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였던 것 같다.
어제 문뜩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 저 원초의 기억들을 더듬어 내려갔을 때, 그제서야 기억의 표면 위로 봉긋 솟아오르는 하나의 이미지.
창문 밖으로 활짝 핀 과꽃이 보이는 어느 토요일 오후의 호젓한 교실. 당시 실장이었던 난 환경정리를 하라는, 교실 뒤에 있는 보드판에 이런저런 장식을 하라는 담임의 명에 온갖 색종이 속에 파묻혀 토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내 기억들은 조각나 있다. 사각사각 색종이를 오리는 가위, 햇빛과 함께 눈에 들어오는 창밖의 주홍빛의 과꽃, 그리고 내 옆에 있던 키가 작고 잘 생겼던 부실장. 이미지는 어느 순간 녀석의 웃음소리와 함께 껑충 비약한다. 난 내 손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용을 쓰는 그 녀석을 붙든 채 녀석의 몸 위에 있다. 미끌거리는 땀의 기미. 흠뻑 젖었던 걸까? 내 손이 미끌거렸고, 어느새 녀석은 부끄러운 얼굴로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첫키스는 그 애였던 것 같다.
있으나마나한 흐릿한 흔적, 우주를 통틀어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존재감도 부여받지 않았을 그 어렴풋한 첫키스의 추억. 그 녀석의 아이는 잘 자라고 있을까? 아마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가 다녔던 그 중학교를 다니겠지.
2004/10/20
By the Sea | Eleni Karaindr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