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12월 27일 WFUNA 산하 Millennium Project에서의 Internship을 준비하기 위해 연구실을
나온지 36일, 864시간이 흘렀다.
원래는 1월 5일에 Washington D.C.에 도착해있어야 했지만 어찌보면 지난 나의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땅에서 1년간은 혹은 그 이상의 기간동안의 삶의 준비를 열흘안에 끝내려고 했던
내 생각이 성급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복이 많은건지 비록 정신없이 바쁘던 연구소에서의 업무가 종료되었다고 하더라도,
지난 36일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만큼 바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2년간 맡고 있던 친구사이의 총무국장으로서 2007년의 회계결산을 마치고
2008년 예산계획을 차기 총무국장, 대표, 간사와 함께 작성한 것이 연구소 일을 마치고 했던
첫번째 번외업무였던 듯 하다.
그리고 2007년 상반기동안 일을 했던 Millennium Project 한국지부를 통해 미국본부에 맡겨졌던
재경부 용역인 Real-time Delphi Korea 연구를 위한 전자설문과 한국의 2017년을 예견하는 보고서인
SOFI Korea 작성을 위한 Data 수집도 마쳤다.
당시에는 아직 부모님께는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망설여졌던
차별금지법과 한국사회에서의 게이들의 삶을 다룬 한겨레 신문 ESC와의 인터뷰도
마쳤다.
인터뷰를 마친 후에는 부산 해운대에 있는 Centum 호텔의 로열스위트에서
부모님과 레스토랑 2호점 개업으로 정신없이 큰누나, 작은 누나 부부를 포함한
3박4일간의 가족 여행도 마쳤다.
그리고 물론 아직도 진행중이기는 하지만 내 인생의 커밍아웃에 있어서의 마지막 관문,
부모님께의 커밍아웃도 실천으로 옮겼다. 아마도 내가 게이라는 것을 부모님께
입밖으로 낸 것은 지난한 부모님께의 커밍아웃의 시발점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지난 10여년간 친구사이 회의 자료들, 동성애에 관한 이론서, 신문 스크랩 자료들 등
무수한 흔적들을 뿌려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부모님께는 아들이 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런 지난 10년간의 밑작업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상황에 있어서 겉으로라도
이성적으로 판단하시고 서로가 이해해보도록 노력하자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와
속으로는 가슴이 무너지시겠지만아들의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걱정안하는 듯이
행동해주시는 어머님을 있게 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안그래도 허약하게 태어나 금이야 옥이야 키워오셨던 부모님의 속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걸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오히려 더 밝고
긍정적인 모습만을 비치려 하는 나의 속상함은 아마도 부모님의 속상함에는 바닷가 백사장의
모래알 하나만큼도 안될런지도 모른다.
이 역시 아직은 어린 생각일런지도 모르지만, 이 과정은 일종의 모내기를 하기 이전의 밭갈이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평범한 땅에서도 곡물은 심으면 자라겠지만
밭을 갈아엎에 파헤치고 비료를 뿌려주면 곡물은 두배 세배 더 잘자라듯이, 지금은 서로에게
큰 상처가 되었겠지만, 부모님께서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으시도록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더 노력한다면 나와 부모님간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해왔던,
혹은 나의 성정체성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왔는지도 모르는 유리벽을 부숴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내가 그들에게 뭔가 해드린것도 많지 않고, 지금도 많이 보살펴드릴 수 없기에,
지금부터의 나의 인생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바닥까지 파헤쳐져 뻘건 속살이 드러나
피를 흘리고 있는 부모님의 상처를 치유하는데는 내가 열심히 잘 살고,
그분들이 내가 게이임에도 불구하고 자랑스러워하실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나 자신이 더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지금까지의 삶보다 더 치열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상황에서 그 무엇보다 내게 힘이 되어주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따뜻한 격려의
말들인 것 같다. 가족여행을 마치고 서울의 자기집으로 올라가면서 "잘 하고 어머니, 아버지
잘 보살펴 드리고 올라가."라고 말해준 작은 누나와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한 날 밤,
"소수자들의 삶은 힘든거야. 너는 오늘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렴. 축하한다."라고
내가 머물던 서재방 바로 옆의 자기방에서 문자메시지를 보내준 큰 누나,
커밍아웃 선배로서 "커밍아웃을 처음 한 순간이 지난한 부모님께의 커밍아웃 과정의 시작일 뿐,
더 열심히 살아서 부모님께 인정받는 수 밖에 없다."는 길을 보여준, 친구사이의 전양,
항상 푸근하게 친형처럼, 친구처럼 쉴새없이 떠들어대고 세상 모든 것에 불만을 터뜨려대는
나의 수다를 묵묵히 들어주기만 하는 차순녀, "당신을 세상에 서있을 수 있도록 해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서 이제야 커밍아웃을 하는것은 불효."라고 나를 혼내준 Hermes 벨트선물녀, 웬상,
그리고 서로 부모님들의 건강상태까지 체크하는 대학 친구들의 근심어린 격려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런 용기조차 낼 수 없을런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나를 사랑해주시는 모든 이들에게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다.
다행히 거의 한달을 끌어온 J1 Visa 발급도 지난 28일 DS-2019서류가 AIESEC에서 도착한 이후
너무 순조롭게 진행되어, 30일날 인터뷰를 통과하자마자 31일 오전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J1 Visa를
받을 수가 있었다. 그것도 신원이 매우 확실해서 미국에서 직장을 구해도 상관이 없다는 증표인
2 years rule이 해제된 상태의 J1 Visa였다. 사실 이 2 years rule이 걸려버리면 지금까지 내가
계획해둔 많은 일들을 수정했어야 했을 터인데 이보다 더 다행스런 일은 없을런지도 모른다.
아침에 대학의 산학협력단에 장학금신청서류를 제출하고 백양로를 따라 내려오니 마치
기본군사훈련에서 3일간 메고다닌 군장을 풀어놓고 사관병동에 들어와서 첫숙면을 취하는 날처럼
양 어깨가 가볍기가 이를데가 없었다. 그리고 오랫만에 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들을
어딘가에 쏟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MP/WFUNA에서의 Internship은 다음 단계를 위한 계단의 첫단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아직 나의 갈길은 매우 멀고, 지난할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아직도 떠나기 전에 짐싸는 일,
가서 살 집을 찾아보는 일, 부모님을 더 보살펴 드리는 일 등 남은 일들이 많다.
하지만 연구단을 떠나온지 36일째 되는 날 아침...
끝이 보이지도 않는 바쁘고 머나먼 내 앞에 놓여진 길을 가기전에 한숨 돌리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시점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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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도 마음도 고단하고 할 일도 태산같겠지만,
평소 갈고 닦은 끼랑 기갈로 잘 헤쳐나가리라 믿어.
이제는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대한의 게이가 되길~! ^_^
('나가면심심할껄녀' ← 작명 센스 지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