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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에 선 동성애자 인권운동

박 성 현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창립 10주년 맞은 ‘친구사이’, 퀴어영화제 ·토론회 등 통해 대대적 ‘커밍아웃’ 나서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도에서는 3월 23일부터 일주일간 3편의 영화가 동시에 촬영됐다. 최진성·이송희일·소준문씨 등 독립영화감독 3인이 보길도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동성애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퀴어 영화’ 제작에 뛰어든 것이다. 감독 3명에 배우·스태프를 포함, 고작 40명 남짓한 인원이 3편의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소요된 기간은 겨우 7일. 제작비도 모두 합쳐 1천2백만원선에 불과한 저예산 옴니버스 영화다.

제작 기간과 비용을 따지자면 김기덕 감독에게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을 안긴 ‘사마리아’(제작 기간 11일, 제작비 5억원)에 비길 만하다. 독립영화감독 3인이 초고속 영화 제작에 나선 이유는 4월 8일부터 11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남성 동성애자 인권운동 단체인 ‘친구사이’가 주최하는 창립 기념 행사에 출품하기 위해서다.
이들이 만든 영화 3편은 ‘보길도에서 일어난 세가지 퀴어 이야기’(가제)라는 한편의 옴니버스 영화로 묶여져 국내외 퀴어 영화들과 함께 동성애자·일반인들에게 선을 보인다. 한국 최초의 동성애자 인권운동 단체라 할 친구사이는 창립 10주년을 맞아 이같은 퀴어 영화제와 토론회 등 대대적인 행사를 통해 적극적인 ‘커밍아웃’에 나선다.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친구사이는 한국 최초의 동성애자 인권운동 모임인 ‘초동(草同)회’의 후신으로 동성애 역사의 산 증인으로 받아들여진다. 1993년 12월 장진석·전해성씨 등 7명의 게이·레즈비언들이 모여 만든 초동회는 이듬해 발전적인 해체를 결정하면서 친구사이로 거듭났다. 초동회에 이은 친구사이 결성은 그때까지 음지로만 돌던 한국의 동성애자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공개리에 드러냈기에 매우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KSCRC/kscrc. org)의 한채윤 부대표는 “80년대 어느 뉴스 앵커는 ‘우리나라에는 동성애자가 없으니 에이즈도 없다’는 말을 방송에서 버젓이 해댔다”면서 “바로 그런 시기에 친구사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사이의 출현과 함께 음지에 있던 동성애자 인권운동도 ‘틈새’에서 ‘전면’으로의 변신을 꾀하게 된다.
94년 2월 7일 발족한 친구사이는 결성 첫해 동성애 관련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대외 활동에 들어가 95년에는 여성 동성애자 모임 ‘끼리끼리’, 연세대 동성애자 모임 ‘컴 투게더’, 서울대 동성애자 모임 ‘마음 001’과 함께 한국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를 결성했다.
97년은 친구사이를 비롯한 동성애자 단체들의 사회 참여도가 눈에 띄게 증가한 해다. 그해 1월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악에 반대하는 노동자 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시작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적 교과서 개정을 촉구하는 집회(6월), 동성애 영화 상영 금지에 반대하는 시위(7월), 동성애 탄압 반대와 표현의 자유를 위한 서명운동(7월) 등 성적 자기 결정권,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위해 목청을 높였다. 해외에도 눈을 돌려 도쿄 국제 레즈비언·게이 필름&비디오 페스티벌, 동성애자들의 국제적 네트워크인 ILGA(International Lesbian Gay Association) 필리핀 마닐라 회의, 인도 뭄바이 세계사회포럼 등에도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 동성애자들의 국제적 연대활동에도 적극 참여해왔다.

2000년부터는 사적 공간이 아닌 공적 공간, 즉 길거리에서 그들이 주인이 되는 ‘퀴어문화축제’를 성황리에 열어 지난해까지 매년 행사를 개최해오고 있다. 동성애자들의 별칭인 이반·퀴어·성적소수자 등 새로운 언어의 탄생·통용이나 호모니 보갈 같은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의미를 담은 용어가 자제·소멸되는 추세에 있는 것도 이같은 공개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친구사이는 이번 행사를 규모면에서나 상징성에서 한국의 성적소수자 인권운동사에서 하나의 전환점 만들고자 한다. 4일 동안 펼쳐지는 행사 기간 중에는 동성애자 운동을 이끌어온 각계의 전문가들이 패널로 참여하는 2차례의 토론회가 벌어진다. 이 자리를 통해 동성애자 인권운동 10년을 결산한다는 계획이다. 최중대 친구사이 대표는 “다소 느슨해진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고삐를 다시 한번 죄고, 보다 능동적인 의제를 생산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의 “동성애자도 존엄성과 인권을 가졌으니 존중해달라”는 식의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우리도 당당한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다원화된 사회에서의 동성애자 지위를 적극 확보해나가겠다는 말이다.
이 행사 기간 중 개최되는 퀴어 영화제만 해도 단순한 구색맞추기식은 아니다. 앞서 3인의 독립영화감독들이 함께 만든 ‘보길도…’에서부터 해외 장편영화 3편, 국내 장편영화 2편, 국내 단편영화 3편 등 모두 9편의 퀴어 영화가 3일간 상영된다. 주최측이 예상하는 관객수가 3천명선에 이를 정도다. 90년대 중반 이후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퀴어 영화 초기작들은 영화적 의미나 예술성보다는 성적소수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문화적 기능에 더 많은 무게가 주어졌다.
하지만 이번 행사는 퀴어 영화가 이런 문화적 퍼포먼스가 아닌 영화 그 자체로 관객들에게 다가설 것이라는 설명이다. 개별 단체가 이같은 행사를 준비하기란 그리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커뮤니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회원들 사이에서도 ‘아웃팅’(원치 않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동성애자임이 알려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30대 동성애자 소멸론이 왕왕 회자된다. 20대와 30대 초반의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비교적 충실하다. 그러나 이들도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지위에 올라서는 30대 후반 들어서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이 사회생활에 핸디캡 또는 위협 요소가 된다고 느껴 이성과 원치 않는 결혼을 하거나 커뮤니티 활동을 꺼리게 된다는 것이다.
친구사이 등 동성애자 인권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는 30, 40대 회원들은 이런 사회적 압력을 이겨내고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지켜낸다는 의미에서 외롭고도 힘든 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다. 영화제를 실무적으로 준비해온 박기호씨는 “지난 10년간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많은 사회적 관심을 불러모았지만 동성애자의 삶의 질은 제자리걸음”이라며 “이번 행사는 동성애자 문화의 다양성을 통해 삶의 질을 높여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문화평론가 서동진씨는 “90년대 중·후반 소수의 동성애 활동가들이 만들어놓은 공간에서 중산층으로 성장한 20, 30대들의 모임인 친구사이가 자신들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표현하게 된 것은 고무적”이라고 반겼다.
친구사이 출범 10주년을 맞아 동성애자 인권운동 단체에서는 발전을 위한 자기 반성의 목소리도 들려나오고 있다. 온라인 회원만 2천5백여명에 이르는 친구사이가 한국 사회 전반을 관통하는 사회적 이슈보다는 커뮤니티 내 회원들의 생활·문화 분야에만 관심을 치중해왔다는 평가다. 후발 동성애자 모임인 동성애자인권연대나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등이 내부 커뮤니티 활동 및 제반 사회단체들과의 연대를 통한 동성애자 인권운동도 병행해온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동성애자로서 자기 행복을 추구하려는 친구사이의 노력은 높이 사지만 그 노력이 자신들이 속한 세상의 변화와 맞물리지 않는다면 지난 10년간의 활동성과도 빛이 바랠 수 있다”고 서동진씨는 지적하고 있다. 당장 구청에 의한 동성애자 혼인신고서 수리 거부, 가부장제 하에서의 이성애(異性愛) 중심주의, 전업활동가 부재 등 극복해야 할 과제는 즐비하다.

인터넷에서만 동성애자이고 컴퓨터를 끄는 순간 이를 감추기 위해 이성애자로 살아가야 하는 이중생활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국에서 동성애자들이 외국처럼 자신들의 정체성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려면 이성애 중심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가치관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한다. 보다 왕성한 대외 활동을 요구받고 있는 친구사이가 이번 10주년 기념 행사를 통해 어떠한 실천적인 대안을 모색해낼까.

뉴스위크 한국어 판 04ㆍ07. 624호

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