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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이 업소가 밀집한 방콕의 실롬 거리에서 열린 게이 퍼레이드. EPA/ NARONG SANGNAK

[레드 기획]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나라 밖 안식처, 세 남녀의 일본·타이·티베트 이야기

제2의 고향이 나를 당기네

여행은 사람을 바꾼다. 국경을 넘어선 여행에서 자신의 몸에 딱 맞는 영토를 발견하는 이들도 있다. 어딘가 우연히 갔다가 그곳에서 자신이 그리던 문화나 자유를 발견하는 이들이 적잖다. 타이로 가는 게이들, 인도나 티베트의 정신문화에 심취한 이들이 그렇다. 나아가 누군가는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래서 몸은 여기에 두었으나 마음은 그곳을 향하는 이들이 적잖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 부재한 것을 말한다. 그들의 꿈을 보면 그들의 자유를 채워주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이 보인다. 그들이 그곳에 ‘당기는’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자유의 공기가 이곳엔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 해는 일하고 한 해는 여행을 다니는 ‘족’도 생겼다는 뉴스가 나오는 시대다. 개발시대의 부모에게 서울이 제2의 고향이었다면, 글로벌 시대엔 뉴욕이나 도쿄 혹은 방콕이나 라싸를 제2의 고향으로 꿈꾸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도 이상한 현상은 아니다. 그들의 꿈이 충분히 현실적이진 않을 수 있지만, 그들의 희망엔 무시하기 어려운 진심이 서려 있다. 다른 세계를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유를 찾아서 자유 대한을 뜨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에서 진정한 휴식을 맛본다는 사람, 타이에서 마침내 자신이 된다는 게이(남성동성애자), 티베트에서 영혼의 안식을 얻는 사람이 그들이다. 심지어 그들의 일부는 ‘비록’ 몸은 한국에 있지만, 마음은 그곳에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요즘엔 환율 폭등으로 근심도 생겼다. 이렇게 자신이 태어난 땅이 아닌 곳에서 제2의 고향 혹은 마음의 안식처를 찾은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뒤집으면 한국에 없는 자유가 보인다.

“비밀인데, 일본에 또 다녀왔어”


“이건 아무한테도 하지 않은 이야긴데….” 최지윤(34)씨가 망설이며 말문을 열었다. 최씨는 10월에 2박3일 ‘남몰래’ 일본을 다녀왔다. 요즘같이 환율이, 더구나 엔화 가치가 폭등한 시절에 ‘또’ 일본에 다녀왔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에겐 일본 여행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중요한 ‘존재의 이유’다. 이렇게 1년에 두세 번 일본에 다녀오지 않으면 심지어 ‘왜 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마침 환율이 오르기 전에 샀다가 남은 엔화도 있었다. 그래서 짧은 일정이지만 마음먹고 다녀왔다. 어느새 4~5년. 한 해에 두세 번씩 나가보니 어느새 10번 넘게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남들은 다른 곳도 가라고 하지만, 그에게 일본은 가장 편하고 여전히 그리운 곳이다.

딱히 일본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다. 일본의 지인이 ‘제발’ 한번 오라고 해서 그러면 가보지 하며 처음 발을 디뎠다. 도쿄는 시큰둥했는데 도쿄 주변의 도시에 짧은 여행을 가면서 그는 일본에 ‘꽂혔다’. 사찰과 온천이 있는 니코는 산책하기에도 무척 좋은 도시였다. 사람들이 일본에 왜 가냐고 물으면 그는 항상 답한다. “요양하러.” 대개의 한국인들처럼 그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일에 치이고 사람에 지친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여행은 편안히 심신을 쉬다고 오는 요양. 그는 “전화가 되지 않는 곳이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국내가 아니라 해외다. 하지만 그가 얻는 휴가는 한 번에 길어야 일주일. 비행 시간을 따져서 요양 갈 만한 곳은 중국과 일본, 멀어야 동남아. 하지만 너무 시끄럽거나 고생스러운 곳은 피하고 싶다. 게다가 대도시보다는 소도시가 좋다. 시골을 선호하는 그에게 일본은 안성맞춤의 환경이다. 불편하지 않은 교통, 적당한 가격에 맛있는 음식, 깔끔하고 볼 만한 주변 경관, 일본의 소도시엔 그것이 ‘패키지’로 있었다. 중국은 아직도 시골로 가려면 교통이 편치가 않고, 동남아는 너무 관광지화돼 있어서 꺼려졌다.    

그는 안다. 일본의 소도시에 내리면 역광장에 반드시 여행자 안내소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시골로 가면 미리 숙소를 예약할 방법도, 필요도 없다. 역에 내려 안내소에 적당한 가격의 숙소를 물어서 찾아가면 그만이다. 지방이라 숙박비도 저렴하다. 소박한 숙소에 머물며 대개는 자전거를 빌려서 도시를 천천히 돌아다닌다. 그렇게 다니다 길을 물으면 아예 목적지까지 안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친구도 생긴다. 가끔은 그렇게 사귄 친구가 한국에 오면 이번엔 그가 길잡이가 된다. 서로에게 요긴한 여행 정보를 제공하는 품앗이도 자연스레 이어진다. 이렇게 다니면 비용도 크게 들지 않았다. 그는 농담 삼아 “일본에 애인 예닐곱은 있다”며 “시골로 갈수록 사람을 만나는 기회는 더 많이 생긴다”고 말했다.

예약하지 않아도 이벤트가 생긴다. 그는 관광상품이 아닌 지역행사를 즐기는데, 언젠가 오사카 인근에서 동네 캐럴 대회를 보았다. 식당 주인, 노인들이 나와서 캐럴을 부르는 동네잔치였다. 오키나와에선 시골 마을회관을 지나다 미군기지 반대 펼침막을 보았다. 평소 평화운동에 관심이 있는 그는 들어가 사정을 물었다. 주민이 자료도 보여주고 집회도 알려줬다. 마침 집회 장소 주변에 괜찮은 식당도 있어서 점심도 먹을 겸 집회에 들렀다. 나중엔 주민들끼리 가는 전쟁 희생자를 위한 추모공원 버스여행도 함께 다녔다. 가끔은 괜찮은 문화행사도 ‘건진다’. 2008년 경기도 일산에서 ‘뻑적지근하게’ 열렸던 모딜리아니 전시회를 그는 2007년 일본 홋카이도의 소도시 미술관에서 보았다. 그래도 그곳이 지겨워질 때면? 여행의 끝자락에 다음 여행지를 물색하러 다닌다.

갈수록 일본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문득 로또 당첨이 되면 뭘 할까 상상하다가 일본에서 소수민족 연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열도를 떠돌며 보았던 소수민족이 인상에 남아서다. 그래서 요즘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관련 자료도 모은다. 그는 날마다 오르는 엔화를 보면서 한숨을 짓지만 “다른 지출을 줄여도 아마도 가겠죠”라고 말한다. 참, 그가 일본에서 편안한 이유는 또 있다. 일본은 여전히 흡연자 천국이다. 신칸센 기차 안에도 흡연칸이 따로 있을 정도다. ‘젊은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고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상한 시선도 없다. 생김새가 비슷하니 외국인 티가 나서 부담스런 시선을 받을 일도 적다. 그렇게 그는 일본에서 여성으로 자유를 얻는다.

방콕의 매연과 습기까지 그리워

“방콕 공항에 내리면 나는 매캐한 매연과 훅 끼치는 습기가 내게는 자유의 공기지.” 그렇게 말하는 프리랜서 디자이너 정진수(39)씨의 눈에는 그리움이 어렸다. 타이는 아시아에서 성소수자에게 가장 개방적인 나라로 꼽힌다. 비교적 동성애에 관용적인 불교문화에 관광산업 육성이란 현실이 더해져 성소수자 여행자도 편하게 여행을 즐기는 나라다.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트랜스젠더 쇼가 성업 중이고, 최근엔 고등학교에 성소수자 전용 화장실이 생겼다고 한다. 정씨는 방콕을 “게이 디즈니랜드”라고 부른다. 게이바, 클럽 등 동성애자를 위한 유흥시설이 업종별로 즐비하다. 더구나 방콕은 언제나 여행자로 넘쳐나 클럽은 밤이면 밤마다 붐빈다. 정씨는 “한국에는 주말에만 있는 것들이 그곳에는 날마다 있다”고 말한다. 동성애자 업소가 밀집한 지역인 실롬 거리에서 낮에도 다른 동성애자를 보는 일은 다반사다. 손을 잡고 다니는 게이 커플도 이따금 보인다. 그는 가끔 게이 전용 호텔에 머무는데, 거기서 일하는 직원도 게이다. 마음만 먹으면 거기선 오직 게이만 만나고 살 수 있다. 그러니 이성애 사회에 포위돼 지내다, 더구나 동성애 억압이 심한 한국에 살다가 그곳에 가면 그는 마침내 자유를 얻는다. 그에게 방콕은 자유의 땅이고, 공항의 매연은 자유의 향기다.

이렇게 그에게 방콕의 실롬은 물리적 거리는 멀지만 익숙한 동네다. 벌써 10번 넘게 거기서 지냈다. 한 해에 서너 번씩 한 번에 일주일가량을 머물렀으니, 지난 서너 해 동안 한 해에 서너 주를 그곳에서 살았다. 이제는 익숙한 동네라 아무런 준비 없이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 온다. 가끔 한국에서 오래 보지 못했던 친구를 그곳에서 만나기도 한다. 그처럼 ‘자유’를 찾아 그곳에 오는 친구들이 적잖기 때문이다. 한국 게이 사이트 여행 메뉴엔 방콕 정보가 빼곡하고, 타이 여행을 함께할 친구를 찾는다는 글도 자주 올라온다. 나아가 방콕에 정착해 사는 한국인 게이도 갈수록 늘고 있다.

요즈음 타이의 정치 불안이 그에겐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시위대 사이에 충돌이 있는 기간에 여행을 가도 좋은지, 클럽은 여는지, 방콕의 사정이 그의 생활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가끔은 타이인 친구들을 생각하면 타이 정치의 비극이 정말로 슬프다. 그래서 타이 정치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 타이 영자신문 사이트까지 찾아가 뉴스를 본다. 또 여유가 된다면 조기 은퇴해서 타이에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 한때는 타이어 학원도 다녔다. 서너 해 전에는 방콕의 유명한 마사지 학교에서 일주일 동안 타이 마사지 강습을 듣고 자격증도 땄다. 이렇게 타이는 그에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한국에 돌아올 즈음엔 필수품도 챙기는데, 타이에서 파는 코코아향 샴푸다. 아침마다 그 샴푸로 머리를 감으며 고향의 냄새를 몸에 묻히고, 향수를 달랜다. 방콕은 그가 선택한 고향이다.


‘티베트의 친구’로서 두고 볼 순 없지    

타이 너머에서 영혼의 땅을 발견한 이들도 있다. ‘티베트의 친구들’(thinktibet.cyworld.com)에서 활동하는 대학생 안정배(27)씨는 “나에게 여행지는 티베트와 티베트 아닌 나라로 나뉜다”고 말했다. 그만큼 티베트에서 받은 감동이 크고 애정이 깊다. 안씨는 2006년 유라시아 횡단여행을 하면서 4개월을 티베트에서 보냈다. 그는 “티베트의 자연은 나에게 실존의 질문을 던지게 했다”고 말했다. 서울에선 건물에 가려 100m 앞도 보기 힘들지만 티베트에선 가도 가도 설산과 황무지, 오직 자연만 보였다. 사람이 없는 오롯한 자연은 실존의 의미를 되묻게 했다. 자연과 어울려 사는 사람들 모습은 더욱 깊은 감동을 주었다. 흑집에 사는 티베트 시골 사람들은 야크와 양 몇 마리를 키우며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었다. 주식은 야크 육포, 연료는 야크 배설물, 옷은 양털로 만드는 단순한 삶이다. 그는 “이렇게 인간이 많이 갖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지역공동체 운동을 꿈꾸는 그는 그렇게 티베트의 오래된 미래에서 공동체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는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낙후했다고 생각하는 티베트에서 오히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두 번째 티베트 방문에선 티베트 공동체가 파괴되고 있다는 불안을 느꼈다. 2007년 10월 다시 찾은 티베트는 한 해 만의 방문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개발돼 있었다. 중국과 티베트를 잇는 철도 개통과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진 한족 집중 이주의 여파로 티베트 공동체가 더욱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게다가 티베트의 중심인 포탈라궁에는 오성홍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그는 “티베트가 대면한 상대가 엄청나다는 사실이 절절히 와 닿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진 2008년 3월 티베트 봉기와 진압. 그는 “수식어가 아니라 말 그대로 친구가 지금 아파서 구급차에 실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티베트의 친구들’을 만들고 티베트 학살을 알리는 일에 나섰다. 그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의 다람살라에는 지금도 티베트에서 망명해오는 청년들이 많이 있다”며 “인도에서 생활 기반이 없는 이들을 위한 자립운동이 있는데, 기회가 닿으면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과 티베트를 잇는 청년 공동체 운동을 꿈꾸는 그의 마음에 국경은 없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원문은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40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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