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사각지대에 방치된 성적소수자들
[경향신문 2006-02-16 13:56]
#1. B씨(고교 2)는 동아리 선배로부터 “네가 게이인 것을 알고 있다. 만약 나랑 자주지 않으면 소문내겠다”고 협박당했다. B씨는 선배 제안을 거부했고 결국 성폭행을 당했다.(‘버디친구닷컴’ 고민나눔방 게시판 사례)
#2. 박모씨(39·여)는 동성연애를 해 온 공모씨(32)가 관계를 끊으려 하자 흉기로 위협, “남편에게 동성연애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 구속기소됐다. 검찰은 ‘죄질은 강간 또는 특수강간에 가까우나 동성연애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했다.
최근에는(1월30일) 20대 김모씨가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만난 이모씨(30)에게 성폭행 당했다. 김씨는 이씨를 강간혐의로 고소했지만 이씨는 강간죄가 아닌 강제추행 혐의로 입건됐다. 피해자 김씨는 여성으로 성전환한(트랜스젠더) 주민등록상 남성이기 때문이다.
성적소수자들(양성애자,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현실에선 여전히 뿌리깊다. 위의 세가지 예는 성폭행을 당한 성적소수자들이 얼마나 인권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성정체성’ 악용돼=우리나라 성적소수자들은 성폭행 뿐만 아니라 언어적·정신적·환경적 폭력 등의 ‘성폭력’에 무방비 상태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정체성이 공개되기(아웃팅) 때문이다.
피해자는 아웃팅으로 인해 가족, 학교, 직장 등으로부터 ‘왕따’를 당하며 가정생활 및 사회생활에서 존재 기반 자체를 잃게 된다. 게다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공개해야 되기 때문에 성폭력을 당해도 사건을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미약하다. 가해자는 이 점을 악용해 똑같은 범행을 반복해서 저지른다.
성폭행 피해자들은 또 신고를 하더라도 경찰조사단계에서 2차적 가해에 노출될 위험이 매우 크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의 상담사례 기록에는 ‘(경찰이) 너희들은 섹스를 어떻게 하냐라고 말했다’ ‘그들은 제가 스토킹 당하고 강간당한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기막혀하면서 비웃고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더군요’ ‘정말 모욕적이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등의 내용들이 올라와 있다.
실제로 지난 15일에는 한 사병이 부대장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상담을 요청했으나 비밀이 지켜지지 않아 한때 자살을 생각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성정체성 공개에 따른 2차적 피해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동성간 성폭행을 강력히 제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미흡한 게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차별적 제도가 악순환 초래=우리나라 형법(제297조)에서는 강간죄의 피해자를 여성으로 한정하며 범죄행위는 ‘성기삽입’을 한 행위에 한정하고 있는 등 성적 소수자에 대한 배려는 커녕 명시적으로 그들을 차별하고 있다.
피해자가 아웃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재판장에 선다 해도 가해자에게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을 선고할 수 있는 ‘강간죄’가 아니라 ‘강제추행죄’(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가 적용된다.
동성애자 인권단체들에 따르면 피해자들 대부분이 성정체성 공개를 꺼려 법적 대응을 포기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의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인권 NAP) 권고안은 주목할 만 한다.
국가인권위는 성적소수자의 정보이용권 및 정보접근권 차별 해소, 동성애에 대한 차별을 내포하는 군형법, 군인사법 시행규칙 등 관련 법령의 폐지 또는 개정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성전환자 및 동성간 성폭력 피해자를 강간범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강간죄의 구성요건 중 객체와 범죄행위의 내용을 보다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방향으로 형법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인권위가 성적소수자의 인권 보호방안을 제시하며 성적소수자 인권을 보호하려는 시도는 유럽 등 선진국에 비하면 다소 뒤늦은 감이 있다.
◇사회적 공감대 절실=스웨덴의 경우는 이미 1984년에 형법에서 성범죄 개념을 확대, 동성간의 성교·구강성교 및 항문성교도 강간 유형에 포함시켰다. 남성도 여성 가해자에 의한 강간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명시하는 등 성폭력 대상을 대폭 확장시켰다.
성적소수자 인권단체들은 무엇보다도 성적소수자에 대한 삐딱한 사회적 시선을 경계했다. 한국남성동성애자 인권단체 ‘친구사이’관계자는 “동성간 사랑을 성폭력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 자체도 당사자 입장에서는 성폭력”이라고 강조했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 선우유리 대표는 “동성애자를 ‘변태’라고 보는 사회적 시선부터 사라져야 한다”며 “특히 검·경찰 등 국가기관에서의 성적소수자에 대한 인권 존중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성애자 인권연대’ 관계자는 “동성간 성폭력을 이성간 성폭력과 동일 선상에서 해석돼야 한다”며 “동성간 성폭력도 ‘중대한 범죄’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미디어칸 고영득기자>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 경향신문 & 미디어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