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서점에 들렀다가 읽고 싶은 책을 발견했어요. <나>라는 책인데요. '육우당'(동성애자 차별에 대해 항의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청소년 동성애자 활동가)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것이라기에 전부터 보고 싶었던 책이었던 지라, 원래 사려던 책과 그 책을 함께 들고 계산대에 섰지요. 그런데 문득 이 책을 사면 가뜩이나 날 (동성애자라고) 의심하고 있던 우리 언니에게 빌미를 제공해주게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어 구입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자주 가는 도서관에 갔습니다. 책을 빌려 보려고 했는데 없더군요. 그래서 이 책과 <엠 아이블루>를 함께 도서신청 했답니다. 얼마 뒤에 책이 들어왔는지 확인해 보려고 도서관에서 검색을 해봤더니 ‘취소됨’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어요. 저로서는 신청을 한 책이 취소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어서 담당자에게 문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몇 통의 메일과 전화를 통해 알게 된 그 분의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답변을 받았죠.
‘000님이 신청하신 도서는 소설의 주제가 동성애를 다룬 것이라 여러 사람들이 공감해서 읽을 수 있을 지가 조금 염려되는 부분이 있어서 희망도서에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주제가 동성애를 다룬 것이라 여러 사람들이 공감해서 읽을 수 있는 지가 염려되어서 희망도서에 반영을 하지 않았다니, 이해가 안 되더군요. 그 도서관에는 사도마조히즘을 다룬 무라카미 류의 책은 들어와있는데, 그런 주제는 여러 사람들이 공감해서 읽고 동성애를 다룬 건 공감해서 읽을 수 없다는 건지 납득할 수 없는 답변이었어요. 그리고 모든 소설에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도 아닌데, 도서관에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책만 희망도서로 반영한다는 얘기도 의아했고요.
저는 계속 메일과 전화를 통해 문의를 했습니다. 답변을 해주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지더군요. 그러나 마지막까지 들을 수 있었던 답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000님이 신청하신 도서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쓰여진 동성애를
다룬 책입니다. 수서담당자로써 동성애란 주제는 간략하게 소개되어진 내용만을 참고로 하여 구입여부를 결정하기는 힘듭니다. 또한 그 대상이 청소년일 경우에는 더욱 신중성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도서 선정기준에 대해 물어보자,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몰라도 제가 신청한 책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쓴 책이라고 말을 돌리셨어요. <나>와 <엠 아이 블루>는 청소년 독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소설인데, 그렇다면 청소년들이 읽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 다음 번에 저는 청소년유해매체물 심의기준에 ‘동성애’ 조항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수서담당자는 거기에 대한 답변은 안 하고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 문의해 보고 들여놓겠다고 하는군요. 청소년유해매체 심의기준에서 '동성애'가 삭제됐으니,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도 동성애를 다뤘다는 이유로 이 책들을 청소년유해매체라고 할 리 없는데 말이에요.
나중에 받게 된 그 도서관의 ‘희망도서 장서지침’에도 제가 신청한 책이 제외될 만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답니다. 결국 담당자가 지침과는 관계없이 자기 마음대로 제외시켜놓고서는 제가 물어보니 딴 소릴 한 거였죠. 아무도 문의를 하거나 항의를 하지 않았다면 그 도서관에서 <나>, <엠 아이 블루>같은 책을 볼 수 없는 거잖아요.
고 육우당이 목숨을 끊은 지 1년 후에 청소년유해매체물 심의기준에서 동성애 조항이 삭제되었지만, 삭제된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지방의 한 도서관의 수서담당자님은 동성애를 주제로 한 책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자신의 잣대로 판단해서 결정하고 있어요.
법이 바뀌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무자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수서담당자가 자기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계속 문의를 해볼 생각입니다.)
* 차돌바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10-20 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