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재촉하는 늦가을 비가 내린 후 서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29일 오후 12시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는 ‘HIV/AIDS 감염인 인권주간 준비위원회’에서 개최하는 거리콘서트가 열렸다. 28일부터 12월1일까지 예정된 HIV/AIDS 감염인 인권주간 행사의 하나였다. 에이즈 관련 인권단체에서 나온 활동가들은 마이크를 잡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에이즈 감염인들의 인권 실태를 호소했고 전단지를 나눠주며 동참을 구했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추운 날씨만큼이나 싸늘했다.
행사장 주변에는 감염인 인권 보호를 호소하며 남긴 엽서와 각종 전시물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넘어지거나 낙엽처럼 흩날렸다. 판소리 노래패인 ‘바닥소리’가 진도아리랑을 개사하여 감염인 인권을 호소하는 노래를 불러도 반응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행사에 참여한 에이즈인권모임 ‘나누리+’의 변진옥씨는 “날씨가 추워서인지 호응이 그다지 높지 않다”며 “신촌이나 대학로 같은 대학가에서는 그래도 반응이 좋은 편인데 직장인들이 많아서 그런 거 같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선 감염인의 인권과 예방을 상반되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감염인의 인권보호가 곧 에이즈 예방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국민들께서 알아주셨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에이즈 감염인들 “한-미 FT 체결되면 약값 올라” 우려
이날 에이즈 감염인들은 콘서트와 함께 ‘한-미 FTA 반대 집회’에 참여했다. 감염인들은 ‘의약품 협상’에 주목했다. FTA가 체결되면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특허권을 앞세워 약값을 올릴 것이고 감염인들은 치료권을 박탈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공공의약센터의 권미란 활동가는 “현재도 2000년 이후의 신약들이 보험수가 문제로 수입이 안되고 있다”며 “FTA가 체결되면 정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치료제 값이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르는 약값보다 감연인들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소외감과 두려움 이었다. 마이크를 잡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호소하던 ㄱ씨를 만났다.그는 한국감염인연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에이즈 감염인이다. ㄱ씨는 서울에서 간호학과를 졸업한후 한 병원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고 있던 도중 2004년 몸이 아파 병원에 갔다가 자신이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현재 가족들은 물론, 옛 직장 동료들까지 ㄱ씨가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ㄱ씨는 자신이 감염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이유를 “두려워서”라고 답했다.
에이즈 감염인들의 가장 큰 적은 ‘편견’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감염사실을 밝혔다가 주변 사람들로부토 의절을 당합니다. 이게 가장 두렵죠” 부도덕한 성생활에 의해 감염되었다는 뿌리깊은 편견이 감염인들을 자꾸 음지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 ㄱ씨의 주장이었다. ㄱ씨도 직장을 다니다가 건강검진을 통해 알려지게 되는 것이 두려워 직장을 그만두었다. ‘더러운 사람’, ‘언젠가 죽을 사람 사람’이라는 호칭이 늘 에이즈 감염인들에게는 따라다닌다. 하지만 ㄱ씨는 아직 약도 먹지 않은 채 건강하게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두 달에 한번씩 병원에서 면역력 수치를 검사합니다. 보통 250 이하가 나오면 그때 약을 먹기 시작하요. 그러면 얼마든지 정상수치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혈압이나 혈당처럼 수치를 조절하면서 사는 병이라는 것은 이제 의학적인 상식이 됐지만 일반인들의 인식은 아직 ‘불치병’ 정도에 머물고 있다. 에이즈 바이러스는 B형 간염보다 전염성도 낮아 일상생활을 통해선 전염될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감염인들은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있다.
ㄱ씨는 “감염인들의 인권 보호를 위한 운동이 내가 해야할 일이지만, 앞으로는 나같은 운동을 하는 사람이 없어야죠. 그런 사회를 만드는게 저의 목표입니다”라고 말하며 다음 집회 장소인 동화면세점 앞으로 뛰어갔다.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간 그는 에이즈 감염인이 아닌 보통 시민이었다.
이정국기자
* 차돌바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10-20 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