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2/23
정말로 진창으로 취한 날엔 그 못된 술버릇이 외출 나갔다 살포시 젖은 발 들이미는 밤의 영혼처럼 재귀하곤 한다. 전화를 거는 일이 그렇다.
이 놈 저 놈에게 전화를 하지만 정작 술에서 깨어났을 때 난 내가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 지겹게 반복되는 낭패감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정말로 진창으로 취한 날'에 어김없이 발동되는 이 못된 버릇.
술 취해서 전화 거는 일을 외로움에 지친 영혼들의 노크 소리, 라고 이쁘게 미화해보았지 아무 소용 없는 일이다. 그깟 술 젖은 노크 소리에 꼭 닫힌 문 흔쾌히 열릴 리 만무하고, '쿨' 한 시대에 살고 있는 동시대 청년들이 나 같이 질펀한 촌뜨기의 주접을 받아줄 리도 없는 탓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어지간히 전화를 돌려댔던 것 같다. 예전처럼 술만 먹으면 술집 전화통을 붙잡고 씨름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변함없이 오래된 사진의 뒷면을 슬쩍 훔쳐보듯 그렇게 과거의 인간들과 새로 만난 인간들에 관한 기억들을 조각조각 몽타쥬하곤 한다.
더 낭패인 것은 예전에는 그렇게 취해서 전화를 해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거나 나중에 전화 받은 사람한테 욕찌기를 좀 얻어먹어야 환기했는데, 요즘에는 요 핸드폰 단말기에 고스란히 전화 번호들이 남겨져 있어 빼도 박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나한테 한 번이라도 괴로움을 당한 사람이라면, 자다 말고 깨어나 몽당 연필 자루 같이 잘 쥐어지지 않은 내 혀 꼬부라진 소리에 고문을 당한 사람이라면 다음부터 아예 전화를 받아주지 않는 게 좋겠다. 그런 게 쿨하고 좋다. 그러면 나도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 번호를 확인하고 낭패감을 곱씹는 일이 좀 줄어들 게다.
2004-11-22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전화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Elvis Costello | GloomySunday
지금은 저도 그 버릇을 고쳤어요.
남들에게 피해를 입히기 싫어서라기 보다는 쓸데없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은 이기심이 더 작용했던 듯 싶어요. 지금은 만땅 취하면 오히려 입이 굳게 닫혀 버리곤 해요.