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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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rnews 2005-04-12 17: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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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한가하게 가족들이 거실에 둘러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케이블 TV에서 록 허드슨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잘 생긴 배우였다. 옛날 배우라서 내가 아는 얼굴이 아니었는데, 이름이 어쩐지 익숙했다. 엄마와 아빠는 향수에 젖는 듯한 표정을 지으셨고, 동생도 록 허드슨이 요즘 배우들보다 잘생겼다면서 어느새 온 가족이 TV에 몰입하고 있었다.

나는 그 케이블 프로그램이 어떤 건지 몰라서 옛날 배우들 소개해주는 건가보다 했는데, 한참 록 허드슨의 매력에 대해 소개하던 그 프로그램은 그에게 말 못할 괴로움이 있었다면서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내용으로 이어졌다. 나는 갑작스러운 반전(?)에 놀랐다. 어쩐지 옛날 배우인데도 이름이 낯익다 했더니, 이반 동네에서 들은 적이 있는 명단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땅콩을 집어먹으며 한가롭게 TV를 보고 있던 나는 목구멍에 뭔가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동성애자란 걸 가족들도 감 잡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 때문인지, 가족들 사이에 정적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계속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목이 마른 것처럼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우유를 마시는 것처럼 시늉을 하며 거실 분위기를 살폈다.


그 프로그램은 록 허드슨이 게이라는 게 충격적인 일이라는 걸 얘기하기 위해서, 그 배우가 얼마나 잘 생겼고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는지 설명했던 것 같았다. 못생긴 남자가 동성애자면 그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은 것처럼 느껴지나 보다. 스토리 전개로 봐선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부모님은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록 허드슨이 에이즈로 죽었다고 하시면서, 나보다 7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에이즈가 동성애에 대한 벌이라고 하셨다. "그건 잘못된 지식이에요."라고 얘기하는 내 모습을 잠깐 상상해봤다. 나는 이반 상식으로 배운 걸 써먹고 싶었지만, 에이즈는 동성애자만 걸리는 게 아니고 동성애 때문에 감염되는 게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다시 거실에 앉을 자신이 없어서 슬그머니 내 방으로 빠졌다. 동생은 누나가 동성애자란 걸 눈치 채고 있는데 부모님의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속상했다. 언젠가는 정식으로 동생에게 성 정체성에 대해 진지한 얘기들을 나누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방해공작이 너무 심하다. 동생이 누나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에 동성애에 대한 편견만 잔뜩 머리 속에 집어넣은 포비아가 되어서, 나중엔 나를 설득하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방에 들어와서 인터넷을 켜고 록 허드슨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다. 그 잘생긴 남자배우가 에이즈로 사망한 사실이 미국사회에 준 충격이 아주 컸다고 한다. 에이즈라는 질병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대 사건이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친구인 록 허드슨의 죽음을 계기로 에이즈 퇴치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에이즈를 처음 공식 발표한 게 1981년이었고, 록 허드슨이 자신이 동성애자이고 에이즈에 걸렸다고 밝힌 것도 그 즈음이었다고 한다. 에이즈는 처음엔 '게이암'이라고 불렸다가 동성애자가 아닌 HIV 감염인들이 계속 발견되면서 '후천성면역결핍증'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나머지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얘기들이었다.


에이즈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면 뭐하나, 잘못된 얘기하는 부모님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면서, 하는 자책감이 생겼다. 동생에게는 꼭 제대로 얘기를 해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록 허드슨에 대해 얘기하면서 동성애자라서 에이즈로 죽었다는 식의 내용을 전달한 그 케이블 TV 프로그램도 원망스러웠다. 이런 저런 생각 하다보니 나의 오후는 평화가 깨어진 채 후딱 지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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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이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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