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title_Free
모던보이 2005-04-14 17:02:31
+1 1121
내가 보기에 그는 백수다.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나처럼 집에만 틀어박힌 채 먼지털이개로 세월을 낚고 있는 백주대낮의 철면피가 분명할 거다.

나이는 한 서른 중반쯤 보이고, 이미 머리가 뒤로 탁 트일 정도로 벗겨내려진 뚱뚱한 사내. 그에겐 같이 사는 누이가 한 명 있다. 둘 다 목소리가 쩌렁거리며 같은 반지하 집에 세들어 있는 내 방까지 넘나들 정도로 큰 걸로 보아 필경 남매가 맞을 것이다. 이따금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술을 마실 때에도 두 남매의 목소리는 언제나 도드라진다. 무척 날카롭고 질긴 쇠줄의 차가움을 지니고 있다.

처음엔 누이의 오빠, 라는 소리를 신랑을 가리키는 말인 줄 알았는데, 유치하게 싸우는 것이 꼭 내 누이 동생과 내가 싸우는 소리 같다. 청소 안했놨다고 누이가 호통치고, 반찬이 별로 없다고 오빠가 호통치는 것이 그렇다.

3년 동안의 면밀한 관찰력(사실 난 옆집 남자와 딱 한 번밖에 말을 나누지 못했다. 그건 나중에 말하겠다)에 의거해 남자의 직업 세계를 여기에 소개하면 이렇다.

2년 전, 그는 불규칙하게 집을 들락거렸었다. 밤에도 나가고 낮에도 나가고. 가끔 저녁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는 꼴이 필경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방구석에 처박히길래,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맞았다. 그는 2개월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가난한 아줌마들처럼 소쿠리 가득 들어 있는 구슬들을 줄에 꿰고 있었다. 정확히 가로 30cm, 세로 27cm의 그 집 부엌 창문으로 난 그가 불 꺼진 반지하의 어둑한 방에 쭈그려 앉아 구슬을 꿰는 것을 훔쳐보곤 했다. 아직 IMF가 끝나지 않았음을 내가 훔쳐본 창문의 처연한 미쟝센이 말해주고 있었다.

1년 전, 창문을 틈 타 날마다 들려오는 영어 회화 공부 소리. 직장 혹은 아르바이트를 하다 실직한 옆집 남자는 좋은 직장을 위해 구슬꿰는 일을 그만두고 영어 공부를 한다, 라고 나 혼자 생각해보았다. 텔레비젼 소리도 시부렁 영어, 컴퓨터 소리도 시부렁 영어 천지였다. 그는 하루종일 집에 앉아 영어를 공부하는 것 같았다.

지금, 그는 후배 한 명을 앉혀놓고 뭔가를 함께 공부하고 있다. 대체 뭘까?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어김없이 그 집 부엌 창문을 힐끔거린다. 흑자주색 밥상 위에 올려져 있는 두툼한 책, 아마도 고시 공부를 후배랑 함께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따금 창문으로 들려오는 '법'에 관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얼추 짐작컨대, 직장 혹은 아르바이트를 하다 실직당한 옆집 남자는 구슬 꿰는 일을 그만두고 영어에 매진하다 고시를 보기로 마음을 다져먹었다고, 생각한다.

직장 혹은 아르바이트를 하다 실직당해서 구슬 꿰는 일로 고독을 씹어대던 차에 영어 공부와 고시 공부로 과감한 비약을 감행하고 있는 우리 옆집 남자는 그래도 후배들이 많은 편인 것 같다. 가끔 함께 술도 마시고, 주말 밤이면 찾아와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있다. 나와 비교하면 그는 친구들이 많다. 어떤 날은 새벽에 찾아와 문을 차며, 그를 부르는 후배들도 있다. 그러면 그는 안에 있으면서도 문을 안 열어주는 훌륭한 선배로서의 귀감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마 누이에게 채인 남자 후배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와 얼굴을 마주한 채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컴퓨터를 사기로 결정했을 때였다, 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나답지 않은 거 같다. 실은 한 번도 그 집과 우리 집의 연결 복도를 청소하지 않은 것이 미안해서, 잘 닦여져 민들거리는 복도 바닥을 보다 못해 그 집 문을 두드렸다.

그가 나왔다. 생각보다 얼굴이 크고 하얬다. 맨날 그와 함께 집에 틀어박혀 있는 나도 얼굴이 하얠까?

"저기 인터넷 어떤 거 쓰세요?"
"하나로 쓰는 데요."
"그건 잘 터지나요?"
"그런대로 괜찮은 거 같아요. 우리 후배는 이 근처 사는데, 매가패스가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래요. 그럼 매가패스 써야겠네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끝을 묘하게 맺고서는 왜 내가 그에게 이야기를 걸었던가 싶어 얼른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다시는 말 걸지 말아야지, 이거 참 쑥스러워서...

그처럼 엉뚱하게 말문을 튼 이후 우린 두 번 다시 서로 얼굴을 마주한 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물론 그도 내 존재에 대해 의아해할 것이다. 무슨 남자가, 서른은 넘어 보이는데 집밖에도 나가지 않고 온종일 뭘할까 하는 의구심 말이다.

그도 무척 나를 궁금해할 것 같다. 비가 와도 절대 나가지 않는 나를 위해, 복도 청소는 커녕 우편물이 쌓여도 코빼기 한 번 비추지 않는 나를 위해, 때늦은 우편물들, 시각이 촉박한 독촉장들을 내 집 현관문 틈 사이에 살며시 끼어주는 걸로 보아 그는 무척 착할 것 같고 나를 궁금해할 것 같다. 전에 한 번은 은행에서 나온 차압 경고장을 자신이 직접 받아서는 얼굴도 외면한 채 나에게 건네주기도 했었다.

우리집 옆집 남자는 자정쯤에 자서 아침 일찍 일어난다. 그리고 내가 잘 때쯤, 테레비를 켜고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잘 동안 후배와 함께 흑자주색 밥상을 펴놓고 고시 공부를 하고,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몽상에 잠겨 있을 때 술을 마시거나 잠을 잔다. 직장 혹은 아르바이트를 하다 실직당한 채 IMF의 비극을 체현하기라도 하듯 등 굽어진 아줌마처럼 조그맣게 몸 옹숭그리고 소쿠리 가득 찬 구슬을 세월의 먼지를 낚듯 하나 둘 꿰고 있다가, 영어 공부와 고시 공부로 제 2의 도약을 꿈꾸고 있는 이 옆집 남자는 목소리가 무척 크다.

만일 그가 우편물에서 익히 발견한 '이송희일'이라는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이곳까지 방문한다면, 3년 동안 내가 사귀었던 남자들의 발자취와 여름밤에 창문을 틈 타 흐리마리 들렸을 수도 있는 묘령의 정사 소리가 궁금해서 이곳까지 방문한다면, 다 좋은데 제발 아침에 큰 소리로 누이와 싸우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고 싶다.

잠자기 전에 싸우는 소리를 듣는 것만큼 꿈자리 뒤숭숭하게 만드는 일도 없다. 난 그대들을 걱정하느라, 그대들이 잠자리에 누운 시간에 음악조차 개미 소리 웅웅거리듯 조그맣게 틀어놓지 않은가.

물론 구슬을 꿰다 고시 공부를 하고 있는 이 가난한 옆집 남자하고 싸우면 내가 당연히 질 것이다. 등치가 제법 크다. 내 특기인 아줌마 삿대질로도 전혀 넘어뜨리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내 현관문에 이미 훔쳐본 고지서들과 우편물을 살짜기 밀어넣는 착하디 착한 옆집 남자여, 내가 떠날 때까지 혹은 그대가 떠날 때까지 조용한 이웃으로 지내는 게 서로를 위해 좋을 듯싶다. 그러면 나중에 내가 떠나는 날 혹은 그대가 떠나는 날 전야에 서로 술이라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


◎ 2002/7/23(화) 08:38


후기 : 이 옆집 남자는 작년 야반도주를 했다. 도망가고 며칠 후, 사채업자들로 보이는 얼굴이 새까만 남자 둘이 찾아와서 다른 사람이라는 내 항변에도 불구하고 내가 옆집 남자인데 속이는 것 아니냐는 눈빛으로 나를 오래동안 쏘아보고 갔다. 그리고 지금은 정말 시끄러운 강아지 한 마리와 목소리가 큰 아줌마네 식구가 이사와 살고 있다.  

동자승 2005-04-15 오전 07:16

모던보이님! 조금은 따스한 주말 보내셔요~~ㅇ.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수
2504 차기 교황 선두주자, 동성애는 죄악 모던보이 2005-04-18 942
2503 왠지 게이바를 가고픈 토요일이네요.. 황무지 2005-04-17 756
2502 참, 챠밍 스쿨 장소 섭외 했어요~!!! +1 황무지 2005-04-17 881
2501 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 님 +2 김치문 2005-04-16 896
2500 DVD-R 공씨디가 필요하신분 +2 ちんちんを見て 2005-04-16 851
2499 교활하다, 우리 시대의 주홍글씨 +1 queernews 2005-04-15 554
2498 이번주 금요일을 주목하세요 +5 고어 3센치 2005-04-15 715
2497 늑대와 여우의 사랑? +1 queernews 2005-04-14 590
» 옆집 남자 +1 모던보이 2005-04-14 1121
2495 <한국레즈비언상담소> 개소했습니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 2005-04-14 709
2494 친구사이 봄MT는 언제 가는 게 좋을까요? +6 관리자 2005-04-11 720
2493 한국 독립미디어센터 건설을 위한 토론회에 초대... imc 2005-04-13 606
2492 펠릭스의 모험 모던보이 2005-04-13 806
2491 4월23일 고 윤현석, 오세인 추모의 밤을 개최합니다. 동인련 2005-04-13 597
2490 ^^ 좋은 하루들 보내셨어여.. +3 하기나루 2005-04-13 605
2489 여러가지 복잡한 일들 +5 차돌바우 2005-04-12 1002
2488 한국 최초 레즈비언상담소 개소 queernews 2005-04-12 991
2487 에이즈라는 질병과 동성애 낙인 queernews 2005-04-12 726
2486 [4월인권포럼] '장애를 가진 동성애자에게서 듣는... 동인련 2005-04-12 562
2485 오늘날씨 참좋죠? 수영모임 신입회원입니다 +5 슈렉짱 2005-04-12 703
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