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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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보이 2006-01-19 11:26:05
+0 1492





잘 알려졌다시피 F.W. 무르나우는 양성애자였어요. 미국 캠프 연구 쪽에서는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를 퀴어 영화로 이해하곤 하지요. 때론 바로 이렇게 변주되는 해석의 지평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무르나우가 브람 스토커의 소설에서 영화로 옮겨온 캐릭터들에 섹슈얼리티를 대입해도 말이 되거든요. 아니, 근사하게 맞아 떨어지거든요.

그건 흡혈귀 담론이 창궐해던 중세 사회, 그리고 빅토리아 사회에서 흡혈귀와 흡혈귀에 쏠린 성적 은유가 왜 인기가 있었는지 살펴보면 쉬운 일이에요. 흡혈귀를 의미하는 Vampyre의 어원인 'Vamp'는 '성적으로 유혹하는 여성'을 의미하지요. 영화의 발명 이전 흡혈귀 담론이 가장 인기가 높았던 때는 공교롭게도 성적 억압과 늘 대칭구로 등장하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였어요. 당시의 억압적인 사회 풍경은 이상하게도 고딕주의와 낭만주의라는 대칭적인 유행을 함께 배치하고 있습니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웨어'는 이 둘 모두를 가지고 있어요. 고딕의 괴물인 히스테리칼한 아내를 비밀방에 가둬놓은 로체스터와 제인 에어의 낭만적 로맨스라는 내러티브 말이에요.

그처럼 성적으로 억압적인 사회에서는 '괴물'을 통해 그 자신 대면하기 힘든 욕망을 모두 투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흡혈귀는 성적인 유혹을 동반하는 금기의 존재인 거지요. 고대 사회에서부터 존재해온 종전의 흡혈귀 이미지가 '몽마'처럼 육신이 없는 귀신이었다면, 빅토리아 사회에서는, 더 구체적으로는 브람 스토커의 소설을 통해 비로소 육체를 갖는 존재가 됩니다.

다시 무르나우로 돌아가보죠. '노스페라투'의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부동산 회사의 말단 직원인 조나단은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령 마을로 들어가 드라큐라 백작에게 집을 알선해주려고 하죠. 첫 날 밤, 밥을 먹다가 조나단이 그만 칼로 손을 베요. 그러자 우리의 흥분한 백작 피를 보고는 정신이 혼미해져서 다짜고짜 조나단에게 달려들어, 피 묻은 손가락을 입 속에 쏘옥 집어넣지요. 그리고 다음 날 백작은 작정하고 조나단의 목을 베어 물려고 하는데, 저기 멀리 떨어진 아내는 몽유병에 사로잡혀 그 순간 어쩔 줄 몰라하죠.

그 다음엔 어떻게 되냐고요?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백작은 뗏목 타고 강 건너 바다 건너, 도시로 가게 됩니다. 자기 관을 손수 어깨에 들쳐메고 도시를 헤메는 센스. 결국엔 희생을 감수한 아내의 꾀임에 빠져 백작은 아침 햇빛 속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게 됩니다.

이 플롯은 정확히 '동성애자에게 남편을 뺏긴 아내 이야기'라는 전형적인 도식을 따라가고 있어요. 이 도식에 대한 의심을 더욱 심도 높이는 영화가 이후에 하나 더 나오죠. 바로 베르너 헤어조크의 리메이크작인 '노스페라투'입니다. 우리의 지독한 설교가인 헤어조크(전 그 점 때문에 그를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해요)는 무르나우의 전작에 사운드와 컬러 색을 그대로 덧칠하는 대신 후반의 플롯 변형을 스스로 가져오게 돼요. 섹슈얼리티든, 1차 세계 대전 패배 이후 독일 지식인이 동시에 가졌던 그 표현주의적 절망이든 헤어조크의 관심사가 아니지요.

우리의 헤어조크는 T.S 엘리엇의 '황무지' 서두를 그대로 빌려옵니다. 즉, 흡혈귀의 관심사는 피가 아니라 외로움으로 변하게 된 것. 죽지 못하는 불사의 존재인 흡혈귀가 가장 탐내는 것은 정작 '죽음'이지만 그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사랑을 원한다는 것이 헤어조크식 각색인 셈. 이렇듯 변형된 헤어조크의 '노스페라투'는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에 깔린 섹슈얼리티를 더욱 부각시키는 참조의 영화가 된 것.

80년대 중반 이후 흡혈귀 영화는 에이즈 신화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에이즈 파동을 맞이한 게이 커뮤니티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스케치로 기능하고 있어요. 허나 그저 스케치에 머물렀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요.

요즘 제 느낌은 여전히 뱀파이어 영화는 진화를 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에 필적하는 뱀파이어 영화는 아직 없다고 봅니다. 잔인한 성 정체성의 행로에 대한 무시무시한 리얼리즘, 관이 도시로 쏟아져 들어가는 그 무서움.

좀비 아버지인 조지 로메로는 자신의 3부작을 통해, 루치오 폴치나 유즈나가 퇴행시켜놓은 좀비 정체성을 조금 더 과감히 진화시키고 있다면, 우리의 헐리우드는 이제 마늘과 십자가에도 끄떡없고 작살 총과 레이저를 쏘아대는 흡혈귀를 창조했을지언정 그들의 정체성이 조금 더 진화된 거라고는 보지 않아요. 토드 후퍼가 그려낸 외계 흡혈귀라든지, 웨스 크레이븐이 창조한 SF형 뱀파이어라든지 말이에요.

예외가 있다면 캐서린 비글로우의 '니어 다크', 아벨 페라라 슨상님의 '어딕션' 정도가 뱀파이어를 적극 주체로 설정하면서 존재에 관한 사유를 감행한다는 것 정도.

만일 저에게 기회가 온다면, 키워드는 이렇습니다. 뱀파이어는 노크를 하지 않는다. 거울에 반사되지 않는다거나(오, 브람 스토커의 재연을 꿈꾸었던 우리 프란시스 코폴라 아저씨의 거짓말), 성수와 마늘을 무서워한다거나 하는 뱀파이어에 대한 농담들은 별로 재미도 없을 뿐더러 진화의 가능성도 배태하고 있지 않아요. 노크를 하지 않는 뱀파이어는 어느 순간 바로 내 옆에 와서 내 목을 노리는, 내 욕망에 관한 이야기니까요. 헤어조크의 '노스페라투'인 클라우스 킨스키가 쓸쓸한 눈으로 영화 말미에 고백하는 그 문장은 그래서 조금은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뱀파이어는 노크를 하지 않는다.  

제목에 맞게 마지막 문장을 다시 정렬하자면, 동성애는 노크를 하지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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