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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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안 믿겠지만 방금 전에 얼룩말을 보았다.

얼룩말은 수유리 사거리 한가운데 버티고 선 채 갈피를 못 잡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자동차들은 놀라서 경적을 울려댔고, 사람들은 아닌 밤 중에 홍두깨를 목도한 양 입을 틀어막아 비명조차 지우고 있었다. 누가 그걸 진짜라 여기겠는가. 심야의 도심 한가운데 나타난 얼룩말의 존재는 새벽의 나른함을 일시에 뒤흔드는 충격적 사건이랄 수밖에.

난 담배가 떨어져서 편의점에 들렸고 이어 혼곤한 정신을 깨기 위해 대책없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한 쌍의 연인들이 손가락을 쳐들며 지들간에 뭐라 요란스레 떠드는 게 아닌가. 놀라서 고개를 외틀었는데, 맙소사 수유 역 사거리 한가운데에 서 있는 하얀 말! 난 처음엔 그게 말인 줄 알았지만 점차 시야의 놀람이 걷히면서 줄무늬가 있는 얼룩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어디서 뛰쳐나왔을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사거리 한가운데 서서 불안한 나머지 커다란 눈을 희번덕거리며 당황하던 얼룩말은 느닷없이 의정부 쪽 길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달려나가기 직전 얼룩말의 코에서 흐힝,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너무 놀란 어떤 남자는 자동차에서 뛰쳐나와 핸드폰을 마구 누르며 달려가는 얼룩말을 지켜보고 있었다. 편자가 박혀 있지 않아선지 아스팔트를 딛는 발굽 소리도 없이, 얼룩말은 그렇게 자동차 사이로 위태롭게 달려가는 게 아닌가.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택시 한 대가 급히 방향을 선회하는 바람에 인도의 가로수를 들이박고 말았다. 지나가던 여자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한밤에 나타난 얼룩말 때문에 수유 역 근처 일대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그렇게 멍하니 선 채 하얀 줄무늬 얼룩말이 일으킨 비현실적인 소동을 지켜보던 내 머릿속은 순식간에 허공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제대로 발걸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 몽롱히 서 있다가 집에 돌아와 혹시나 해서 급히 연합뉴스 사이트에 접속해 뉴스를 확인해보니, 번동 드림랜드에서 자정께 사고로 인해 얼룩말 몇 마리가 탈출했다는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사고는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 사육사의 단순한 실수였다. 사육사가 문을 열어놓고 얼룩말 우리 안 잔디밭에 들어가 자고 있었단다.

기사를 접하고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예전에 늑대와 원숭이가 동물원을 탈출해서 주택가에 나타나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는 기사도 얼핏 떠올랐다. 나도 그런 광경을 목도했으면 하는, 늘 바래왔던 환타지가 정말로 눈 앞에 드러난 순간을 어찌 쉽게 기억에서 잠재울 수 있을까.

도심 한가운데로 뛰쳐들어와 콧김을 내쉬며 불안한 눈꼬리로 인간들을 바라보던 얼룩말.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갈기가 조금 날렸던 것도 같다. 가을밤의 찬 공기 속에 흐릿하게 퍼져 흐르던 동물의 땀냄새가 아직도 내 콧등 언저리에 묻어 있는 것만 같다. 그 얼룩말은 어디로 달려간 걸까? 경적 소리를 뒤로 한 채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하얀 얼룩말은 너무도 신비로웠다. 몽환적이다 못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싶을 정도로. 꽃밭을 달리는 유니콘처럼 발굽 소리도 없이 밤의 허공을 훌쩍 비상하듯 달려간 얼룩말의 도저히 믿기지 않은 밤나들이.

놀라운 새벽이다.

모던보이 2005-05-18 오전 08:52

2004-09-30. 픽션

Bobby McFerrin & Chick Corea | 'Round Midnight

min 2005-05-18 오전 10:30

와...ㅋㅋ흥미진진하게 읽었어요~
저 뉴스도 찾아봤어요.ㅋ,,

춤샘 2005-05-18 오전 11:14

태몽일거 같아...

모던보이 2005-05-18 오전 11:22

춤샘, 잠 안 자고 뭐하누? 아까 그 소주, 결국 깠누? 그래, 태몽은 나의 힘.
그래도 오늘은 글이 잘 안 써지네...

min 님, 안녕하세요. ^^;;

기즈베 2005-05-18 오전 11:27

말하지않았수 어니?..내가 유니콘이란거.. 78년 말띠라는..^^
야밤에 듣는 'Round midnight' 정말 죽이네요..
간만에 마음에 드는 선곡이었어..언뉘..^^ 잘자시오..^^

모던보이 2005-05-18 오전 11:29

아침 8시나 9시쯤 잘 거야. 할 일이 태산이구나.
즈베도 라운드 미드나잇 좋아하는구나.
나중에 버젼 달리 해서 많이 올려줄께.

아무리 커밍아웃 충격이 크기로서니, 그래도 조랑말과 유니콘과의 정체성은 헷갈리지 말아야지. 넌 조랑말.
안 그냐?
호홍,~
마음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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