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국민배우는 '동성애자', 그러나
[오마이뉴스 2005-11-19 15:42]
[오마이뉴스 배을선 기자] 한국에서 배우 안성기를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배우'라고 부르는데 반감을 가질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오랜 연기생활을 통해 다져진 전문적인 연기력뿐만 아니라 그의 삶이 한국인이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에 일치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스타임에도 언제나 소박한 개런티만을 요구하고, 특별한 스캔들도 없다. 게다가 스크린쿼터를 지지한다. 이쯤 되니 그가 '국민배우'로 불리는 건 당연지사이겠으나 사실 한국에서 '국민배우'라는 타이틀을 얻는 건 매우 까다로운 일이다.
그렇다면 지구 반대편의 상황은 어떨까.
오스트리아의 국민배우는 '동성애자'
▲ 오스트리아의 국민배우 알폰스 하이더.
ⓒ2005 haider.at
오스트리아에는 알폰스 하이더(47, Alfons Haider)라는 유명한 배우가 있다. 그는 전문적인 엔터테이너로 불린다. 그는 연극배우이자 영화배우이며, 쇼 모더레이터와 캬바레티스트, 뮤지컬 배우를 겸하고 있다. 또 가수로써 앨범도 몇 장 냈다.
그는 유명세만큼 어마어마한 개런티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직 미혼이다. 그리고 동성애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알폰스 하이더를 오스트리아의 대표배우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알폰스 하이더는 매년 일종의 국가행사이기도 한 오스트리아의 '오페라발'(Opern Ball)의 사회를 보며, 국영TV의 프라임타임 쇼를 진행한다. 그는 문화정치학에도 일가견이 있어 TV토론회 등에 패널로도 출연해 가끔 자기주장을 펼치며 동성애자들의 운동단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가 연예활동을 함에 있어 동성애자라는 타이틀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에서 배우들이나 유명인사들의 '커밍아웃'은 이제 별다른 뉴스감도 아니다. 그들은 새로 사귄 애인들을 대중매체를 통해 소개하며, 종종 스타일리시한 게이·레즈비언 카페와 바 등에 한번쯤 가보기를 권유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스트리아는 개방적인 나라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보수적인 가톨릭국가에서 열리는 동성애 축제
오스트리아는 전형적인 가톨릭 국가다. 그만큼 다른 이웃국가들에 비해 보수적이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중유럽을 식민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성기를 그리워하며 낡고 오래된 그들만의 문화를 관광산업으로 발전시켰다.
미국의 스타벅스가 재미를 못 본 유럽국가 중 한 곳이 오스트리아다. 이들은 테이크아웃 커피보다 100년 정도의 역사를 지닌 전통카페에서 커피 마시기를 즐긴다. 오랜 전통 속에서 살아온 탓인지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새로운 것 또는 이질적인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때문에 '보수성'은 오스트리아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을 바라보는 시각만큼은 다르다. 오스트리아에서 동성애는 그저 '취향'의 차이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매년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에서는 동성애자들이 주축이 된 축제가 열린다.
비엔나 시청 앞은 매년 5월 중순 하루 동안 특이한 복장을 한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라이프발'(Life Ball)이라고 불리는 이 축제에는 세계적 유명인사들도 대거 초청된다. 이 축제에는 매년 이 축제의 패션쇼만을 위한 디자이너가 선정되는데 올해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패션쇼를 맡았다.
▲ 라이프발 2005 공식 홈페이지. 도다텔라 베르사체, 라이자 미넬리, 하이디 클룸 등의 유명인사들이 대거 초청된 2005년 라이프발.
ⓒ2005 Lifeball.at
1993년 시작돼 올해로 13회를 맞았던 라이프발은 공식적으로는 '에이즈자선행사'(AIDS Charity Event)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자유정신과 오픈마인드를 대변하는 동성애자들의 축제이며 이들과 뜻을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의 축제다.
비엔나 시는 이 축제를 위해 시청건물을 대여해주고, 전 세계에서 몰려든 5백여 명의 기자들은 열띤 취재경쟁을 벌인다. 가수 엘튼 존은 매년 이 축제를 찾는 VIP고객이다. 이 모든 행사는 오스트리아 국영방송인 ORF에 의해 독점 생중계된다.
라이프발에서 벌어들인 돈은 모두 에이즈환자 및 HIV 감염자, 혹은 이들을 위해 일하는 단체들을 위해 쓰여진다. 이 축제의 수입은 일반시민들이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구매하는 티켓과 기부금으로부터 나온다. 티켓 값은 75유로(약 10만원)와 135유로(약 18만원) 등 두 종류로 저렴한 편은 아니지만 매년 4천여 명의 오스트리아 인들이 이 티켓을 구입하기 위해 지갑을 연다.
그러나 법제도는 동성애자들에게 폐쇄적
▲ 동성애자 동거인에게는 임대차계약에 개입권이 없었다.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2005 hosiwien.at
그러나 동성애자들의 개방적 축제와는 달리, 오스트리아의 법제도는 동성애자들에게 그다지 관대하지 않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에서 동거인이 동성인 경우, 임대차계약의 개입권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동거인 및 자녀들(입양 포함)은 의료보험 혜택 등 여러 가지 사회보장 제도를 동등하게 누리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의 동성애자들은 2003년 7월, 비엔나 동성애자인권단체(HOSI)가 오스트리아를 유럽인권재판소(EGMR)에 제소(카르너 대 오스트리아 사건)해 오스트리아의 유죄를 이끌어 냄으로써 자신들의 권익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동거인이 동성일 경우 임대차계약을 위한 개입권이 없음을 제도화한 오스트리아는 유럽인권조약의 8조항(사생활과 가족보호조항)을 위반하며 관계상 14조항(차별금지조약)을 위반했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보수적이고 느린 오스트리아에서 이 위헌사항을 개정하는 과정은 더디게 진행됐다.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로부터 2년이 훨씬 지난 올해 11월 10일에서야 오스트리아 헌법재판소는 "동성애자에 상응하는 차별적인 사회보장법규를 위헌으로 판정하며 폐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지금까지 이 법은 가사를 돌보거나 동거를 함으로써 공동의 가사를 꾸려나가는 동거인이 이성일 경우에만 보험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동거인이 동성인 경우에도 똑같은 보험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9개월간의 법안 수정에 동참하게 된 오스트리아의 보건복지부 마리아 라우크 칼랏 장관은 "공동보증의 가능성을 어떤 조건 하에서도 확실하게 열어놓을 것"이며 "성별과 관련된 그 어떤 차별의 형태에 반대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번 사건의 변호를 맡은 헬부트 그라우프너는 오스트리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부와 법원의 게으른 정치활동에 대항해 성공을 거두었다"며 환호했다. 동성애자를 위한 조직위원회 '람브다'(LAMBDA)의 위원장이기도 한 그는 "동성애 동거자들의 권익을 다른 모든 공동체와 평등하게 제도화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며 정부의 빠른 제도적 조취를 당부했다.
11월 10일, 동성애자들의 삶이 바뀌다
▲ 동성애자와 관련된 사회보장법안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자 오스트리아의 모든 매체가 이 기사를 헤드라인으로 다뤘다. 사진은 <데어 슈탠다드(Der Standard)>에 나온 기사.
동성애자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이번 오스트리아의 법제정으로 유럽도 영향을 받게 됐다. 유럽연합에 소속된 국가이거나 유럽연합에 준하는 협력국가들은 경제 및 정치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사회보장제도 또한 공동으로 꾸려가야 하기 때문.
이미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동성애자들끼리의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고,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일랜드 핀란드 프랑스 포르투갈 독일 등이 '동성애자 등록동거제'를 시행하고 있다(2003년 기준). 또한 새 EU 국가인 헝가리와 예비 EU 국가인 크로아티아는 ‘생활공동체를 위한 법적동등제'라는 각각의 국가형편에 맞는 새로운 제도들을 마련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동성애자들은 이번 오스트리아 헌재의 판결로 다른 보수적인 유럽국가들의 동성애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비엔나동성애자단체(HOSI)의 위원장인 헬가 판크라츠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 센세이셔널한 판결에 기쁨을 감출 수 없다"며 "이러한 판결은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유럽연합의 다른 모든 국가에 해당하는 것으로 유럽의 모든 동성애자들을 위한 소중한 판결"이라며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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