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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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게이의 슬픔

‘호모’라는 이유로 목숨을 끊은 친구들, 기나긴 터널과 같은 나의 사춘기
<선데이 서울>로 우리의 이름을 확인하던 시절은 지나고 인권운동이 찾아왔다

▣ 이민철/ 남성동성애자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살아남은 자의 슬픔>, 브레히트)

영원히 사랑할 수 없다는 절망

나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전혀 다르게 읽히곤 했다. 브레히트는 투쟁과 전선에서 숨진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이 책을 썼다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호모라는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들을 떠올렸다. 나는 결코 강하지 않지만,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살아남았다. 아니 영악하게도 처절하게 고민하지 않은 덕택에 살아남았다. 나에게 사춘기는 아득한 터널이었다. 끝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다시 그 터널을 지나라고 한다면, 나는 자신이 없다. 그때 나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혼자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다. 평생 엄청난 비밀을 혼자 떠안고 살아야 한다는 부담은 사춘기 소년에게 너무 큰 짐이었다. 사춘기 소년에게 사랑의 가능성이 영원히 가로막혀 있다는 절망은, 인생을 끝없는 고통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내가 어떤 고통을 느끼는지 말하지 못하는 고통은 사춘기 소년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나아질 희망이 없었다.


△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교회의 냉담한 태도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육우당'의 추모식. 이렇게 어이없이 숨져간 동성애자들이 적지 않다. (사진/ 박승화 기자)

그래도 세월은 흐른다. 고통은 희미해진다. 가끔 우리 ‘살아남은 호모’들은 ‘살아남은 자의 기쁨’을 나누며 “독한 년은 살아남는다”라고 농담을 한다. 나는 자신을 “동성애자 생존자”라고 생각한다. 성폭력 피해여성을 성폭력 생존자라고 부르는 맥락을 빌려온 이름이다. 성폭력이 생을 위협할 만큼 치명적인 폭력인 것처럼, 동성애자라는 사실도 목숨을 위협할 만큼 치명적인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기를 무사히 통과해온 내가 대견스럽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인간은 가장 어려웠던 때를 떠올리면서 견딘다. 나에게 그런 시절은 사춘기 때다.

종로 P극장을 찾아헤매다

나는 80년대 청소년기를 보낸 30대 동성애자다. 나는(혹은 우리는) 여성지를 보면서 내 이름을 알았다. 학교 앞 떡볶이 집에서 우연히 집어든 여성지에는 여자가 된 남자에 대한 ‘충격 실화’가 담겨 있었다. <레이디경향>은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는 ‘게이’, 남성이면서 남성을 사랑하는 사람은 ‘호모’라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70~80년대에 사춘기를 보낸 남성 동성애자들에게 <선데이 서울>은 게이 커뮤니티로 인도하는 가이드 북이었다. <선데이 서울>에는 심심하면 호모들의 변태 행위에 대한 충격 르포가 실렸다. 대개 무대는 종로의 P극장이었다. 우리에게 충격 르포의 충격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그 영문 이니셜만이 우리가 외워야 할 모든 것이었다. 남들이 알아차릴세라 곁눈질을 해가며 P극장을 외워두고, 일주일 내내 망설이다 주말이면 P극장을 찾아 종로 거리를 헤맸다. 어떤 이들은 하루 종일 피카디리극장에 앉아 있다가 쓸쓸히 돌아오곤 했다. 종로의 P극장은 지금은 문을 닫은 파고다극장의 이니셜이었지만, 종로의 또 다른 P극장인 피카디리극장으로 오해한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20대 초반을 넘어서던 90년대 중반, 마침내 한국에서도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시작됐다.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변태가 아니고, 인권을 가진 존재이며, 사랑을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호모’라는 이름 대신 ‘게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5/12/0210030002005120605880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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