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이성애자를 위하여
[한겨레21 2006-09-12 08:03]
[한겨레]
▣ 고경태 편집장 k21@hani.co.kr
옛날 신문이 재밌습니다.
규모가 큰 도서관에 갈 기회가 있으면 ‘머나먼 20세기’ 신문과 잡지를 찾아 읽어보십시오. 당대의 사회상과 문화적 풍경들이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깨알 같은 활자와 촌스러운 편집 속에 문장들은 어찌나 비장하고 진지한지요. 신기한 기사들도 가득합니다. 가령 제가 읽은 1967년의 어느 날치 <동아일보> 지면에는 이런 제목이 있더군요. “피카소 간판 내건 카페 사장 구속.” 프랑스 화가 피카소의 이름을 카페에다 붙인 게 죄목이었습니다. 피카소가 공산당원 출신이랍니다.
냉전 시대의 개그쇼 같은 해프닝입니다. 이름이 알려진 유명 인사들의 과거 행적을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아, 그 인간이 저랬구나.” 마치 요즘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 ‘스타들의 초딩 앨범’을 대하는 느낌입니다.
옛날 <한겨레21>도 그럭저럭 볼 만합니다. 10여 년 전 <한겨레21>을 아무거나 펴니 ‘사람이야기’란에 앳된(!) 강금실 변호사가 등장합니다. 판사생활 마감을 기념하는 짤막한 인터뷰였습니다. “이게 <한겨레21> 맞나” 싶은 기사들도 종종 발견됩니다. 동성애와 관련된 대목이 그렇습니다. 이번호 표지를 준비하면서 퍼뜩 10년 전의 에피소드가 떠올라 자료실의 영인본을 뒤졌습니다. 성비 파괴를 다룬 <한겨레21> 기사로 인해 동성애 인권단체 관계자들이 찾아와 항의했던 기억 때문입니다. 1996년 7월4일치인 115호 표지였습니다. 정확히 10년2개월 전의 일입니다.
제목은 ‘성비 파괴 가상 시나리오- 2020년 남성 대재앙’이었습니다. 20세기 남아선호가 부를 성비 파괴의 끔찍한 미래를 상상하는 콩트입니다. 본문을 읽어가다 보니 중간제목 하나가 눈을 찌릅니다. “성전환 수술이 판을 치고….” 그렇습니다. 그 콩트는 동성애와 성전환을 성범죄와 같은 반열에 놓았습니다. 성비 파괴가 초래할 해악의 예로 동성애와 에이즈, 그리고 성전환을 든 겁니다. 잡지가 발간된 뒤 ‘한국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 회원들이 화가 나 <한겨레21>로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동성애와 에이즈 감염자, 성전환자의 인권과 자긍심을 해치는 근거 없는 편견”이라며 반론권을 달라고 했습니다. <한겨레21>은 2주 뒤 사과했습니다. 1쪽의 반론도 실었습니다.
10년 동안 많이 변했습니다. 이번호 표지는 격세지감을 선물합니다. 성적 소수자 문제는 <한겨레21>의 주요한 테마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완고한 독자들은 많습니다.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들을 도착과 변태, 정신이상으로 단정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생각을 바꾸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단, 나쁜 짓은 하지 맙시다. 이번호 표지이야기에 실린 트랜스젠더들의 악몽을 마주하면 그 뜻을 아실 겁니다. 이왕이면, 민주적인 이성애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족: 표지의 주인공은 얼마 전 개봉한 <천하장사 마돈나> 영화속의 오동구입니다. 그와 트랜스젠더가 무슨 관계인지를 설명하는 건 ‘스포일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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