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물고기에서 막동이로 분한 한석규가 조직의 명령을 받은 후
살인을 저지르고 형에게 전화 거는 장면이 있다.
원치도 않은 살인을 저지르고 그 죄책감과 밀려오는 두려움,
그리고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과 원망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전화를 끊으려는 형에게 제발 끊지마라며,
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며 전화기를 붙잡게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는 유선 전화가 없다.
휴대폰이 있기 때문에 집에 별도의 돈을 지불하며 전화를 둘 필요성이 느끼지 못해서이다.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고 받기가 익숙해졌을 즈음에는 전화를 짧게 하는 버릇이 생겼다.
비싼 휴대폰 요금 때문일 텐데 덕분에 예전 유선 전화기의 줄을 잡고
밤새 통화하던 추억은 적어도 나에게는 사라진지 오래다.
올해 친구사이 사무실에 앉아 처음 유선 전화기로 누군가의 고민을 듣게 되었을 때
꽤 어색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주제넘게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고 어쭙잖은 방법들을 제시해도 되는 것인지.
그래도 이제는 사무실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꽤 친숙해져
습관적으로 받는 단계까지 되어 있다.
가을이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전과 다르게 전화벨이 자주 울린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울리는 전화의 6할 이상이
아무 말 없이 그냥 끊은 전화라는 것이다.
그런 전화를 받고 나면 전화기를 바라보며 잠시 황망해진다.
고민이 얼마나 깊으면 말 한마디 못하고 끊는 것인지.
버튼을 누르기까지 얼마나 많이 망설이고 갈등했을지.
그래도 기왕 용기 내신 거, 그냥 전화 끊지 마시길...
고민의 해결책을 떡하니 내 놓을 수는 없겠지만
듣고 같이 고민하고 생각해 볼 수는 있을 텐데 말이다.
꼬인 전화줄을 매끄럽게 좀 풀어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