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십 수년 전, 그러니까 90년대 초중반 부터였을 게다.
대학졸업을 앞둔 운동권 학생들, 혹은 그 비스무레한 졸업생들에게 '애국적 사회진출'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지금 들으면 촌티나기 짝이 없는 이 명제는. 학교생활을 하면서 얻은 성과물들을 안고 사회에 진출하여 부문운동에 종사하는 '애국시민(?)'이 되어보자는, 어찌보면 다소 애처로운 변명이나 위안이 되어주기도 했던 화두였다.
그 구호를 외치던 이들 중 일부는 386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고 일부는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혹자는 이후 붐을 이룬 문화운동, 시민사회운동에 투신하기도 했고 환경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등에 몸을 담기도 했던 것 같다.
물론 대다수는 주류사회에 투항하여 먹고살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간혹 다단계 판매업에 빠져들거나 종교계로 귀의한 사람도 있다는...^^)
그렇게 다른 삶을 선택한 이들을 비난할 생각은 별로 없다.
먹고 살기 바쁘다는 걸 누가 뭐랄수 있나.
2.
가끔 취업이나 진로를 고민하는 후배 게이들을 본다.
그네들에게 나는 조심스레 '게이적 사회진출'을 권하곤 한다.
말하자면 게이로서 가급적 차별이나 구속, 편견에서 자유로운 직종에 종사하라는, 예를 들자면 전문직이나 예술계, 자영업, 일부 서비스업종 등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물론 그럴 선택권이 있다면 말이다.
어쩌면 죄없는 희생양이 되지 말고 그냥 현실과 타협하라고 부추기는, 소극적이고 비겁한 회유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역마살과 엔지오활동으로 청춘을 보내던 나 역시 최근, 진로를 약간 틀기로 결심했다.
한국 출신의 게이로서 그런 일을 평생동안 한다는 것은 커다란 개인적 위험과 희생을 요구했고, 나로 말하자면 그럴만한 그릇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는 그간의 내 커리어와 그닥 어울리지 않는 포지션의 제안도 받았다. 애국적 사회진출과는 거리가 멀지만 '게이적사회진출-소극적 의미의'을 원하는 입장에선 상당히 매력적인 포지션이었다.
'애국적사회진출'과 '게이적사회진출'이 충돌하는 접점에 삐져나온 고민!
뒌쟝! 별 것도 아닌 일로 너무 철없이 오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달리보면 애당초 경솔했던 것 같기도 하고......
3.
친구사이에서 새로 일할 간사를 뽑는 자리에서 멋진 놈을 봤다.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용감하게 애국적사회진출과 게이적사회진출을 동시에 시도하려는 그가 참말로 진짜로 멋지게 보였다.
그가 친구사이랑 함께 일을 하게 되길 바랬지만... 결과는 내가 원하는 쪽으로 나진 않을 것 같다.
솔직히 서운하다.
그에게가 아니라 그를 통해 다시 한번 자기최면을 걸어보려던 나 자신에게 서운하다.
또한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가 서운하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 오늘의 결론
1. 간사가 될 뻔했던 ㅅ아무개님. 너무 부담갖거나 미안해하진 마세요. 그냥 친구사이 회원으로서 님이 할 수 있는 일도 아주아주 많을 겁니다.^^
2. 앞서 어느 고매하신 분^^이 설파하신 것처럼 나도 내가 살아온 삶을 절대 '후회하지 않아.'
2. 애국적 사회진출. 역시 정파 따라 개념도 이렇게 바뀌는군요.
3. 미등소 언니에게 후회할 일이란 미모가 좀 딸리다는 것, 그것밖에 더 있을까요? 그거 빼고는 별로 없다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