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1993)와 황석영의 「장사의 꿈」(1974), 강석경의 「나는 너무 멀리 왔을까」(2001)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성을 파는 남성들이 등장한다. 「아담이 눈뜰 때」의 서술자는 명문대 진학을 실패한 후 재수를 하면서 다양한 경험들을 펼치고 있다. 그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차츰 삶에 눈을 뜨며, 이후 명문대 입학을 거부한 채 글쓰기에 천착함으로써 성인기에 접어든다.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 살 떼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원하는, 전부의 것이었다. 그러나 내 소망은 너무나 소박하여 내가 국립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하는 어머니의 소망이나, 커서 삼성 라이온스에 입단하기를 꿈꾸는 어린 사촌동생의 소망보다 차라리 더, 어렵게만 느껴졌다.
서술자는 여러 인물들을 주로 성적인 접촉으로 연결고리를 만들며 만난다. 서술자뿐만 아니라 그가 만난 세 명의 여성들은 즉물적인 삶을 추구하며 일회적인 성에 사로잡혀 있다. 이들은 끊임없이 몸으로 만나며 서소를 파편적으로 알아가지만, 서술자는 자신의 행위뿐만 아니라 다른 여인들의 일상에도 별다른 가치판단을 내리고 있지 않다. 그는 누드모델을 하며 여성화가에게 돈을 받으며 성적 서비스까지 행한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 일절 여성화가를 비판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지나치고 있다.
서술자가 유일하게 매몰찬 가치판단을 내리는 대상은 다름 아닌 성매매의 대가로 오디오턴테이블을 주기로 한 오디오점 사장이다. 작품 속 동성애자로 그려진 가게 주인은 야전침대에서 성관계를 벌여야만 발기가 되는 기상천외한 성적취향을 지니고 있으며, 여성의 외모를 폄하하는 태도를 내보이고 있다. 그는 일시적인 성적 쾌락을 위해 적잖은 돈을 쏟아 부을 만큼 성에 관해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으며, 처음 관계를 가진 서술자와 항문성교를 실행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는 자신과 하룻밤을 보내준다면 레코드플레이어를 주겠다고 제의했고, 나는 나쁘지 않은 제의라고 생각했다. 턴테이블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제의가 가소로웠기 때문이다. 그건 재물을 받고 능욕을 당하는 것도, 순결을 빼앗기는 것도, 하다못해 처녀막이 파손되는 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것은 똥을 누는 것과 같을 것이었다, 나는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가 자신의 술수에 잠시 취하도록.
이러한 가게 주인의 성적 기행은 그로테스크하게 묘사됨으로써, 동성애자의 성적 제의는 서술자에게 가차 없이 힐난을 받는다. 작품 속 서술자가 동성애 성관계에서 여성체위를 맡는다는 역할설정은, 작품 속에서 동성애 성관계가 ‘똥’으로 환유되는 것과 결부된다. 변태적인 성행위를 일삼는 가게 주인은 서술자에게 항문성교를 통해서, 똥으로 대표되는 온갖 후기 자본주의의 찌꺼기들을 전달해주는 퇴폐적인 역할을 떠맡게 된다. 이에 ‘나’는 몹시 불쾌해하며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아직 만으로 미성년자인 자신을 착취하는 가게 주인을 비난한다.
“막바로 인터코스해요.”
그는 나를 보고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정체가 드러난 남색가의 미소를. (중략)
“남자의 몸은 정신적으로 느껴져. 군살 하나 없는 허벅지하며 단단한 엉덩이, 그리고 출렁이지 않는 매끈한 가슴팍은 여자의 비곗살과는 틀려.” (중략)
“호모로 가는 첫걸음은 상대방에게서 청결을 느끼도록 배려하는 거야.”
“미묘해. 호모란 간단한 건데도 나한테는 복잡해. 침대 문제만 해도 그렇다구, 난 야전침대에서가 아니라면 발기가 안돼. 잠은 쿠션침대에서 해야만 하거든. 그러니까 이건 삽입용 소도구야. 복잡하지.”
커다란 고급 침대 옆에 을씨년스레 보이는 군용침대가 놓여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야전침대를 다 조립하고 나서 내 곁에 와서 앉았다. 아주 다정스럽게. 그러나 그것은 내게 역겨운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엉덩이를 빌려주는 것쯤이야 어떻게 해서라도 할 수 있겠는데, 남자의 타액이 묻은 입술이며, 동성의 끈끈한 애무를 받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난관이었다.
“이봐, 동성끼리의 연애에는 전희가 필수적이라구. 그런데 우리들의 그건 몸으로 하는 전희가 아니야. 몸으로 가능한 전희라면 얼마나 쉽겠어. 하지만 몸만으로는 안 되는 게 동성연애야. 말했지만, 중요한 건 정신이야. 정신적 교감. 그게 중요한 거라구, 너는 지금 그 통로를 닫고 있어. 정신을 열어봐.” (중략)
그날 잠 속에서 나는 많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의 대부분은 화장실과 관련된 것이었다. 정화조의 물을 잡아당겨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거나, 줄이 잡아당겨지지 않았다. 변기에서 뽀글뽀글 부풀어 오르는 오물이 내 발목까지 쌓이고 있었다. 화장실 문이 덜컥 열리고, 하늘색 제복과 위생모를 쓴 여자 청소원이 바께스의 물을 변기에 들이부었다. 아, 어머니…….
이 순간 서술자는 일찌감치 조숙하게 성을 실행하려는 성인이 아닌, 어른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소년으로 복귀한다. 서술자는 이율배반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뒤바꾸고 있으며, 그의 동기는 동성애자의 일상을 철저히 꾸짖으면서 정화된다. 성에 탐닉해서 삶을 살아가는 20살 청년의 부유하는 기행은, 적어도 게이보다는 인간적이고 자연스럽게 그려짐으로써 권력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게이로 그려진 가게 주인이 오물을 전달하는 운반자와 소아기호증자, 성구매자로 묘사되는 것과 달리, 대동소이한 방식으로 자신과 성적인 관계를 갖는 30대 여성화가에게는 비교적 가치중립적인 시각으로 그녀의 삶을 해석하는 것과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지점이다. 성에 대해 개방적인 사고방식으로 일관했던 서술자가 유독 게이에게만은 철저한 윤리적, 법적 심판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뒷자리에 놓인 턴테이블을 안고 나는 가의 자동차에서 내렸다. 성인이 성인을 상대로 욕망을 행사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페도파일만은 용서할 수 없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무방비한 어린아이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폭력행위이다. 공공연히 조직된 미국의 소아애자 모임에서는, 어린이들이 성체험을 할 권리로부터 억압되어 있고 성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위의 지문은, 동성애나 성매매를 본인의 의지가 아닌, 변태적인 게이들의 유혹 탓이라고 치부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는 방어기제와 연결됐다고 보인다.
황석영의 작품 「장사의 꿈」은 어린시절 씨름대회에서 장사를 독차지하던 늠름한 청년의 기구한 삶을 다루고 있다. 그는 풍채 좋은 신체와 강인한 힘으로 인해 사춘기 시절 레슬러가 되기를 꿈꾼다. 하지만 남근을 상징하는 '낙지' 때문에 패가망신당한 아버지의 몰락 이후 상경해서 서슬 퍼런 도시의 삶을 가파르게 살아간다. 그는 ‘낙원탕’이라고 불리는 목욕탕에서 목욕보조원으로 일하게 되는데, 그가 경험하는 객지는 ‘낙원’과는 거리가 먼 것에 가깝다. 그는 트렌스젠더를 연상하는 한 남성의 제의에 의해 ‘따루마’라고 불리는 성인영화 배우로 일하게 된다. 그는 쉴 새 없이 영화를 찍으면서 애자라는 여배우와 사랑에 빠지지만, 거듭된 가난과 애자의 유산으로 인해 둘의 관계는 종결되고 만다. 애자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헤어졌다고 자책하는 서술자는 본격적으로 일확천금에 대한 욕망으로 달아올라서 이윽고 성매매에 빠진다.
한때 씨름 장사나 레슬러를 동경했던 서술자의 육체는 이제 오락적인 도구로 추락한다. 이와 더불어 서술자의 성기는 더 이상 남근의 자랑스러움으로 부풀지 않으며, 생명력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하릴없는 도구로 성적인 쾌락을 전해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는 애자가 유산을 하는 대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게이의 유혹에 빠져서 성인영화 배우 및 성을 파는 남성으로 전락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작품에서 추상적으로 그려진 게이는 괴이한 복장과 소름끼치는 묘사로 인해, “난 인물인데 개천에서 썩는 용”에 일조하는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알록달록한 홈스펀 저고리를 입고 빨간 구두를 신었는데, 푸른빛이 날 정도로 흰 얼굴이며 흐릿한 눈깔이 아주 불쾌했어. 머리가 길었는데 손가락으로 꿈틀꿈틀 쓰다듬어 올리는 모양이 흉물스럽더군. 작달막한 키에 살집이 통통해서 손목과 발목, 무릎의 관절마다 주름이 잡혀 있었지, 기분 나쁜 자식은 벗은 아랫도리를 수건으로 가리고 높다란 목소리로 말하네.
(중략)
녀석의 보드랍고 새하얀 살결을 만지자 구역질 비슷한 느낌이 솟아오르더란 말야. 옆구리에서 정강이로, 목덜미에서 손끝으로, 어깨에서 허리로, 궁둥이에서 발뒤꿈치로, 죽죽 밀어나가다 드디어 가슴에서 불두덩으로 내려가는 순서에 이르렀지. 어렵쇼…… 없잖아. 불알이 없잖아. 불알이 없더라 그 말야. 터진 풍선 같은 샅의 주름살이랑 손가락 한 개만큼의 상처자리가 있더구만.
그가 작품 후반부에서 오랜 성매매의 결과 발기부전에 시달리며 칩거하다가 도시를 떠나면서 다시금 발기를 경험하는 것은, 잃었던 남성성의 회복을 통해 작품의 해피엔드를 설정하고 있는 결과이다. 이렇듯 이 작품에서는 게이와 정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유한부인의 부질없는 욕망에 의해 장사의 남성성이 훼손된다고 그려지며, 이러한 인물들이 거주하는 도시를 빠져나가고 전통적인 공간으로 회귀함으로써 서술자의 남성성이 회복된다는 발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강석경의 「나는 너무 멀리 왔을까」에서는 명시적인 성매매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작품의 서술자는 20대 시절 순수함을 한 게이에게 빼앗기게 된다. 그는 직업상의 약점 때문에 연거푸 상관인 게이에게 성을 상납하는 형식으로 관계를 지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서술자에게 지독한 트라우마로 자리 잡아서, 그는 힘겹게 과거 자신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30대에 이르러서 한 여성과 이성애 관계를 설계함으로써 동성애 관계로 쇠약해진 자신의 정신과 타락했다고 여겨지는 마음을 되찾으려고 동분서주한다.
이처럼 성을 판매하는 남성들이 등장하는 세 편의 작품들에서는, 천편일률적으로 게이가 등장함으로써 게이들은 유혹자로서 순수한 이성애 남성들을 교란시키는 훼방꾼으로 설정된 점이 눈에 띈다. 작품 속 중심인물들의 남성으로서의 순수함과 힘을 깎아내리는 대상들이 게이들과 바람난 여성들로 그려짐으로써, 성을 파는 남성들은 면죄부를 받게 된다. 이러한 작품들은 성을 파는 여성들의 말로가 대개 죽음이나 불행으로 마무리되는 것과 달리, 작품 후반부에 대개 원래 지점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구원받게 된다.
이순원의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1992)는 이름 없는 테러리스트가 압구정동에 살고 있는 여러 인물들을 ‘테러’한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작가는 작가후기를 빌어서, “윤리라는 이름의 테러리스트” 를 자처하며, “압구정동식 삶의 여러 형태를 단순 폭로가 아닌 그 욕망의 밑바닥을 진단하고, 그 욕망이 빚어내는 부패와 타락에 대해 대결방식을 가장 극단적 경고로서 혐오적 테러를 제시하기로 했던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거창한 대의명분을 품은 테러리스트는 여러 인물들을 살해한다. 한때 공장노동자로 근무하다 지금은 특권층을 상대로 성을 팔고 있는 젊은 여성, 포르노그래피에 탐닉하는 노파, 그리고 트렌스젠더 ‘강혜리’를 잔악무도한 방식으로 처단한다. 일종의 ‘확신범’인 가해자는 피해자들의 목숨만 처단할 뿐, 성폭행을 하거나 재산을 훔치지 않음으로써 투사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드높이고 있다.
트렌스젠더 ‘강혜리’를 죽인 가해자는, 호모포비아적인 관점의 연속선상에서 쉴 새 없이 직유법을 쓰며 강혜리를 정상성을 이탈한 범주로 단죄한다. 강혜리가 생물학적인 남성으로 태어났으면서도, 후천적으로는 여성으로 자신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 극심한 반감을 품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려진 강혜리는, 호모포비아들이 상정하는 트렌스젠더와 남성 동성애자의 전형적인 편견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인형놀이, 여성복장 착용에 대한 선호, 미인, 성도착 등의 단어들이 그녀의 삶을 설명하는 상징으로 활용되고 있다.
강혜리는 이러한 성장배경 외에도, 성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을 나타내는 면모를 드러낸다. 그녀는 어린시절부터 남성들과 숱한 성관계를 가지며, 동성애 관계에서는 성관계 시 항문성교가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고 서술된다. 또한, 강혜리는 사춘기 시절 주로 이성애자 소년들과 성관계를 즐기는데, 이러한 만남들은 장난스러운 풍경으로 묘사된다. 독자들은 이러한 서술을 통해, 동성애자가 나누는 성행위는 육체에 탐닉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성애 관계보다 동성애 관계는 사랑이나 진중함이 덜한 불완전한 만남이라는 인식을 품게 될 우려도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문제적인 대목은 트렌스젠더의 인권을 철저히 무시하는 서술태도이다. 기자는 뚜렷한 거래조건 없이도, 강혜리와의 인터뷰 때 그녀를 우월한 위치에서 통제하며 사생활을 침해하는 온갖 질문들을 거리낌 없이 쏟아낸다. 게다가, 기자는 강혜리의 동의 없이도 그의 성전환수술을 도맡았던 진료기록을 열람하면서 그녀에 관한 사생활을 속속들이 추적하고 있다. 또한, 기자의 질문은 트렌스젠더가 살면서 느끼는 다양한 일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은 채, 오로지 성에 국한된 질문에서 이야기의 흐름이 탈피되고 있지 않다.
“검사받을 때 얘기만 해봐요.”
“막 그러니까 좀 높은 사람이 오더라구요. 그러더니 그 사람이 내가 군대에 가기 싫어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여자라서 그러는 건지 확인해 봐야겠다면서 사람들이 없는 어떤 방으로 데리고 가요. 그리곤 검사를 해야 하니 옷을 벗으래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거기서는 벗었지요. 우선 위에 옷을 벗어보라고 해서 벗었더니 그 사람이 어, 여자네, 해요, 그리고 나선 아래 치마를 올리고 팬티를 내려 보라고 해서 그렇게 했더니, 너, 게이야? 하고 물어요. 그리곤 그대로 가만히 있으라고 그러곤 다른 사람들 몇 명을 데려와선 다시 벗으라고 해요. 아마 검사를 하는 군대 의사들 같았는데 한 의사가 와서 가슴도 만져보고 아래도 만져보고 하더니 이런 애 잘못 보냈다간 큰일나지, 해요.”
위의 지문은 강혜리가 군입대 신체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명시적인 성추행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이에 분노하거나 항의하지 않으며 수동적으로 임하는데, 이 작품 전체에서 강혜리는 이성애자와의 성관계에 준비된 자세로 있다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군의관이 강혜리를 보고 말하는 “큰일”이라는 단어는 성폭행을 상징하는 듯하다.
또한, 작품 속에서 강혜리는 은마클럽에서 무희로 일하면서 종종 성을 파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는 성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성매매도 사랑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고로 그가 성매매 유사직종에서 종사하는 주된 이유는, 트렌스젠더로서 타고난 기질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기자는 20세기 현대 산업사회의 인간소외문제를 동성애에 탐닉하는 노조활동가와 트렌스젠더와 성을 파는 여성들의 비루한 삶으로 그렸던 독일영화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을 보았느냐고 공격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강혜리의 삶 자체를 현대 사회가 빚어내는 환락의 찌꺼기라고 등치시키고 있다.
“그냥 우리도 좀 떳떳하게 살고 싶고, 우리를 보는 것도 무슨 벌레 보는 것처럼 안 했으면 좋겠어요.”라는 강혜리는 나름대로 정치적인 소신을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내 죽음에 내몰린다. 청소년 시절 부모의 이혼과 학창시절 당시 집단따돌림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해야 했고, 성전환수술을 받았지만 주민등록증조차 휴대할 수 없이 사는 강혜리의 삶의 고충은 테러리스트의 눈에 동정의 시선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가거라, 슬프고도 불쌍한 인생…… 어느 곳 어느 부모 아래 다시 태어나든 그때엔 꼭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 이번 삶에 풀지 못한 한도 풀 것이며…….”라는 말을 쏟아내며 강혜리는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테러리스트는 “자본 계급의 상징적 대명사”로 압구정동을 규정한다. 강혜리를 비롯한 연쇄살인 희생자들의 삶은 “이 땅 자본들의 끝없는 욕망과 타락의 전시장, 아니 똥통같이 왜곡된 한국 자본주의가 미덕처럼 내세우는 환락의 별칭적 대명사”이자 “욕망과 타락의 가장 민감한 성감대”이기에 그들을 단죄하는 것이 곧 신성한 행위라고 행위를 정당화한다. 강혜리의 삶은 민족의 순결함을 갉아먹는 퇴폐적인 외세의 힘으로 보이기에, 그를 비롯한 성을 파는 여성들이나 성에 집착하는 여성들을 절멸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