL(People Living with HIV/AIDS)로서 당당하게 살고 있다는 다른 패널의 자신감이 경쾌하게 받아친다.
성소수자 인권단체와 같이 꾸준한 HIV/AIDS 인식개선과 캠페인으로 인권감수성을 높여온 공동체에서 질병당사자를 환대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변화가 아니다. 하지만 수년을 함께 해온 단체에서 감염인 명찰을 바꿔 달고 활동하는 것은 의도와 상관없이 새로운 정체성으로서 관계 재조정을 요청한다. 감염인 친화적인 공간일지라도 일상 속
긴장은 놓기 어렵다.
지속적으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혐오와 낙인을 이겨내는 것 역시 가능할 리 없다.
나를 드러내고 정체를 고백하는 것은 한 번의 선언으로 갈음되지 않는다.
친밀한 관계 속에서도 감염사실을 인지하고 신경 써야 하는 감염인의 일상은 상대의 거절과 거리두기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게이로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향유할 수 있는 업소와 모임에서조차 감염인 게이는 눈치 보며 출입을 허락받아야하는 이로 강등당한다.
몸의 아픔은 소문이 되고 단절로 돌아오면서 관계의 아픔으로 다가온다. 이는 좌절과 체념으로 연결되어 자존감을
쪼그라트린다.
물론 감염사실을 숨기는 건 어렵지 않다. 큰 문제가 없는 한 당사자들은 비감염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의 건강을
관리하고 유지한다. 아니, 관리를 인지하며 꾸준히 건강을 챙기는 PL이 부주의한 생활에 노출되기 쉬운 비감염인보다
더 좋다는 주장도 과언이 아니다. 말인 즉,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감염사실을 밝히지 않아도 큰 문제없이 게이로서
동료를 만나고 사랑을 하며 일상을 영위한다. 그러는 중에도 PL 게이들은 게이커뮤니티와 별도로 감염인 자조모임에
들어가 질병의 정보를 교환하며 평소 감염인으로서 자신을 숨겨야 했던 봉인을 해제한다.
게이이자 감염인으로서 질병당사자의 삶 자체가 내적 분열을 겪는 것이다. 이는 그간 국내 성소수자 커뮤니티 HIV/AIDS 인권운동이 마주했던 '감염인과 비감염인 사이 단절'이라는 추상적인 문제의식이 감염인 내부에 구체적인 갈등으로 이미 존재해왔음을 시사한다. 부지불식 간 당사자는 자신이 감염인임을 확인하는 상황에 지속적으로 직면한다. 에이즈에 대해 상식 없는 이야기로 소문을 부풀리는 대화가 자꾸 귀를 찌르는가 하면, 섹스를 하면서도 감염사실을 알려야 하는지 몇 번씩 협상을 치른다.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하는 데 있어 감염사실은 넘기 힘든 능선이다.
질병당사자로서 커밍아웃은 게이로 커밍아웃하는 것과 무게가 다르다.
약통과 진료기록은 가까운 동료나 애인에게 노출되기 쉽기 때문에 감염인의 관계는 가장 가까운 지점부터 취약하다.
HIV/AIDS는 삶의 일부가 되어 생애주기의 혈색을 바꿔놓는다. 만성질병처럼 되었다고 하지만, 감염인은 만성적인 낙인과 스트레스 역시 안고 가야 한다. 낙인이 계속되면 질병은 치부가 된다.
감염사실을 오픈한 활동가는 일상의 만남조차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자신과 만나는 이를 감염인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질병당사자의 삶에 이중삼중의 검열이 일상 곳곳 녹아들어 있다.
감염사실을 확인함과 동시에 게이라이프를 시작했다는 청소년‧청년 감염인 인권단체 활동가는 상대에게 자신을 오픈하는 자리가 익숙하다고 털어놓으면서도 감염확인 시점부터 매번 자신의 감염사실을 밝힐 때마다 게이 인생 끝났다는 농담조의 자조를 반복한다. 시작과 동시에 끝인 순간들이 반복되는 감염인 게이의 삶은 어떤 롤러코스터를 타고 지금에 왔을까. 질병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쇄신하고 싶지만, 체념이 저변에 스며들면서 당당하게 살겠노라는 의지는 아픔의 감정을 숨기며 살아야 하는 가면놀이가 되기 쉽다.
그렇기에 커밍아웃은 그동안 쉬쉬했던 HIV/AIDS를 이야기하고 내 안의 에이즈 혐오를 깨우치며 질병을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당신과의 새로운 관계에 노력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서로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관계에서 무엇을 배려할지, 언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보다 세심하게 익혀야 한다.
낙인으로 가득했던 HIV/AIDS를 관통하여 관계를 만드는 시도는 공감과 지지의 마음만큼이나 기예가 필요하다.
지금의 외로움이 나만의 문제가 아님을,
당신의 고통은 무엇으로부터 만들어지는지를 같이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토요일 오후 5시, 종로 게이바에서 HIV/AIDS를 드러내놓고 이야기 나누는 장면이 조금은 섹시하게 느껴졌다.
당신과 나 사이 밀착된 거리에서 나눈 이야기가 실체를 확인할 길 없는 소문이나 혐오 섞인 농담들이 아닌 것은 가장 큰
변화로 체감된다.
HIV/AIDS라는 민감한 주제의 프로그램에 대해 흔쾌히 자리를 내어준 업소 사장님의 지지 역시 커뮤니티 온도 변화의
신호일 것이다.
행사에는 40여 명의 사람들이 영업시간 전의 바를 가득 채웠다. 기대 이상의 참여였다. 무엇이 이들을 끌어들인 것일까.
질병을 이해하기 위해 정보습득만으로는 부족했을 테니, 질병당사자와 함께 호흡을 맞춰보고 싶었던 마음은 아니었을까? 인권단체 교육장보다 게이업소가 접근하기 편해서? 답은 아직 정리되지 않지만, 게이 업소에 사람들이 모여 HIV/AIDS를 이야기 나누는 자리는 새로운 풍경으로 남는다. 감염사실을 숨기고 눈치 봐야 하는 커뮤니티 공간에 감염인으로 초대되어 동료들 앞에 질병당사자 게이의 삶을 이야기하는 경험은 업소에도 이전에 없던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스스럼 없이 드러낸 질병당사들과의 대면은 커뮤니티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낙인과 혐오는 사람의 모습을 평면으로 압착한다.
납작해진 당사자의 모습은 불결하고 불행하며 불쌍한 대상으로 추상화되고 접촉 없이 시뮬레이팅 될 뿐이다.
비빌 언덕 없이 어플리케이션으로 사람을 만나고 게이스북으로 소통하며 외로움을 만성으로 안고 있는 성소수자의 취약한 관계망에 낙인과 혐오는 언제든 배제와 무시, 소문과 검열의 얼굴로 침투할 수 있다.
이미지만 남은 질병당사자는 쉽게 찢기고 잘려나간다.
감염인 인권은 인정하지만 그가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상상하기 어려운 데에는 표면상 구호에
안도하며 에이즈에 무관심하고 당사자의 존재를 뒤로 제쳐둔 결과가 아닐까. 추체험된 질병에 대한 무관심 속에 관계는
녹슬고 예방은 불감(不感)할 수밖에 없다. 진전 없는 상황 속에서 HIV/AIDS는 너무 막연하거나, 한순간 재난으로 찾아와 삶을 위협하곤 한다.
당사자들이 2차원 평면을 깨고 하이라이트 조명을 받으며 커뮤니티 구성원들 앞에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시도는 관계의 감각을 깨우는 돌기로 무감했던 커뮤니티 신경망을 자극한다. 그렇게 HIV/AIDS는 당신과 분리된 문제가 아님을, 당신 가까이에 PL 동료가 있음을 몸으로 경험케 한다. 이는 비감염인에게만 국한된 감상이 아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감염인이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자기 이야기를 청중에게 던지는 모습을 보고나서야 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감염인 참여자의 이야기,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HIV/AIDS인권을 숙고하고, 감염인 자녀를 상상할 수 있는 아프지만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게이 자녀를 둔 부모의 감상은 행사의 의미를 되새겨주었다.
'키싱 에이즈 쌀롱'이 감염인으로서, 성소수자로서 외로움을 채우고 압박과 고통을 완전히 없애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외로움이 나만의 문제가 아님을, 당신의 고통은 무엇으로부터 만들어지는지를 같이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다.
완치할 수 없는 상처들을 공감하며 관계 맺을 권리로, 아프지 않을 권리로 함께 풀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
감염인으로서, 성소수자로서 한데 모여 결핍과 불안, 불완전을 읽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 인권운동의 책무임을 깨닫는다. 오늘의 공기를 기억해야 한다.
관객들이 귀를 열고 마음에 이야기를 담는 모습들이 적잖이 가슴에 남는다. 상대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기에 적합했던
업소의 조명은 행사 분위기를 은은하게 휘감았다.
대화는 농밀했다. 긴장인지, 애착인지 모를 조용한 표정들이 장내를 구름처럼 부풀렸다. 터뜨리고 싶은 따뜻함이었다.
빗장을 열면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것 같았다. 객석에 들어가 아는 사람들과 같이 떠들고 싶었다. 행사 이후 한 패널은 자신을 향한 하이라이트 조명 대신 모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도록 공간 전체를 밝혀주기를 요청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저마다의 세계를 읽어낼 필요가 있다.
질병 당사자의 자기 드러내기는 그들을 지지하는 그간의 시간들과 동료들이 있어왔기에 가능했다.
'키싱 에이즈 쌀롱'을 통해 단단해진 관계들을 커뮤니티에 물들일 수 있다면 좋겠다.
3월 모임에서 표정을 읽으며 간을 봤다면 4월 모임은 작정하고 밀착된 이야기들을 가져갈 계획이다.
주제는 '섹스와 감정- 에이즈 만지기'. 마침 꽃봉오리가 사방 천지에 터지며 번식의 신호를 향기롭게 흩날리는 계절이다.
따뜻한 대기 너머 당신의 감정을 만져볼 차례다. 연속성을 갖기 어려운 일회적 관계들의 집적 속에 어떤 감정의 굴곡이
있었는가를 읽어내며 관계의 근육을 단단히 하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귀를 열고 몰두한 애정 어린 고요로부터 상대로부터의 파장을 읽고 신호를 주고받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