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남의 눈을 바로 볼 수 없었다.
그가 너무 빛났기 때문이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하이틴로맨스영화에 보면 주인공 주변이 막 빛나는 거,
그 유치한 장면처럼 미남도 빛났다.
게다가 내 가슴이 너무 뛰어서
그 걸 미남에게 들킬까봐 그를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어느새 미남은 내 앞에 와 있었다.
"늦은 시간인데 괜찮아요?"
미남의 목소리는 디제이 박스를 넘어 와서도 청량했다.
당시에 제일 잘 나가던 라디오 디제이가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배한성(김기덕, 이종환, 김광환 등이 여전히 인기였지만 그 다음 세대로 배한성, 송승환 등이 주가를 높이고 있었다)이었는데 미남의 목소리는 배한성이 질투할 정도였다.
물론 나만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다.
이제 미남의 눈을 보아야 했다.
가슴은 더 뛰고 있었다.
눈을 들었다.
미남의 맑은 눈이 나를 보고 있다.
떨어질 것 같지 않은 입술을 떼었다.
"집에 전화했어요. 친구 집에서 자고 간다고..."(이후 나의 대사는 보라색으로)
아뿔싸, 자고 간다니.
이 말이 왜 나왔을까?
미남이 웃었다.
하얀 이가 드러나는 순간
난 눈을 내리 깔았다.
부끄러웠다.
얼굴이 빨개지고 그냥 도망칠까 생각했다.
"난 재워줄 순 없는데..."
미남이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그 건 오해라고, 나 그렇게 헤픈 사람 아니라고...
그리고 실지로도 학교 앞에서 자취하던 친구 녀석의 집에 가기로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순간적으로 난 내가 헤픈 사람으로 비치는 게 싫었다.
지금은 원 나잇 스탠드가 별 거 아닐지 몰라도
80년대엔 원 나잇은 속칭 '걸레'(마초들이 성생활에 자유로운 여자들을 걸레라고 부르며 조롱했던 시절이다. 지들은 588 등지에서 매춘을 버젓이 하면서도 말이다)들이나 하는 거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코웃음 칠 얘기지만 말이다.
"저, 늦게 친구 집에 가기로, 거기서 자기로 했어요. 그리고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런 사람?"
"그러니까 그 쪽에서 생각하는 그런 사람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얘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이 건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 때 미남께서 말했다.
"어쨌든 일단 나가죠."
미남이 앞섰고 내가 따랐다.
다방을 나서면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를 원망하는
그리고 이 상황이 뭔지 모르겠다는 복잡한 시선의 여자들이 보였다.
난 속으로 승리의 브이자를 보냈다.
가여운 저 여인들은 우리가 나간 후 눈물을 떨구리라.
그녀들이 가여운 만큼 난 우쭐댈 수 있었다.
그게 인생이었다.
어린 내가 아는 인생.
"집이 어디에요?"
이제부터 호구조사 시작인가?
집이 어딘지, 식구가 몇인지, 어느 학교 다니는지...
"왜요? 여기서 멀지 않아요. 미아리요."
"어떻게 하나? 난 집이 멀어요. 신장(하남시)이에요. 천호동 쪽에서 술마시면 좋은데... 거긴 너무 멀죠?"
"아니에요, 학교 앞에 사는 친구 집에 가기로 했어요. 천호동 괜찮아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늘만 날이 아니지만
오늘같은 날이 또 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학교 앞? 어딘데요?"
"한양대 다녀요."
"그래도 꽤 먼데... 정말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택시비 있어요."
때마침 전날 과외비를 받은 게 있었다.
"그럼 얼른 버스 타죠."
그렇게 말하고는 성큼성큼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말을 시작하니까 가슴은 진정이 되었다.
때때로 미남의 눈과 입술이 나를 까마득한 곳으로 데려 가곤 했지만
디제이박스를 나올 때 보다는 한결 나았다.
영화 속에서 현실로 나온 것과 같다고나 할까?
버스를 탈 때까지 미남은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말을 걸 수도 없었다.
버스가 오고 자리에 앉기까지 십분여가 지나는 시간이 너무 길고 아득했다.
미남을 똑바로 볼 수도 없고
다른 곳을 계속 볼 수도 없고
난감했다.
왜 이러지?
난 완전히 주도권을 잃고 미남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럴 순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미남의 페이스에 끌려 간다면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미남은 게이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나만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날 알고 있었어요?"
"그럼요, 매번 같은 노래 신청하는 사람, 그리 흔하지 않아요. 게다가 김수희라니..."
"김수희가 어때서요?"
"그 노래, 반줄에서 신청하기는 좀 그렇잖아요?"
"그래도 매번 틀어 주셨으면서..."
"훗, 귀여우니까. 처음엔 이런 노래를 누가 신청한 건지, 어디 얼굴이나 좀 보자... 그런 생각이었는데, 노래 틀고 보니까 바로 보이더라구. 아, 저 귀여운 남자 애구나. 노래랑 매치가 안 되는 얼굴이더라구요. 근데, 다음에 와서는 또 신청하고... 또... 그러니까 궁금해지던데? 기집애처럼 예쁘장한 애가 왜 이런 뽕짝을 그것도 구슬픈 뽕짝을 좋아하는지."
어느새 미남은 슬쩍 말을 놓고 있었다.
"아저씬 몰라도 돼요. 나만의 슬픔 같은 게 있다구요. 그리고... 말, 까지 마요."
나를 보며 미남이 한참을 웃었다.
"기분 나빴어~~~요? 그럼, 나한테 왜 아저씨라고 해? 아저씨라고 해 놓고는 말 까지 말라니. 앞뒤가 안 맞잖아? 난 첨에 고등학생인 줄 알았어."
내가 아무 말도 없이 뾰로통하게 있으니까
미남이 당황하는 얼굴이 되었다.
미남, 순진한 사람이었다.
"진짜 화난 거에요? 화나면 안 되는데... 난 그냥 내가 나이가 더 많으니까... 그래야 빨리 친해지잖아... 형이라고 부르고 난 말 놓으면 안 될까?... 첫 데이트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헉, 뭔 소리야? 데이트?
그럼 이 남자도 게이?
순진한 꽃미남의 제안을 안 받아 준다면
그건 예쁜 미소년의 도리가 아니었다. ㅎㅎ
그렇게 나와 미남을 태운 버스는 천호동을 향해 가고 있었다.
3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