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국 대선에서 동성애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재부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민주·공화당 대선주자들은 언론으로부터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있으며, 동성애 관련 단체들은 기부금과 투표권을 무기로 후보들을 압박하고 있다.
동성애 문제의 도화선이 된 것은 피터 페이스 합참의장의 언론 인터뷰. 페이스 의장은 지난 12일 시카고 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군대에서 동성애는 부도덕하다”고 말했는데 그의 발언은 선거전 쟁점으로 비화됐다.
페이스 의장은 동성애 행위를 간통에 비유하면서 “군부대는 게이들이 공공연하게 복무토록 허용하고 있다”며 “동성애를 묵인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의 파문이 커지자 페이스 의장은 이튿날 성명을 내고 “인터뷰에서 도덕적 문제에 대한 개인적 견해보다는 국방정책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며 유감을 표명했다.
하지만 그의 성명이 사과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확인한 동성애 단체들이 들고 일어났다. 의회를 장악한 민주당은 군사위 청문회 등에서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을 상대로 질문 공세를 폈으며, 페이스 의장의 사퇴를 요구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전직 게이군인들로 구성된 ‘서비스멤버스 법적보호네트워크’는 자체 웹사이트에 올린 성명에서 “페이스 장군의 발언은 현재 군복무 중인 6만5000명에 이르는 레즈비언 및 게이 군인들에게는 얼토당토않고 사려깊지 못하며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 단체는 성적인 성향 문제로 군대에서 쫓겨난 수천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게이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 캠페인’의 루이스 비즈케이노 대변인은 “성적인 성향은 군 복무 능력과 전혀 상관없다”면서 “페이스 의장의 발언은 국가를 위해 전선에서 참호를 파고 있는 남녀들에게 모욕적이고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 언론들은 각지에서 지지자 끌어모으기에 주력하고 있는 대선주자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처음에는 후보들이 질문을 요리조리 피했지만, 동성애 단체들의 정치기부금 문제를 거론하면서 압박을 본격화하자 15일 일제히 성명을 발표했다.
바라크 오바마 상원의원(민주)은 동성애가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직답을 피하다가 이날 성명을 내고 “페이스 의장의 생각에 반대한다”며 “지난 6년간 사람들을 이간질하는 이러한 시도가 정치를 너무 소진시켰다”고 말했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민주)도 “동성애가 부도덕한지 여부는 다른 사람들이 결정할 문제”라면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다가 이날 성명을 내고 “내가 답변을 피하려고 한다는 게이들의 지적을 들었다”면서 “존 워너 상원의원(공화)이 동성애가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한 성명 내용을 따랐어야 했다”고 말했다.
게이 유권자들의 표 모으기에 안간힘을 쏟는 민주당 후보와는 달리 공화당 후보들은 보수층과 기독교세력을 의식, 페이스 의장의 발언을 두둔하고 나섰다.
보수 성향이 강한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공화)은 민주당 후보들의 공세가 부적절하고 유감스럽다고 맞받아쳤다. 그는 “페이스 장군처럼 능력 있고 완벽한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개인적 의견을 접도록 기대해서는 안 된다”면서 “이같이 큰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은 누구나 도덕적으로 뚜렷한 견해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페이스 의장의 견해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보내기로 하고, 동료 의원들의 서명을 받고 있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공화)은 국방부에는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라는 정책이 있다면서 “잘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정책은 동성애자를 군대에 복무시키면 사기 저하, 모병의 어려움, 전투부대의 결집력 저하 등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논란이 일자 1994년 게이 군인들에게 자신의 성적인 성향을 비밀로 하도록 못박은 것.
민주당 대선주자 중 한명인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주지사는 “성적인 성향으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종류의 차별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동등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울 것”이라며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정책 폐지 의사를 밝혔다. 민주당은 이 정책의 폐지 내용을 담고 있는 ‘군준비확장법안’을 제출해 놓은 상태다.
이에 대해 공화당 후보 도전장을 내민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주지사는 “이 정책이 큰 의미는 없지만 당장 이를 바꾸면 안 된다”면서 반대했다.
선거전이 격화될수록 이라크사태와 더불어 동성애 문제가 미국 유권자들을 민주당 대 공화당 지지자로 확연히 갈라놓을 전망이다.
워싱턴=한용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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