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무너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제는 종로 바닥에서 세 무더기의 상추를 쌓아놓고 '천 원'을 외치던 시골 농부인 듯 보이던 40대 남자 때문에 속이 상했었습니다. 정말로 가끔, 딱 한 장면 때문에 속이 무너질 때가 있어요.
2003-04-16, 이송자일은 제 별명입니다.
길을 걷다가 뭔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게 있으면 궁금증이 해결될 때까지 버티고 서 있는 버릇이 있어요. 오늘도 그랬어요. 아까 참에 라면이나 먹을 요량으로 김치를 사러 가는 길이었지요.
저희 집 옆에 새로 생긴 빌라가 있는데, 왠 젊은 청년이 핸드폰을 들고 빌라 안쪽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지 않겠어요. 근데 핸드폰 들고 있는 폼이 하도 이상해서 쌍심지에 불을 켠 채 눈여겨보았습니다. 핸드폰을 연 채 액정을 빌라 안쪽을 향해 보란 듯이 세워넣고 팔을 뻗고 있었어요. 액정에선 푸른 빛이 났습니다.
저 무슨 해괴망칙한 퍼포먼스인가 싶어 12프레임 저속으로 촐랑대며 걷던 이송자일, 돌연 72프레임 슬로우 모우션 모드로 걸음걸이를 바꿔 청년의 옆을 천천히 지나면서 B 사감의 눈초리로 꼼꼼히 감시했더랬습니다.
20대 초반쯤의 청년은 빌라 안쪽 1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1층에는 현관문 안쪽으로 몸을 반쯤 기울인 젊은 여자가 역시나 핸드폰 액정을 청년 쪽으로 향한 채 웃고 있더군요. 요 젊은 것들이 왜 핸드폰 액정을 서로에게 향한 채 바라보기만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집에 귀가한 젊은 여자, 그녀를 바래다 준 젊은 남자가 서로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건 알겠는데, 멀찌기 떨어져 왜 저런 해괴망칙한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모 내다 온 차림의 이송자일, 콧방귀를 세게 한 번 뀌어주고 그 곁을 지나칠 찰나, 갑자기 제 머리 끄댕이를 왈칵 잡아채는 노래 소리.
얼른 다시 뒤를 돌아다보았지요. 세상에나!
마구 웃던 젊은 여자가 핸드폰 버튼을 눌렀던 모양인데, 이때 동시에 남자의 핸드폰 수신음 소리가 들렸던 거에요. 사랑해 어쩌고 하는 한국 가요더군요.
그 미워죽겠는 닭살 커플은 여전히 핸드폰을 마주 들고 선 채 한 10여 미터 떨어져서 남자의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그들만의 노래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던 거에요. 꼿꼿이 서서 빌라 안쪽의 여자를 사랑해서 미치겠는 듯한 정열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젊은 청년, 그의 핸드폰에서 계속 노래가 흘러나왔어요. 안쪽의 여자도 핸드폰을 남자 쪽으로 향한 채 그를 향해 이쁘게 웃고 있더군요. 어둠 속에서 치아가 다 드러날 정도로.
그 닭살 연놈들을 족쳐야 했는데, 주리를 틀었어야 했는데,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는군요. 못 볼 걸 보고 만 거지요. 똥을 밟아버린 거에요!
아, 무너지는 하루.
리플도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
浪人: 당신 허박지나 찔러...~! [04/16-09:16]
데미안: 하하하하! 네트웍을 지배하는자가 최고의 닭살이 될수 있다. 공닭 기동대가 생각 나는군여... ^^! [04/16-16:36]
浪人: 상황보다 약간 미친 감정상태의 사랑이란 게 무서운 거지... 돈줘도 그런 짓하기는 힘들잖아? ^^ [04/17-02:28]
익살 스머프 : 미친 사랑이 뭐 어때서? 웃겨, 연애도 못해 본 것이.... 에잇, 선물이다!
열어 봐. 닭살 요리 스프야. [04/17-07:48]
浪人: 저... 연애의 꽤 '달인'이에요. 근데, 그 스프... 닭가슴살인가요? [04/17-09:27]
채를 쳐서 버무려도 시원찮은 판에....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