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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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리 2005-04-20 09: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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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나는 참 많은 위로를 얻고 살았다. 위로와 공감이 없이 어떻게 살아올 수 있었겠나. 결국에 자신의 슬픔이며 괴로움 같은 것들은 자신이 넘어서고 삭이는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힘인 걸.

그렇지만 나는 누군가를 위로하는 데는 참 젬병이다. 위로라도 못하면 몸이라도 떼워야 할 텐데, 그러질 못한다. 어떻게 잘 해보려고 해도 따라주질 못한다. 나도 참 모진 것이다. 사실 두렵기도 한 것이고. 아, 이 자기변명. 이라고 말을 뱉는 위선.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소설이 있다. 일기의 형식을 빈 소설이다. 진짜 일기, 혹은 수기이기도 하다. 박완서가 실제로 자신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아들을 잃고 눈물로 써 나간 글이다. 밥도 못 넘기고, 혹여라도 무엇을 넘긴다고 하더라도 구토를 하면서, 암, 내 아들이 죽었는데 내가 밥을 넘기면 그건 아니지, 하며, 또 자신이 믿는 신에게 왜 나한테 이런 고통을 주냐고, 할 말이 있으면, 당신이 존재한다면 한 말씀만이라도 해 보라고 신을 저주하며,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그를 위로한답시고 오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운 일. 그의 눈치를 보면서,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하는 의례적인 말이, 가증스럽게 보이지 았았겠나.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괴로운 것을.

그에게 뜻밖의 위로가 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딸네 집에 머물 때 딸의 친구가 놀러 오는데, 그는 혹시라도 또 무슨 말을 할까봐 탐탁지 않아 한다. 그런데 그 친구는 이런저런 맛있는 음식을 싸들고 와서, 그의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이 음식은 무엇으로 만들었는데, 어디에 좋고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다. 그는 모처럼 기분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이런 위로가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이에게 통하는 것은 아니다. 위로에도, 다 그 특수성이 있고 단계가 있는 것이다. 위로를 잘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런 것에 대한 어떤 감각을 지니고 있다.

내가 받았던 가장 큰 위로의 기억은 단 네 음절, "힘들겠다."였다. 정말로 힘들 때 힘든 척도 제대로 못하고 장난스럽게 내 심정을 말한 끝에 옆에 있던 선배가 무심히 했던 말. 우리의 화제는 바로 다른 것으로 넘어갔지만, 그때 내 맘이 얼마나 조용해졌는지, 그때 얼마나 눈앞이 환해졌는지,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사실 내가 그때 힘들어보았자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나의 비루하고 순탄한 삶에 슬픔이며 고통 따위는 들어서 본 적이 없는 걸. 그래서 더 환해졌던 거다. 이거, 힘들지 않구나, 하고.

위로를 받은 기억은 내가 하는 위로를 더욱 민감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상처 입은 영혼 옆에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가 좀더 고통을 덜까. 무슨 이야기를 해 '줄'까.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었던 것. 머리 굴리기 정도의 민감함은 위로의 성격을 아주 바꾸지는 못한다.

사실, 위로를 잘 하는 방법이 따로 있겠는가. 위로란 방법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통의 공감인 것을. 다른 이의 고통에 민감하지 못한 자가 어떻게 위로를 할 줄 알까. 다른 이에게 귀기울이지 못하고 있는 때에 위로를 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요즘 내 주변 사람들이 너무나 힘들어 한다. 너무나 크게 상처입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 같다. 그들 자신도, 그들을 보는 주변 사람들도. 나도 마음이 아픈 척하고 있지만, 눈물 한 방울 흘리질 못하고 있다. 나는 도무지 그들의 아픔이 상상되지 않는다. 무엇일까, 그것은.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마저도 두렵게 하고, 나를 그 검은 구멍 속에서 자꾸만 도망치게하는 그것은. 슬픔없이 살아가는 자는 이런 지경에 와야 슬프다.

모두들 이 긴 터널을 쿵쾅거리더라도 잘 빠져나왔으면 좋겠다. 깊어지지 못해도 좋으니. 눈물을 걷고, 한 발짝. 한 발짝.



비가 온다.
네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나는 비가 되었어요.
나는 빗방울이 되었어요.
난 날개 달린 빗방울이 되었어요.

나는 신나게 날아가.
유리창을 열어둬.
네 이마에 부딪힐 거야.
네 눈썹에 부딪힐 거야.
너를 흠뻑 적실 거야.
유리창을 열어둬.
비가 온다구!

비가 온다구!
나의 소중한 이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황인숙,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비나리팬 2005-04-20 오전 10:37

"모두들 이 긴 터널을 쿵쾅거리더라도 잘 빠져나왔으면 좋겠다."

저도 같은 심정입니다. ㅠㅠ
마음연결
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