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축제를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온통 술이었던 것 같다. 평소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하는, 잘 가꾸어진 잔디밭, 이름도 거룩하여 총장잔디에 떡하니 앉아 낮부터 밤까지, 어떤 때는 밤을 새워가면서 술을 마셔댔었다. 여기저기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기타와 함께 다같이 노랫소리가 울려퍼지고, 큰 스크린에는 <감각의 제국>이나 <크래쉬> 같은 화제작들의 무삭제 판이 비춰나오던 낮과 밤이 내가 즐겼던 축제였던 것 같다. 흠. 여담인데, 평소에 사모하던 선배가 거기서 <감각의 제국>을 보다가, "야, 너는 저 영화 보지 마라. 주인공 물건 보면서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냐 너?" 하며 킥킥거려서 삐졌었던 기억이 갑자기 난다.
거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잔디를 축제의 희생물로 삼던 불지르기였다. 평소에 밟지 말라는 잔디는 밟지 않으며 살아왔고, 자연을 수호하는 환경주의자인 척하고, 생태주의 서적들에 밑줄을 그어가면서 세미나하던 모습일랑 집어 던지고, 안주를 집어먹던 나무젓가락을 모아놓고 모닥불을 피우곤 했다. 총장잔디라고 불리는 넓직한 잔디 광장에 모닥불을 태우는 것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어떤 금기의 쾌락, 아,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에이, 축제인데 뭐, 하는 그 기분에 취했더랬다. 어차피 다음 축제때까지는 총장잔디에 들어갈라 치면 경비원 아저씨들이 쫓아와 야단을 퍼부을 것이고, 땡볕 아래서 머릿수건을 두른 노동자들이 김을 매어주면서 잔디들은 다시 푸르고 건강하게 자랄 테니까. 나무젓가락 모닥불을 기다리면서. 흠. 축제가 아닌 시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니 조금 섬찟하다. 그러나 축제 때가 되면 그런 것 쯤이야 사라지나니.
오늘 <축제, 세상의 빛을 담다>라는 책을 쓴 김규원이라는 사람과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축제연구자인 이 사람의 말에 따르면, 잘 되는 축제에는 실제로든, 가상적으로든 무언가를 죽이는 의식이 꼭 있다고 한다. 흠. 잔디에 더 불을 많이 놓아야 그 대학 축제는 더 잘 되는 것이었을 텐데. 흠. 퀴어문화축제에 무언가 '죽일' 건 없을까? 말하고 나니 또 섬찟하다.
이 사람의 말들은 이런저런 생각을 들게도 했다.
"축제가 행사로 변질될 때가 많지요. 축제는 자발적이고 즉흥적이고 우연에 기대지만, 행사는 스케쥴이 있어야 하고 시간에 맞춰야 하고 실수가 없어야 해요."
흠. 친구사이에서 벌이는 일이나 퀴어문화축제는 행사이구나. 참 맞는 말이다. 축제는 모름지기 저래야 하는 것. 그런데 당최 어떻게 해야 행사가 아니라 축제가 될까?
"축제가 아주 오랜 세월 지속되며 같은 행위가 반복되면 많은 사람들이 쉽게 따라하고 재미를 느끼지요. 여수진남제에서 시민들이 <뱃노래>를 따라 부르며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요."
흠. 월드컵에서 응원하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도 저런 건가보다. 퀴어문화축제에서도 무언가 쉽게 반복할 수 있는 재미있는 것들을 매년 하다 보면 무언가 생길까?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응용하자면, 비도덕적이거나 도덕적인 축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잘 만든 축제와 잘 만들지 못한 축제만이 있을 뿐이죠."
흠. 가슴이 아픈 말이다. '잘 만들지 못한 축제'라는 말에 자꾸만 찔린다. 친구사이가 벌이는 일들이 축제 같길 원했지만 별로 잘 만들지 못한 것들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뭐, 어떤 면에서는 잘 만든 것 같기도 하다. 친구사이가 퀴어문화축제 속에서 만들어나간 것은 어땠을까?
그러나 퀴어들이야말로, 강영숙의 소설 제목을 빌리자면, '날마다 축제'를 벌일 수 있는 자들 아닐까. 아, 축제 축제. 갑자기 바쿠스 신이 강림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축제의 움직임이 규칙적이 될 때, 참가자의 육체가 통제될 때, 스케쥴에 도착될 때, 의미가 제도화될 때 더 이상 축제가 아니게 되는 것. 뻥쟁이 가람군의 지적처럼, 축제를 발본적으로 재사유해야 되는 지점이 온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