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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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저녁쯤에 전화에 대고 그녀가 물었다. 킥, 헛웃음을 터뜨리며 난 이렇게 대답한다.

"글쎄... 생각 중야."

뭘 생각한다고 말했던 걸까? '감성'의 영도의 꽃인 사랑에 대해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일. 흡사 신성모독이다, 의뭉스럽다. 나이가 들어버린 걸까? 달뜬 내 목소리와 게시판에 쪼아놓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횡설수설을 보고 눈치의 여왕인 주은이가 그렇게 물었다. 또 오방순은 몇 시간 전에 내 '사태'를 두고 이렇게 표현한다.

오방순 : 그럼 아니라는 뜻야. 뭘 생각하고 자시고야.
나 : 근데, 난 이제 느린 어떤 것을 생각해.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요즘의 난, 현재로 즉물화된 것보다 불안하지만 미래에 대한 내기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하겠다고. 아마도 그런 이유로, 형 연애해? 라는 질문에 킥, 웃고 말았던 것이리라.

몇 사람과 혜화동에서 가볍게 술을 마시고 들어와 책을 펴들었다. 내가 최근 2년간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밥맛없게, 그러나 줄 쳐가며 읽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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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이 파리에서 썼던 다음 문장은 놀라운 것으로, 문장 자체는 로마적이다 : "하나의 이미지란, 눈 깜짝할 짧은 순간에, 그 안에서 옛날이 지금을 만나 새로운 별자리를 형성하는 어떤 것이다."  - 파스칼 키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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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는 프랑스어 단어다. 애초에는 로마 시대의 오래된 장례 의식을 의미했었다. 화덕 밑에 놓인 죽은 자의 잘린 머리, 그 후에 장대 끝에 꽂힌 빚어서 만든 머리, 다음에는 지붕 위에 얹어놓은 머리, 그리고는 죽은 자의 얼굴을 찍어 만든 밀랍 마스크, 나중에는 미라의 머리를 감은 천에 나타난 얼굴을 모습을 본딴 밀랍 회화. 바로 이것이 imago였다.

즉, image는 이미 없어진 것, 부재한 것, 죽음과 적에 대한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고안해낸 시뮬라르크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미지로 구성된 사랑은 결국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나르시시즘적인 도착인 셈이다.

해서 누군가 나에게 연애해? 라고 물으면 이제 킥 하고 웃고 마는 이유는 사실,

"있잖아. 나 지금 그 이미지를 벗겨내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중야."

라는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기 때문이다. 사랑의 불꽃, 기실 그 이미지를 씹어먹느라 동원되는 인체의 열량인 것이다. 낭만적인 사랑, 기실 그 '실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본따 만든 밀랍인형이 녹아내릴 때 적용되는 열역학 법칙인 것이다.

이제 나는 느린 어떤 것을 원한다. 이미지가 다 벗겨내지고 나서 흉물스럽게 드러난 그 실재의 삶, 그 말갛게 산화되어 드러난 실재의 살갗을 사랑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미지의 허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시간은 도덕이다.

발터 벤야민의 이 말, 오방순 정도만 내 속사정을 대충 파악할 이 말 : 하나의 이미지란, 눈 깜짝할 짧은 순간에, 그 안에서 옛날이 지금을 만나 새로운 별자리를 형성하는 어떤 것이다."

옛날과 지금이 눈 깜짝할 짧은 순간에 만나 형성해놓은 이 '이미지'와의 싸움 때문에, 형 연애해? 라는 질문에 난 여전히 킥, 하고 웃고 마는 것이다.

시간은 도덕이다. 사랑에 있어 이 명제는 '거시기'하다.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참 알량한 이기주의자다. 빙글 돌아 한바퀴 춤을 추고 나서 씨익, 웃으며 이런저런 트집으로 뇌를 두 바퀴 돌리는 걸 보면, 아마도 난 다 녹아내릴 때까지 계속, 계속 돌아야 하는 밀랍인형인가 보다.

난 나에게 지랄하고 자빠졌네, 말하면서도 염치없이 부피 초과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런 남자가 좋다.
킥, 웃기는 일이다.




Henri Cartier-Bresson, "St. Petersburg 1980"

일테면 앙리 브레송의 사진들에서 읽혀지는 '소거되지 않을 어떤 아름다움'을 원하는 것이다.



들리는 곡 : My foolish heart, 빌 에반스



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