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야경이 나를 설레게 한다.
몇 안되는 승객들을 실은 버스와
출렁이는 강물,
멀리 보이는 여의도의 불빛들이
마치 여행이라도 떠나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밤이다.
게다가 옆자리엔 미남디제이까지 있으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나와 그를 태운 버스가 막 천호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좌회전을 하던 버스가 급정거를 한다.
끼이익~ 브레이크 밟는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쏠린다.
그와 동시에 그의 오른 팔이 나를 받치고
그의 어깨가 앞좌석에 부딪힌다.
덜컹.
버스 전체가 앞으로 튕겨졌다가 뒤로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미남의 오른팔은 마치 에어백처럼, 안전벨트처럼 나를 감싸고 있다.
이 남자, 굉장히 근사하다.
늦은 밤 천호사거리는 꽤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경기도 광주 등지로 귀가하는 사람들과
얼큰하게 취했으면서도 2, 3차를 하려는 듯 흥청거리는 사람들.
이 거리가 왠지 낯설지가 않다.
미아리나 천호동, 거기서 거긴가?
그래, 유명한 집창촌이 있는 동네들 아닌가!
그러고 보니 어떤 남자든 잡아채는 포주아줌마들도 눈에 띈다.
첫 데이트 치고는 낭만적이지 않은 거리를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늘은 어디든 판타지한 공간이다.
"포장마차 괜찮지?"
"첫, (데이트라더니-속 마음) 겨우 포장마차에요?"
"왜, 포장마차 싫어?"
"아니, 싫다기 보다는 왜 그런데 있잖아요. 강이 보이는 스카이라운지 같은데... 난 뭐 그런데라도 데려 가려나 했죠."
"거기 보다는 여기가 훨 낫지."
그가 데려간 포장마차는 여느 포장마차와 다를바 없는 평범한 곳이었다.
단골인듯 들어서자마자 주인아주머니와 아는 체를 한다.
꼼장어에 닭똥집이 푸짐하게 차려지고
소주병이 금방 비워져 간다.
미남도 나도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한다.
"오늘 왜 나한테 데이트하자고 했어요?"
"데이트? 데이트라..."
"흥, 뭐에요? 데이트라고 한 건 형인데?"
"데이트는 데이트지. 그냥 니가 궁금했어. 어떤 놈인지. 기집애 같이 생긴 놈이,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나이는 어려 가지구 이상한 노래 틀어 달라고 하구. 왜 그런 노래 좋아하나 뭐 궁금하구. 같이 오는 여자들하고는 친한 거는 같은데 애인은 아닌 것 같구... 뭐, 그런 거."
"형은 그런 거 없어요? 남들이 뭐라 해도... 유치뽕이다 놀려도 상관없이 좋아지는 거, 그런 거 없어요? 난 그 노래가 그래요. 가사도 정말 유치하고 곡도 뽕짝인데, 그냥 좋아요. 다 내 맘 같고... 술먹고 집에 가다가 혼자 그 노래 부르면서 운 적도 많아요."
"나도 그런 거 있어. "
술 때문인지 얼굴이 발그래진 미남이 가방을 열어서 뭔가를 꺼낸다.
삼립빵이다.
이 남자 은근히 귀엽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모르려나?
둥근 빵 가운데에 하얀 크림이 들어 있는 싸구려 빵이다.
요즘도 가끔 사 먹어 보지만 맛이 예전 같지는 않다.
"난 이게 제일 맛있어."
쑥스러운듯 웃는 그의 얼굴이 예쁘다.
"어, 나도 그 빵 젤로 좋아하는데."
"먹어 몰래?"
소줏잔을 앞에 놓고 빵을 나눈다.
어울리지 않지만 우리는 즐겁다.
그가 갑자기 눈을 똥그랗게 뜨면서 묻는다.
"근데 그 노래가 왜 슬퍼? 어린 게 사랑 어쩌구... 그 노래, 너랑 안 어울려. 다음부터는 안 틀어 줄 거야."
"형은 사랑 해 봤어요? 사랑도 못해 봤죠? 난 해봤는데."
난 내 첫사랑에 대해 얘기를 한다.
첫 데이트에 지나간 사랑에 대해 얘기하는 건 금기일 수 있지만
살짝 오른 취기가 나를 들뜨게 했는지
김수희 노래가 생각 났는지 난 이미 떠들어 대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우리 반 애였는데요, 나 좋다고 해놓고... 흥, 내가 지때문에 퀸을 버리고 아바를 그렇게 들었는데... 이제와서 나보고 뭐라 했는지 알아요? 글쎄 내가 여자가 아니라서 안 된데요. 내가 여자 아닌 거 이제 안 것 처럼. 비겁한 놈이에요... 나쁜 놈."
술이란 게 그랬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디제이 박스 안에 있던
후광을 가진 미남에게 별 소리를 다하게 만들었다.
급기야 난 눈물까지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랬지만 창피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 말 없던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미안해."
왜?
뭐가?
"나 비겁한 놈이야."
그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순진남이었다.
여자를 사귄 적도 없지만 남자를 사귄 적도 없다고 했다.
이유를 묻는 내게 그는 술을 마시고 침묵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는 다시 또
"미안해."
내게 미안할 것 없는데
그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술에 취한 미남은 예쁜 눈이 자꾸만 감겨 오는지
아니면 사랑 했었지만 말 못했던 누군가를 생각하는지
한참을 눈을 감고 있었다.
나한테 말해요.
내가 다 들어 줄게요.
이렇게 얘기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만에 눈을 뜬 그는
"나 정말 비겁해."라고 얘기 하더니 내 손을 잡았다.
순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하며 우물쭈물 하고 있는 날 보며
미남, 헤벌쭉 웃는다.
"나 바보 같지?"
아뇨, 당신 바보같지 않아요.
뽀뽀 해주고 싶은 걸요.
맘은 그랬지만 난 그냥 손을 잡힌 채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있기만 해도 좋았으니까.
"너 참 귀엽다."
그의 풀린 눈이 나를 보며 웃는다.
"그 걸 인제 알았어요?"
나도 참 가관이다.
남들이 들으면 어쩌나 싶지만
소주를 탓해야지 뭐 별수 있나?
그렇게 우스운 짓거리를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호통친다.
시간 늦었으니 이제 일어 나란다.
그러는 사이 2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제서야 미남, 정신이 드는지 고개를 흔든다.
길바닥에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나도 하나 달라고 하니까 미남이 노려 본다.
나도 대학생이라구요, 눈을 흘기니까 어거지로 하나 준다.
어느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져 있다.
인적이 끊긴 대로변에서 피우는 담배 맛이 좋다고 느낄 때 그가 말했다.
"너, 우리집에 갈래?"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