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의 성애를 새로운 관계 형식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동성애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생성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푸코의 말이다. 마흔 여덟의 나이에, 그 동안 사람 관계의 상당부분을 청산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혹은 그 나이에, 푸코의 말대로 성애를 통해 새로운 관계 형식을 발견하고 발명하기 시작한다는 것 역시 예사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성애를 시작하기에는 적지 않은 그 나이에 나는 스스로를 이전의 이성애자가 아닌 동성애자로 새롭게 확인했고, 하여 이제는 동성애자로 존재하며 새로운 생성 속에 존재하기 위해 생성의 뒷면인 과거 관계의 많은 부분들과 단절을 결행하고 있다. 남편에게 이혼을 제기했고, 그 첫 번째 사유는 “나의 성정체성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단절을 감수하거나 혹은 스스로 칼질을 하기로 했다.
독해서인가, 둔해서인가, 혹은 마흔 여덟이어서인가? 이미 세상이 나를 어찌 판단할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혹은 세상과는 별로 단절할 일이 없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동성애자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나라다. 그들이 겪는 구석구석의 차별과 구태여 대상을 거명하지 않는 혐오를 견뎌준다면, 대한민국은 어쩌면 익명의 동성애자들이 살기엔 아직 그리 나쁘지 않는 나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상황은 내게 시작부터 익명을 허락하지 않았고 혹은 내 스스로 익명을 거부했다. 하여 익명의 동성애자들보다는 상당히 많은 단절을 시작부터 겪어야 한다. 게다가 사회운동과 정당 활동을 통해 이 나이의 다른 여성들에 비해 사회와 비교적 넓은 면을 접하고 살아 온 탓에, 상황 속에서 이어질 커밍아웃과 아웃팅으로 사회와의 접선에서 발생하게 될 불협화음이 상대적으로 비교적 많을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남편과의 단절은 최전선이다. 하지만 둘의 관계에서 한 쪽이 청산을 결심했다면 이미 그 관계는 끝난 것이다. 성인이 된 두 자녀와는, 단절이라기 보단 “분리”를 한 단계 진전시키는 것이다.
흩어져 각각의 가정을 이룬 다섯 형제자매들. 형제 중 하나인 마흔여덟의 기혼여성이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하며 ‘탈결혼’과 새로운 결합을 시작한다는 것이, 이성애자인 다른 형제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하지만 그들이 어떨 지를 염려하기 이전에, 다행히도 그들은 이미 마음의 상당부분을 접고 있었다. 돌아오라느니, 더럽다느니, 창피하다느니, 어찌 그럴 수가 있냐느니 하는 말들이 내게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들은 다행히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악다구니를 쓰거나 궁상을 떠는 것을 창피해하는 소위 “지식인”들이다. 한 차례씩은 화를 냈지만, 두 차례를 넘기며 거듭 화를 내지는 않을 사람들이다. 아니 두 차례의 화부터는 내가 참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소위 “지식인이란 것들”이 동성애라는 개인의 성정체성과 기본적 행복추구권에 대해 한차례를 넘겨 왈가왈부한다면 나는 너희를 “무식한 것들”로 취급하겠다는 말에, 그들은 두 번째의 화를 내지는 않고 있다.
다만 그들은 “형제자매들 간의 단절”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단절”이라면 이미 내 속에서 그들을 향해 수 차례에 걸쳐 단행되었었다. 학벌과 재력이 없는 남자와의 25년 전 살림시작은, 이미 학벌과 재력이 출중한 그들로부터의 단절이었다. 서른 초반에 만난 예수와의 동행과 사회운동의 시작은, 그들이 겨우 잊어버리기로 했던 단절에 또 다시 내 편에서 단절의 칼을 긋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흔여덟 이제야 꺼내 확인하고 발언하는 나의 동성애 정체성이 그들에게 다시 단절을 이야기하게 했다.
그런데도 “단절”은 내 속에는 잊혀지지도 무디어지지도 않은 채, 칼자욱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더 아플 것도 두려울 것도 없이 꺼내 확인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도대체 한 성인의 성정체성에 대해 다른 성인이 관여할 바가 무엇이란 말인가? 형제 중 하나여서 무관할 수 없다면, 그들과 세상의 혈연주의나 무지를 탓할 일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주변에서 그들의 무지와 혐오로 인해 상처 받을 다른 익명의 동성애자들을 위해, 부디 세상에 지식인 값을 지불할 것을 요구할 일이다.
되돌아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한국 사회 속에서 사회주의와 여성주의적 지향을 실천하고자 48년을 부대끼며 싸움을 그치지 않고 살아 온 어느 한 여성에게, 레즈비언적 존재방식은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존재방식 중의 하나다. 그리고 그녀의 욕망과 의지는 한 여성과 소통하고 있다. 대의와 명분이 아닌, 이제는 나의 욕망에서 시작된 변혁이어서 더욱 든든하다.
* '일다'에 게재된 모든 저작물은 출처를 밝히지 않고 옮기거나 표절해선 안 됩니다.
ⓒ www.ildaro.com
여성주의 저널 '일다' 하나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