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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에게서 가장 먼 것을 감각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나28일 제1회 제주퀴어문화축제를 앞두고

김재훈 기자|승인2017.10.18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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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진영’이라는 허울 좋은 단어로 둘러친 울타리 안에 함께 갇혀 있을 때가 많지만 하나의 사회적 아젠다를 통과할 때마다 진보 진영에 속한 개인들은 무한히 쪼개어지는 스펙트럼으로 세상 밖으로 나타난다.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에 참석한 이들이 모두 똑같은 꿈을 꾸지 않았다는 점은 탄핵 직후 치러진 대선 과정에서 여실히 확인되었다.

진보 진영의 이합집산이 있을 때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진보 진영 안팎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분열의 통증과 연대의 환희에 대한 감각은 진보 진영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진보 진영은 충분히 분열되면서 다양성을 확보한 뒤 다시 연대할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 분열을 계기로 진보 진영 구성원들은 다양한 삶의 목적과 정체성을 재확인하며 저 마다의 정치적 스탠스를 다시 정리한다. 진보란 결국 자기 자신의 스탠스를 늘 재확인하려 하는 내부와 외부에서 작동하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스탠스를 재정리하는(혹은 재정리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우파’가 탄생한다. 굳이 지지하는 정당을 나누어 ‘신우파’를 규정할 필요는 없다. 노예제도를 철폐한 링컨은 미 공화당 소속이었고, 극우보수당을 지지하는 성소수자의 사례도 존재한다. 예컨대 지난 선거에서 홍준표를 지지하며 성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한 이가 있다면 그는 진보일까 보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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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어리석은 질문이다.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방법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신우파’의 양상을 희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대개 타인의 정치적 스탠스를 섣불리 진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파든 좌파든 정치적으로 각성된 이들은 '개혁적'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우파 정당의 레토릭이 된 ‘개혁보수’라는 말의 형용모순을 걷어내고 바라보면 그들의 개혁이 좌파가 추구하는 개혁과 방향이 다를 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역으로 극단적인 환경주의자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이기도 하다.

한편 사회적 정의는 멈추지 않고 경계를 넓혀 나간다. 노예제도 폐지, 여성의 정치 참여 등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실현 불가능한 일들처럼 여겨졌다. 아니, 상상이 불가능했다. 단단하게 구축된 인지부조화의 균열을 발견하고는 그 틈을 벌리고 인식을 확장하며 팽창하는 경계를 따라잡기 위해 나선 이들은 새로운 세계를 상상했다. 사회적 정의의 경계는 확장되는데 사유를 멈추고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를 일찌감치 고정해버린 이들은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신우파’의 역할을 수행하고 만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쟤네들 너무 멀리 가는 거 아냐?

이제 성소수자 차별 문제에 대해 얘기해보자. 왜 상식적인 진보 인사와 시민단체들마저도 유독 성소수자 차별 문제는 홀대하는 경향이 도드라지는 것일까. 박원순 서울시장의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는 발언과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내뱉은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발언은 선거를 의식한 위악적 행동이었다 간주하고 사과도 받았으니 얼른 잊어버리면 되는 것일까.

그러면 당시 문재인 후보의 발언을 규탄하던 성소수자들을 비난한 지지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사과했는가. 문재인 대통령이 며칠 뒤 사과했으니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 역시 반성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당시 SNS의 풍경이 잊혀지지 않는다. 대규모 인지부조화 회로가 가동되며 ‘동성애는 문재인의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명제가 ‘사실 나도 동성애를 싫어한다’는 동일시에 따른 자기 고백을 지나  '사실 국민들이 동성애를 싫어한다'는 집단혐오에 이르도록 한없이 질주하던.  여태껏 목격한 것 중 가장 극단적인 집단 혐오의 현장이었다. 그에 비하면 서울퀴어퍼레이드가 개최될 때마다 보여주고 있는 개신교 측의 동성애 반대 퍼포먼스는 귀여운 편이었다.

성소수자 혐오는 일반 대중만의 문제는 아니다. 혁명적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치는 진보주의자들의 공간에서도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슬로베니아(구 유고슬라비아) 출신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노동운동가들의 인식 체계와 여성 및 성소수자 차별 철폐를 위한 인식 체계 사이의 구조를 바라본다.

지젝의 두터운 사유를 후려쳐서 말하자면 노동 문제에 대한 인식과 젠더 문제에 대한 인식 사이에는 ‘시차’가 존재한다. 시차는 천문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멀리 있는 물체는 천천히 움직이고 가까이 있는 물체는 빠르게 움직이는 현상을 의미한다. 지젝은 노동 문제에 대해 충분히 각성된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문제나 성소수자 문제를 잘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를 이 시차 때문이라고 본다. 그 남성 노동자가 노동이라는 바로 눈앞의 대상을 관찰하는(혹은 그 대상에 시달리는) 동시에 세계 전체의 운동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운동을 고통으로 바꿔도 무관하겠다. 많은 이들에게 성소수자 운동 혹은 그들의 고통은 좀처럼 감각되지 않는, 말하자면 실감할 수 없는 세계다. 그러므로 그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재단된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아이폰을 만드는 애플의 CEO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양한 매체에서 성소수자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성소수자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이성애자들의 눈은 ‘정상성’의 투명한 막으로 가려져 있다. 그들의 대다수가 어쩌면 지나치게 정상적이고, 지나치게 이성애자인지 모른다. 말하자면 비정상적으로 정상적인 정상인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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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한민국은 역시 다이나믹한 공간이다. 한 장면을 보자. 2014년 12월의 풍경이 떠오른다. 지젝에게 알려주고 싶은 일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12월 8일 오후 당시 이창근 전국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 정책기획실장 등 쌍용차 해직 노동자들이 서울 중구에 위치한 서울시청 1층 로비에서 농성중인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을 찾은 것이다.

무지개행동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개신교 장로들을 만난 자리에서 선거를 의식해 내뱉은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는 발언에 대한 사과와 성소수자 인권 조항이 담긴 서울시민인권헌장 선포를 요구하며 밤낮없이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자리에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 정책기획실장과 동료들이 성소수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찾아갔다. 이창근 전 정책기획실장을 비롯 쌍용차 동료들은 ‘시차’를 대체 어떻게 극복하고 성소수자들의 미세한 운동과 고통을 감지할 수 있었을까.

다른 장면이 오버랩된다. 10월 28일 제주퀴어문화축제 첫 개최를 앞두고 행사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는 어제(17일) 헌법으로 보장받으며 국민 누구나 보편적으로 적용받아야 할 집회의 자유를 행정 당국으로부터 박탈당했다. 행정당국이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의 제주시 신산공원 사용 허가를 줬다가 며칠 뒤 취소를 통보한 것이다. 해당 지역 주민자치위원회와 부녀회 등 자생 조직의 극렬한 반대 민원이 그 이유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지역 사회는 잠잠하다. 쌍용차 지부 노조원들의 파격에 대해서 제주 진보 진영을 구성하는 시민사회와 도민들은 한 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런 자각 증상도 없이, 가만히 있음으로써 ‘신우파’의 역할을 수행해버리기 전에.

지젝은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 b)에서 대표적인 혐오주의 중 하나인 인종주의 문제를 다루며 유럽의 다문화주의에 대해 “거리를 두는 인종주의”라고 비판한다. “다문화주의는 타자의 정체성을 ‘존중’한다. 즉 다문화주의는 타자를 파기-폐쇄적인 ‘본래적’ 공동체로서 파악하며, 그런 공동체에 대해서 다문화주의자는 자신의 특권적인 보편적 자리 때문에 가능해진 어떤 거리를 유지한다. (...중략...) 그/녀는 이런 자리를 다른 특수한 문화들을 온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그리고 그 값을 떨어뜨릴 수 있는) 특권적인 보편성의 텅 빈 지점으로서 유지한다. 타자의 특이성에 대한 다문화주의자의 존중은 자기 자신의 우월성을 단언하는 바로 그 형식이다.”(352p) 지젝이 “다문화주의는 타자의 정체성을 ‘존중’한다”는 문장을 쓰면서 특별히 존중이라는 단어에 따옴표를 쳐 강조한 이유를 음미할 만하다. 물론, 위 문단의 ‘다문화주의’를 ‘이성애자’로 바꾸고 ‘인종주의’를 ‘성소수자 혐오주의’로 바꿔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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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거리에는 여전히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 각각의 목소리를 내는 소수들이 있다. 탄핵 촛불시위는 틀림없이 온 국민이 하나가 되었던 ‘촛불잔치’였다. 환상적이었던 잔치는 끝났다. 마냥 나중을 기다릴 수만은 없는 소수들에 대한 연대는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오히려 한바탕 잔치를 치른 뒤에 남은 쓸쓸함의 무게까지 사회적 소수자들이 감내하고 있는 모양새다. 제1회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는 예정대로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분주하다. 허울 좋은 국제자유도시 제주에 다양성을 존중할 줄 아는 국제적 감각도, 집회의 자유도 없다. 바람이 제법 차가워지고 있다. 지젝의 글 한 문단을 덧붙이며 장황한 글을 마무리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비정치적이라 간주되었던 영역들(여성주의, 게이, 레즈비언의 정치와 생태, 인종적 소수자, 그밖의 이른바 소수자에 관한 쟁점들)의 후근대적 정치화가 초래한 엄청난 해방적 충격을 온전히 인정해야 한다. 이 쟁점들이 본래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지각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새로운 형식의 정치적 주체화를 낳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정치적, 문화적인 조망을 철저하게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따라서 요점은 이른바 경제적 본질주의의 어떤 새로운 판본으로 회귀하는 것을 지지하면서 이 엄청난 진전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요점은 경제의 탈정치화가 도덕적 다수파 이데올로기를 가진 포퓰리즘적 신우파를 낳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 신우파는 정치적 주체화의 후근대적 형식들이 초점을 맞추는 바로 그 (여성주의적, 생태론적 등등의) 요구들을 실현함에 있어 주요한 장애물인 것이다.”(위 책, 576p)

김재훈 기자  humidtex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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